범증(范增, ? ~ 기원전 204년)은 중국 초나라의 책사이자 정치가이다.
행적
본디 유식하고 지모의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정계로 나가 출세하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진나라의 기반이 약하고 훗날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 질것을 알곤 독경하고 농사일을 하며 여생을 보낸다. 마침내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항량과 계포의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나이 70세에 항량을 섬겼다. 초 회왕의 자손을 왕으로 옹립해 신망을 받을 것을 진언하여 항량의 초나라가 천하의 인정을 받을수 있도록 하였다. 항량이 장한의 계책으로 인해 죽자, 항우를 따랐고 항우에게 아부(亜父)라는 존칭을 받는다.
유방이 항우와 초나라를 위험하게 할 것을 예상하며 홍문의 회에서 유방을 죽이려고 했지만 항백의 배반(또는 변심)과 항우의 대담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또한 당시 항우의 수하로 있던 한신을 쓰거나 쓰지않을꺼면 죽여버리라 간언하였다. 허나, 항우는 듣지않고, 결국 한신은 항우를 떠나 유방에게 들어가 파초대원수가 되고 해하결전에서 항우를 쓰러뜨린다. 초한 전쟁이 격렬해지자 천하의 재사 장량과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에게 떠난 진평등과 지략싸움을 펼친다.
장량과 진평의 두 머리에서 나온 계략과 모책을 거의 모두 간파하였으나, 항우가 듣지않았다. 항우가 한번 듣지않으면 재차 권유하지 않아 항우의 몰락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말년엔 유방의 모사 진평의 반간계에 빠진 항우에 의해 쫓겨난다. 항우에게 퇴출당하고 천하를 떠돌다가 악성 등창이 생겨 실의 속에 죽었다. 범증 없이 뒤늦게 전쟁에서 패배한 후 반간계에 빠졌던 사실을 알게된 항우는 크게 후회하게 된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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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증 - 나무위키 2020.11.01.
범아부(范亞父) 범증 范增 작위 역양후(歷陽侯) 성 범(范) 휘 증(增)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고향 거소현(居鄛縣)[1], 부릉(阜陵)[2] 무덤 거소현(居鄛縣) 곽동(郭東)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278년? ~ 기원전...
<참고 자료>
범증에 대해 논한 글〔范增論〕- 이익(李瀷)
범증의 지혜는 유후(留侯)에 한참 못 미친다. 유후는 한 고조(漢高祖)에게 서둘러 인장(印章)을 녹이도록 권하였는데, 이것은 여섯 나라의 후사(後嗣)를 세우면 천하가 장차 각자의 군주에게로 돌아가 더불어 제업(帝業)을 이룰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국(列國)도 그러한데, 하물며 황제는 어떠하겠는가.
범증이 항씨(項氏)를 위해 낸 계책은 먼저 초(楚)나라의 후사를 세우는 것이었으니, 그 의중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처음에는 백성의 바람을 따라 주다가 일이 성공하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로는 존속시키자니 자신에게 해가 되고 없애 버리자니 반역이 되어 뒷수습을 할 수 있는 대책이 없었는데, 한(漢)나라가 그것에 힘입어 천하를 소유하게 되었다. 초나라가 망한 것에 대하여 초나라가 죄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여섯 나라가 다 마찬가지였는데, 삼호(三戶)의 참요(讖謠)를 유독 초나라 사람들만이 지었다. 초나라의 후사를 세운 것이 진실로 의리 때문에 한 일이었다면, 주(周)나라 왕실의 멸망에 대해 예로부터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었으니, 또한 어찌 초동목부(樵童牧夫)들 사이에 주나라를 계승할 만한 희씨(姬氏) 집안의 아이가 한 명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겠는가. 당시에 진(秦)나라가 무도(無道)하여 사해(四海)가 혼란에 빠지자 모두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를 멸망시켰던 것이지, 천하의 민심이 단지 초나라만을 위해서 복수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진승(陳勝)은 일개 사내로서 지모(智謀)는 부족하고 힘은 미약했는데, 여전히 강성했던 진나라의 군대에 대항하여 처음으로 일어나 패하였으니, 형세가 아마도 그러했던 것이다. 뒤이어 일어난 사람이 강하고 용맹한 항우(項羽) 같은 자였는데, 지혜로운 계책으로 보좌하고 너그러운 인덕으로 도와주었으니, 어찌 진나라를 이기지 못할 수가 있었겠는가. 애석하게도 항우는 사나운 행동을 고치지 않아 살인을 좋아하는 버릇이 갈수록 심해졌고, 범증이 밤낮으로 도모한 일이라고는 항씨가 황제가 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관중(關中)에 들어가서도 웅거(雄據)하지 못하고 끝내 남에 의해 패망하였으니, 패망의 조짐은 의제(義帝)를 시해할 때에 실제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항우가 진나라를 이긴 것이 반드시 초나라의 후사를 세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후사를 세우지 않았다면, 진나라가 과연 존속되고 오래갈 수 있었을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묻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논설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항우가 송의(宋義)를 죽인 것은 의제를 시해할 조짐이었고, 의제를 이미 시해하였으니, 이것이 범증을 의심하게 된 근본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그렇지 않다. 송의와 패공(沛公)은 모두 임금이 명을 내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범증이 항우에게 패공을 가차 없이 죽이도록 부추긴 것을 보면, 범증은 항우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고, 당시에 회왕(懷王)이 있다는 것을 다시 알지 못하였으니, 송의를 죽인 계략이 반드시 범증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겠다.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이르러서는 회왕은 평소에 항우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공에게는 관중으로의 진군(進軍)을 허락하였으나 항우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 항우가 만약 한결같이 회왕의 명령에 따랐더라면, 속수무책으로 남에게 천하를 양보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회왕을 겉으로 높여 주는 체하며 강제로 침(郴)으로 옮겨 가게 하였고, 천하를 제멋대로 분할하여 자신의 측근을 모조리 봉해 주면서도 품의(稟議)하지 않았는데, 범증은 이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패공을 파촉(巴蜀)으로 내몰았던 것도 범증이 모주(謀主)가 되어 벌인 일이니, 그가 회왕의 명령을 무시한 지가 오래되었던 것이다. 또한 항우와 회왕이 이미 양립할 수 없는 형세를 이룬 것은 실제로 범증이 부추긴 결과였으니, 회왕을 내쫓아 시해하도록 계책을 꾸민 것도 범증이 주모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가 마음속으로 ‘나는 회왕을 존중했으니 천하에 그 누가 나에게 공손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며, 회왕을 죽인 자는 다른 사람이니 천하에 그 누가 나에게 죄를 주겠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아이가 방울을 훔치는 작은 지혜이니, 동공(董公) 같은 사람이 있어 상복을 입은 군사들을 한번 채찍질함으로써 항우를 대역 죄인으로 내몰아 그 술책을 숨길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저 항씨는 초나라의 장수 가문으로서 위명(威名)이 세상을 압도하였으니, 진영(陳嬰)이 감히 왕이 되지 않고 소속되기 원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범증을 위한 계책으로는 애초에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무도한 자를 처단한 뒤에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한 채 천하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면서 천하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았으니, 그랬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과연 천하의 마음이 단지 초나라 후사에 달려 있어 그것으로 인해 거취가 결정되는 것이었다면, 회왕이 침(郴)으로 쫓겨났을 때 회왕의 여러 신하들조차 점차 배반한 것은 무슨 이유였는가? 강중(江中)의 역적은 바로 경포(黥布)이니, 회왕을 섬기던 신하였다면 같은 하늘 아래 살아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한나라가 경포를 높이 등용하였고, 세상에 그 일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또한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나는 진나라를 망하게 한 원인은 형세였지, 반드시 범증의 계책과 노력 때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范增論
范增之智。不及留侯遠矣。留侯勸漢祖促銷印。意謂復立六國後則天下將各歸其主。無與成帝業。列國猶然。况大君乎。增爲項氏謀。首立楚後。其心非難知。始也從民望。及至成功。彼特一筌蹄耳。然名分旣定。存則害己。去之爲逆。善後無策。而漢之所資以有天下者也。楚之亡。雖曰無罪。六國亦同然。三戶之謠。特楚人爲之也。苟以義而已則周室夷滅。今古憤寃。亦豈無一人姬家兒遺在芻牧之間耶。當時秦爲無道。四海沸潰。共起而滅之。天下之心。不但爲楚報仇而已。陳勝匹夫。謀淺力薄。而秦兵尙強。首事而敗。勢之或然者也。繼而興者。雄勇如羽。佐之以智計。濟之以寬仁。寧有不克。惜乎羽慓悍莫悛。嗜殺愈甚。增之日夜所猷爲。惟恐項氏之不爲帝。然而入關而不能據。終爲人所敗沒。其亡也實兆於義帝之弑。其克秦則未必緣先立楚後也。不然秦果存而能久耶。此不待智者而可見。說者曰羽之殺宋義。殺義帝之兆。而旣弑則疑增之本也。此大不然。義與沛公。均是君所命也。增嗾羽殺沛公不恤。則惟知害羽之當殺。而不復知懷王之見在也。殺義之計。吾知其必出於增也。及秦滅。懷王素不善羽也。是以與沛公而不與羽。羽若一聽其命。將斂手讓與人天下而無如之何。於是陽尊而勒遷之。擅割天下。悉封其私人而不稟。增未嘗有一言。沛公擯諸巴蜀。增爲謀主。其不有懷王之命久矣。羽與懷王已成不兩立之勢。而增實慫惥之。至於放弑之謀。亦安知其不爲之戎首乎。其心曰我則尊之。天下孰不與我爲恭。殺之者人。天下孰與我爲罪。此童獃偸鈴之小智。殊不知有董公者一策縞素。驅之大逆。而圈套無以掩也。夫項氏楚之將家。威名蓋世。陳嬰所以不敢爲王而願屬也。爲增計者。初不若仗大義誅無道。按秦之故。扼項撫背。以待天下之歸。其誰禦之。若果天下之心。只繫于楚後而爲之去就則郴之放也。其羣臣亦稍稍背叛何哉。江中之賊。黥布是已。凡北面懷王者。宜不可與共天。未幾漢崇用其人。未聞世有非之者又何哉。余故曰亡秦者勢也。未必增之謀與有力也。
*출처: cafe.daum.net/jangdalsoo/Yvcx/67
范增論 - 소식
소자첨
羽殺卿子冠軍 막 항우가 경자 관군을 죽였을 때
增與羽比肩而事義帝 범증과 항우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의제를 섬기어
君臣之分 임금과 신하의 신분은
未定也 아직 정하여지지 않았으며
爲增計者 범증을 위한 계책으로는
力能誅羽則誅之 힘이 항우를 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不能則去之 할 수 없으면 그를 떠나면
豈不毅然大丈夫也哉 어찌 굳센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增年已七十 범증은 나이가 이미 70세로
合則留 (의견이) 맞으면 남고
不合則去 맞지 않으면 떠날 것인데
不以此時明去就之分 이때는 거취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而欲依羽以成功名 항우에 의지하여 공명을 이루려 했으니
陋矣 비루하다.
雖然增高帝之所畏也 비록 그러하지만 범증은 고제가 두려워한 사람이다.
增不去 범증이 떠나지 않았으면
項羽不亡 항우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니
嗚呼 아아!
增亦人傑也哉 범증 또한 인걸이로다.
* 출처: cafe.daum.net/dong--yang/KIWp/148 동양고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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