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永嘉之亂)
중국 서진 말기에, 이민족에 의해 일어난 반란을 가리키는 말이다. 회제(懐帝)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때 일어났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혜제(恵帝)의 치세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 이후, 고대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화북(華北)지역은 혼란상태에 빠져, 다수의 유민(流氓)이라 불리는 피난민이 각지을 유랑하고 있었고, 예전 한나라시대 이후 중원에 침입하여 한민족과 함께 살고 있었던 새외민족도, 활약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이주했던 흉노의 족장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현재 산서성 이석현(山西省 離石縣)을 본거지로 삼고,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앉았다. 또한 한나라때 내려진 유씨 성에 의거해 한왕(漢王)을 칭했다. (이 나라는 후에 조(趙)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산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한족 유랑민의 우두머리였던 왕미를 휘하에 흡수해, 하북성과 산동성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팔왕의 난 후, 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회제와의 관계에 잡음이 와 동해왕이 분사(憤死)하자 일거에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311년 석륵군에 의해 진나라군이 대패하여 장병 10여만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낙양에 대군을 보내 함락시키고, 회제를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현재 산서성 임분현 山西省 臨汾縣)으로 연행했다.
회제의 사후 장안에서 민제가 옹립되었으나, 이미 실질적인 서진 왕조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제도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얼마 안 가 살해되었다. 화북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영가의 난이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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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과 대기근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한창이던 때, 산서 지역의 흉노족 유연이 한을 세운다. 유연은 흉노의 재기를 꾀하며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뒤 병사했고, 이어서 아들 유총이 낙양을 공략한다. 낙양성 함락에 성공한 유요와 석륵 등이 왕공과 백관, 백성 3만여 명을 죽이고 회제를 평양으로 압송해 살해하자 이는 서진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한왕 유충은 이민족 최초로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되었으며, 오호십육국 시대 개막을 알렸다.
목차
펼치기중원에서 서진의 사마씨 황족들이 골육상쟁을 벌여 정권을 위태롭게 하고 민생을 파탄 내고 있을 즈음, 화북(華北) 지역 이민족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빈궁을 견디지 못한 화북 농경민들이 강남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화북 지역 이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다.
당시 화북 지역에는 북방 이민족들의 이주가 꽤 이루어진 상태였다. 남흉노가 이미 후한 시대부터 반독립 상태로 분산 이주한 상태였고, 오환(烏桓), 선비(鮮卑), 강(羌), 저(氐) 등이 분산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 화북 이민족 대부분은 지방 호족들에 의지한 채 행상, 전객, 노예 등으로 비참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일부는 족장이나 장의 통솔 아래에 병력으로써 활동했으며, 팔왕의 난 때에 용병들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팔왕의 난이 종결될 즈음 이들은 드디어 각각 독립된 세력을 확립했다.
304년, 팔왕의 난과 대기근을 겪으며 유민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반란이 한창이던 시기, 산서 지역의 흉노족 유연(劉淵)이 대선우를 자칭하며 한(漢)을 세웠다. 유연은 후한 시대 말 무렵 남하한 흉노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 표(豹)는 조조의 흉노 정책에 따라 다섯 개로 나누어진 흉노족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좌부(左部)의 족장이었다. 유연의 본래 성은 모돈(冒頓), 이름은 원해(元海)였는데, 후에 유연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 학자 최유(崔游)에게 교육받았으며, 《춘추좌씨전》과 손오병법을 좋아하고 《시경》, 《역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하여 그는 서진 혜제에게 흉노오부대도독으로 임명되어 건위장군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팔왕의 난 때에는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진영에서 보국장군이 되어 활약했다. 그러나 유연은 역시 흉노족이었다. 그는 서진이 극도로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을 때야말로 흉노족이 재기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흉노의 원로격인 우현왕 유선(劉宣)의 제안에 따라 귀환을 결심했다. 처음에 그는 성도왕 사마영에게 흉노 장례식을 핑계로 귀환하고자 했으나 좌절된 후, 병력 확보를 이유로 들어 흉노의 본거지인 좌국성(左國城)으로 돌아갔다. 한왕이 된 그는 원희(元熙)를 연호로 하고 평양(平陽)을 도읍으로 삼았다.
유연은 상당, 태원, 하동, 평원 등의 군을 함락시켜 세력을 확장한 뒤, 308년에는 드디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영봉(永鳳)으로 개원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유연은 병력을 모아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했다. 비록 서진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왕조였으나 백성의 신망을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어서 서진은 유연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유연은 낙양을 두 차례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310년, 결국 유연은 낙양성 함락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유연의 뒤를 이어 장남 유화(劉和)가 제위에 올랐으나, 동생 유총(劉聰)의 능력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유총에게 살해되었다.
311년, 유총은 낙양 공격을 재개하고, 먼저 하남 지역을 모두 점령하여 낙양을 포위하고자 했다. 그는 유요(劉曜), 흉노족의 호연안(呼延晏), 갈족의 석륵(石勒), 한인(漢人) 왕미(王彌) 등을 대장으로 한 4군을 파견해 낙양을 공략했다.
이에 서진은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전국에 격문을 보내 병력을 모집했다. 당시 서진은 혜제가 죽고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옹립된 회제(懷帝)가 연호를 영가(永嘉)로 바꾸어 쇄신을 꾀하던 때였지만, 모집된 병력은 겨우 4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동해왕 사마월은 낙양을 방어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석륵을 토벌한다며 군을 이끌고 낙양을 떠났다. 도중에 동해왕 사마월이 병사하고 태위 왕연(王衍)이 군대의 총책임자가 되었으나, 그 역시 낙양을 버리고 떠날 생각뿐이었다. 그리하여 왕연은 회제를 낙양에 남겨둔 채 동해왕 사마월의 운구를 호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동해로 향했다. 이때 왕연의 무리를 뒤따르는 수가 10만을 넘었는데, 여기에는 군대뿐만 아니라 황족, 귀족, 명문가의 자제 그리고 수많은 유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만 무리의 이동은 더딜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왕연은 금세 석륵에게 따라잡혀 살해되었다.
311년 6월, 낙양성이 함락되었다. 낙양성에 입성한 유요와 석륵 등은 왕공과 백관, 백성 3만여 명을 죽이고, 궁 안에 불을 지르고, 보물과 재물을 약탈했다. 또한 회제를 생포하여 평양으로 압송해 그곳에서 살해했다. 회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사마업(司馬鄴)이 장안에서 황제로 추대되어 민제(愍帝)로 등극했으나, 316년에 유요에게 장안을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했다.
서진은 사실상 회제의 죽음으로 멸망했으며, 이는 건국 52년 만의 일이다. 이것이 '영가의 난'이다. 한왕 유충은 이민족 최초로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되었으며,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로써 전통적으로 한족이 지배하던 화북 지역은 한족을 포함하여 5호 즉 흉노, 선비, 저, 갈(羯), 강족 등의 이민족이 통치하게 되었다. 이들은 약 130년간 한(전조), 성한, 전량, 후조, 전연, 전진, 후진, 후연, 서진, 후량, 남량, 남연, 서량, 하, 북연, 북량 등 18개의 나라를 건설했다. 당시 화북 지역에는 실제로 18개의 나라가 건설되었지만, 이 시대에 16국이란 칭호가 생긴 것은 최홍(崔鴻)의 저작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이름을 빌려왔기 때문이다.
5호의 나라들은 짧게는 약 10여 년, 길게는 약 100여 년간 존재하며, 분열과 통일의 과정을 거듭했다. 329년에 갈족 석륵의 후조가 이룩한 화북 지역의 통일은 351년 후조의 붕괴로 다시 분열되었고, 이후 선비족 모용황(慕容皝)의 전연과 저족 부건(苻健)의 전진이 할거했다. 370년에는 전진의 3대 왕 부견(苻堅)이 전연을 멸망시킴으로써 화북 지역은 다시 통일되어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전진이 강남 동진과의 전투에서 패해 멸망하자 화북 지역의 분열은 더 심각해졌다. 이러한 화북 지역의 분열은 선비족 탁발부(拓跋部)의 북위가 출현하여 화북 지역을 평정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 이후 출현한 중장기병상
오호십육국 시대의 나라들은 건국과 멸망의 속도가 빨랐으며, 그에 따른 혼란도 극심했다. 여기에는 5호 제국들의 구조에 그 이유가 있었다. 첫째, 5호 제국은 부족제를 유지하면서 다수의 한족을 통치했으며, 자기 민족과 한족을 구분하여 각각의 통치 기구를 두었다. 이는 민족 융합의 흐름에 위반되는 일이었으며, 지배자 5호 제국은 어떻게 융합을 조화롭게 이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둘째, 5호 제국의 군대는 부족의 전통에 따라 종실에 분배되었고, 종실의 여러 왕이 군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군사 봉건제 체제는 나라를 세울 때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나, 지배권이 안정된 상태에서는 반란의 씨앗이 되곤 했다. 셋째, 5호 제국은 뚜렷한 왕위 계승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고, 황제 사후 황위 계승 분쟁을 일으켜 스스로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오호십육국 시대의 지배자가 5호였기 때문에 시대 분위기가 야만적이고 무질서했다는 평가는 성급한 판단이다. 이 시대에는 이민족과 한족의 대립과 함께 융합에 대한 노력과 시도도 동시에 존재했다. 이는 5호 제국의 공묘(孔廟), 태학 설립, 농업 권장, 장성 축조 등으로 알 수 있다. 또한 5호 제국은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나라에 멸망당한 사마씨의 서진은 남하하여 동진(東晉)을 세우고 남조(南朝)를 열었다. 그러나 강남에는 이미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피란 온 사마씨 황족과 권문세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낭야왕 사마예(司馬睿) 역시 내분을 피해 강남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317년, 서진의 민제가 죽자 왕(王)씨와 사(謝)씨 등 강남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사마예가 건업(建業)에서 동진을 건국했다. 이로써 당시 중국에서는 오호십육국의 북조와 동진의 남조가 대치했다.
ㆍ 304년 : 팔왕의 흉노족 유연이 한을 세우다.
ㆍ 311년 : 유총이 4군을 파견해 낙양 공격을 재개하다.
ㆍ 316년 : 회제가 유요에게 죽임당하고, 서진이 건국 52년 만에 멸망하다
*출처: 정보-책 53쪽/ 자료 수집-별도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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