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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상쟁(楚漢相爭)은 기원전 206년 진나라의 멸망 후 서쪽의 초나라 패왕 항우와 한나라 왕 유방과의 5년에 걸친 전쟁을 뜻한다.
개요
진나라의 붕괴
진나라(秦)의 급격한 통일 정책과 농민에 대한 과중한 부역(徭役)으로 기원전 210년 시황제의 죽음 이후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기원전 206년 옛 6국 중의 초나라(楚) 귀족인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타도했다. 이후 항우와 그의 협력자였던
유방(劉邦)과의 5년간에 걸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항우와 유방
진나라가 혼란해지자 항우는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유방도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항량과 항우는 초나라 왕의 후손을 회왕(懷王)으로 추대하였다. 기원전 207년 항우와 유방은 각각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으로 진격하였다. 회왕은 먼저 들어간 사람 관중(關中)의 왕으로 봉한다고 약속했다.
홍문의 회
진승(陳勝)이 죽은 후 항량(項梁)은 초(楚)의 회왕(懷王)의 손자로서 심(心)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똑같은 회왕이라고 일컫고 반진(反秦) 세력을 집결시켰다. 기원전 208년 8월 항량이 전사하자, 초나라 군사의 중심이 된 사람은 항우와 유방이었다. 9월이 되어 항우는 북로(北路)에서, 유방은 남로(南路)에서 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이때 회왕은 맨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왕(關中王)으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항우가 거록(鉅鹿)에서 진군(秦軍)을 쳐부수고, 또한 진 나라 장수 장한(章邯)을 항복시키는 등 하남(河南) 지방의 곳곳에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유방은 기원전 207년 10월에 한발 앞서서 무관(武關)을 돌파하여 함양을 점령하고 2세 황제 다음의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항복시켜 관중을 지배했다.
유방이 먼저 관중을 지배하자 격노한 항우는 총력을 기울여 단번에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고, 12월에 홍문(鴻門)에 진을 쳤다. 이 험악한 양자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유방이 사과하는 형식으로 열린 회견(會見)이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鴻門之會)이다. 항우 쪽에서는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일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항우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 기회를 잃었으며, 유방은 부하의 필사적인 활약으로 손쉽게 호랑이 굴을 벗어나 그 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 후 항우는 군사를 함양으로 진군시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시황제의 여산릉(驪山陵)을 파헤쳐 진보재화(珍寶財貨)를 약탈하고,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질렀다. 그 불은 3개월에 걸쳐 계속 타올랐다고 하며, 진도(秦都) 함양은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에 이르러 진(秦)은 시황제의 통일로부터 헤아려 3대(代),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홍문의 회입니다.>함양에 항우보다 먼저 입성한 유방은 삼장악법을 공포해 진나라의 법을 바꿨는데
늦게 입성한 항우는 이것을 보고받고 홍문에 유방을 불렀는데, 이 홍문에서의 연회는 범증의 계책이었다.
범증은 세 가지 계책을 세워 유방을 죽이려 하였다. 첫째는 유방이 함양 입성 후 한 일들을 죄묻는 것으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할 때 죽이는 것이고 둘째는 항우가 패를 들면 숨은 군사들이 나와 유방을 죽이는 것이고 셋째는 유방은 술을 잘 못하는 것을 이용해 술 취해 있을 때 실수를 저지르면 죽이는 것이 마지막 계책이다. 하지만 홍문의 연회가 했을 때 유방은 장량의 도움으로 살았고 둘째는 항우의 마음 이 변해 죽이지 못했고 셋째는 임무를 맡은 진평이 유방에게는 조금만 주고 항우에게 는 술을 많이 주어 항우가 오히려 취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범증이 항우의 사촌 항장을 불러 검무(검을 이용한 춤)를 추다 암살하려 하였으나 항백이 유방에게 도움을 주어 성공을 못 하고 위험을 느낀 장량이 번쾌를 불러 항우와 술을 같이 하게 만들어, 결국 항우가 취해 유방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초한 전쟁의 배경
항우는 진나라에 의해서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즉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침(郴)에 옮긴 후에 이를 죽인 후, 자신은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일컫고, 팽성(彭珹)에 도읍을 장하여 강소(江蘇), 안휘(安徽) 등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의 정도에 의거하여 각 지역을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다.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
초한 전쟁
그해 8월, 유방은 관중을 공격하러 나섰다. 순식간에 관중 일대를 정복하여 역양에 도읍을 정한 유방은 이듬해 3월에는 의제의 복수를 주장하고 반초 세력을 결집하여 항우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 후 약 2년여에 걸쳐 항우와 유방은 상양 부근을 끼고서 동서에 대치하여 격투를 계속했다. 그동안, 유방은 싸움이라는 싸움에서는 모두 다 항우에게 패했으나, 진평(陳平) 등의 반간계략(反間計略)을 써서 교묘하게 항우의 여러 장수들을 이반시키는 한편,한신을 제왕에 봉하여 배후에서 항우를 겨누게 했다. 또한 팽월에게 명하여 초나라의 양도를 끊게 하는 등, 서서히 항우를 괴롭혔다. 기원전 203년 8월에 일단 화의가 성립됐으나, 유방은 이를 어기고 항우를 추격하여, 그해 12월 항우는 사면초가 속에서 자살하고, 초·한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황제
열국
서초
한
제후
초한지(楚漢志), 초한연의(楚漢演義)는 중국의 역사 소설이다. 진나라 말기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기나긴 대립을 묘사하고 있다.
개요
진나라의 악정에 못견디고 각지에서 유방과 항량 외 많은 자들이 군사를 일으켰다. 항량은 진나라의 명장 장한과의 전투 중에서 전사하고, 그 뒤를 조카인 항우가 잇게 된다. 항우는 역발산기개세의 영웅으로, 그 용맹함을 누구도 따라갈수 없으며, 유방은 인덕이 넘치며, 장량, 진평 등의 모사들의 지혜로 항우에게의 죽음을 모면한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은, 항우 밑에서 말단 관리로 있던 한신에 의해 유방의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그 후에는 한신을 비롯한 많은 공신들이 반역의 죄로 죽게 된다.
내용
초한지는 기원전 200년도 쯤에 발생했던 일로 주인공은 항우와 유방이다. 초나라와 한(漢)나라의 왕 들이다. 진나라의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만들고 아방궁을 만들고 폭정을 하면서 진나라에게 망한 6국들의 후손들은 반란을 일으키려했고 그중 대표인물이 항량이다. 항량은 항우의 삼촌이며, 항량의 진영에 한신이 들어오게된다.
그리고 항우는 오추(항우의 애마), 와 우희(항우의아내)를 얻게된다. 게다가 영포라는 장수까지 얻으며 항량의 진영은 사기가 충만했는데 거기에 겹경사로 유방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항백의 진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항량은 다시 초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초나라 황실의 후손인 의제를 내세운다. 의제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가장 빨리 도착한 사람을 관중왕으로 만들고 그다음으로 온사람이 신하가 되라고 말한다.
항우는 서쪽으로 유방은 동쪽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함양으로 향했다.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길에 항우와 유방은 엄청난 인재들을 얻게된다. 항우는 범증, 장한을 유방은 장량, 관영 등의 인재를 얻는다. 결국 유방이 먼저 함양성을 점령 했으나, 유방은 당시 진나라 황제인 자영을 죽이지 않았고, 진나라의 무지막지한 법을 유방의 스타일로 변경해서 백성이 편하게 살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방이 함양에 도착해 아방궁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때 유방의 부하인 소하는 진나라에서 만들었던 지도가 매우 많이 있는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있는 지도들을 모두 가져간다. (나중에 이게 엄청난 도움이된다.)
유방이 함양에 도착했을 때 항우는 장한과 싸우다가 삼촌인 항량을 잃게되나, 결국 진나라에서 장한을 버려서 장한은 항우에게 투항한다. 항우는 어느날 투항한 진나라 병사들이 불평하는 것을 듣고 화가나서 투항한 진나라의 20만 대군을 몰살 시킨다. 그 후 항우가 함양에 도착하자 유방은 함곡관에서 문을 굳게 닫고 항우가 못들어 오게한다.
하지만 결국 유방이 항우에게 가서 사과했고 그때 항우의 모사 범증이 유방을 죽이려고 했으나 번쾌가 방해해서 결국 실패하게된다. 그 모사 후 장량이 머리를써 유방을 탈출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의 회이다. 그래서 결국 항우가 관중왕이 되고 유방은 한왕의 칭호를받고 한중땅으로 가게되는데 그곳이 나중에 유비가 촉나라를 새운 파촉 땅일것이라 추측한다.
한중땅에 도착한 후 장량이 유방에게 파초대원수(破楚大元首)가 될만한 인재를 보내준다고 하고 한왕이 온 잔도를 불태워 버린다.(그 당시 거의모든사람이 관중에서 유일하게 파촉으로 갈수 있는 길 이라고 생각했다.) 장량이 초나라를 돌아다니다 장량의 본주인 한왕 희성이 죽는 것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항우를 꼭 죽일것이라고 다짐한다.
장량이 항백의 집에 있다가 항우에게 올라가는 상소문을 먼저 보게 되는데, 만약 항우가 그 상소문에 있는 그대로 실행한다면 결국 한왕은 파촉에갇혀 다시는 못나오게 되는 것이였다. 장량은 항백에게 누가 그 상소문을 올렸냐고 물어본결과 항백은 집극랑 한신이 올렸다고 했다.(집극랑은 일반병사 직위임)
장량은 얼마후 항백의 집에서 나와 분장을하고 함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는데, 그 노래가 "사람 사람 무슨 사람 담장 밖에 키 큰사람 딸랑 딸랑 방울소리 그 사람은 안보이네 부귀부귀 높은 부귀 이뤘으면 고향가지 고향에 아니가면 비단옷 입고 밤길가기" 장량은 그노래를 들려주고 아이들에게 누가 그 노래를 가르쳐 줬냐고 물어보면 꿈에서 한 노인이 가르쳐 줬다고 말하라고 한다.
그노래를 들은 항우는 결국 수도를 자신의 고양인 팽성으로 옮길려하고 그때 간의대부 한생이 항우가 고집을 피우면서 팽성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한생이 초인은 목후이관(楚人沐猴而冠)이라고 말한다. 그 말의 뜻은 원숭이가 관을 쓰고 있다는 뜻인데, 그 당시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들을 비꼬는 뜻이였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한생을 죽이는데, 한신은 항우가 인재를 그냥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을 보고 항우에게서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때 장량이 한신의 집에 찾아와 한신을 설득하고 결국 한신은 한왕에게 가게된다. 그리고 장량이 한신에게 자기자신이 대원수로 추천한 사람이라는 증표를 준다.
또한, 항우는 의제에게 수도를 침주로 옮기라고 하는데 범증이 그 상소문을 먼저 보게되고 의제에게가 침주로 갈것을 설득하지만 의제는 범증을 꾸짖는다. 항우가 그 소리를 듣고 화가나서 영포에게 의제를 죽이게 한다. 영포는 의제를 죽였으나 이사건이 여러모로 항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한신은 결국 한왕에게 가서 맨처음에 자신의 능력으로 보여줬으나, 한왕은 만약 한신이 대원수가되고 이후 장량이 추천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겠냐고 한신에게 물어보자 한신은 장량에게서 받은 증표를 보여준다. 이에 한신이 대원수가 되었다. 번쾌는 자신이 대원수가 될 줄 알고 좋아했다가 한신이 대원수가 되는 것을 보고는 한왕의 행차를 막는다. 한신은 번쾌가 한왕의 행차를 막는 것을 보고 감옥에 가두게 한다.
이에 한신의 대원수 취임식이 무사히 이루어진다. 한왕은 번쾌를 국법으로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하는 한신을 설득하여 석방하게 하고 대원수가 된 한신은 군대의 기강을 더욱더 강하게하여 한나라 군대를 최강의 정예로 만들어 관중으로 향한다.
한나라가 관중으로 나가는 길은 삼진이 막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장한이 있었다. 하지만 한신은 무섭게 몰아붙여 항우가 9번 싸워서 겨우 잡은 장한을 몇번 싸우지도 않고 자살하게 만든다. 그리고 얼마 안돼 삼진을 점령하고 함양성 까지 함락한다. 또한 장량이 하남왕 신양과 위왕 위표를 한왕의 신하로 만든다.
이에 한왕은 이제 대세가 자기에게 기울었음을 알고 60만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가서 팽성까지 빼앗았지만 가장 중요한 인질인 우희를 그냥 놔주는 바람에 항우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 결국 3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팽성으로 쳐들어간다. 그때 한신은 대원수직을 그만두고 함양에 있었다. 항우가 팽성 근처까지오자 한왕은 위표를 대원수로 해서 항우와 싸웠지만 거의 모든 군사들이 전멸당한다. 제나라는 결국 항우에게 항복을 하고, 장량과 소하는 한신을 겨우겨우 설득해 다시 대원수가 된다.
결국 한신은 항우의 30만 대군중 20만을 죽이고 대나라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를 함락시킨다. 또한 사방에서 초나라를 압박할 작전을 세우게된다. 한신은 제나라 까지 진격하는데, 그 사이 항우는 유방이 있는 곳까지 쳐들어가게 되면서 죽을 뻔한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항우는 한왕의 반간계에 당해 자신의 모사인 범증을 잃게된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항우의 오른팔 영포가 한왕에게 투항해 대세가 점점 기울게되고 한신이 제나라까지 다 점령하게된다. 항우는 결국 광무산으로 들어가서 전열을 정비한다.
한신은 120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30만대군과 격돌하여 최종적으로 한신은 100 만, 항우는 28명만 남게된다. (그 과정중에 생긴말이 사면초가다.) 한신이 초나라 진영에 초나라 노래를 불러 항우가 벌써 초나라가 점령당핬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전쟁에서 지게 만든다. 또한 우희는 항우가 싸움터에 나가기 전 자결을 하게되는데 여기서 유래된게 패왕별희이다.
항우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온 사람에게 오추를 주고 28명의 병사만 보내고, 오강에서 자살한다. 한신은 한왕의 아내인 여태후의 계략에 의해서 죽고 영포와 팽월도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해서 초한지는 끝이나고 결과적으로 한왕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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