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중국 >

<서진 몰락의 시작>팔왕의 난(八王-亂, 291년 ~ 306년)

Bawoo 2015. 10. 12. 21:51

 

 

팔왕의 난(八王-亂, 291년 ~ 306년)

 

 

개요

중국 서진 황족들간의 권력투쟁(통상적인 반란이 아님)의 혼란기로, 8왕(八王)이란 관련된 주요 황족이 8명인데서 유래한다. 서진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오랜 혼란의 결과 통치기반이 급속히 약화되어 흉노족 침입(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멸망하였다.

이후 살아남은 황족 사마예가 강남에서 피신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켰지만 과거 서진이 차지한 화북영토는 되찾지 못하였다. 화북지방에는 흉노족 등이 세운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250년 이상 전란의 시대를 겪게 된다.

관련된 8명의 왕은 다음과 같다.(관계는 서진 무제 사마염 기준으로 서술)

  •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무제 사마염의 숙부, 선제 사마의의 5남)
  •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의 5남.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무제의 숙부, 사마의의 9남
  •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무제의 조카, 무제의 동생인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6남.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6남.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무제 사마염의 6촌, 사마의의 동생인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무제 사마염의 6촌,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규의 손자,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배경

서진 1대 황제 무제(武帝)는 건국 후 황족의 권위와 국가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통치 강화를 위해 아들, 조카 등 황족을 왕(王)으로 임명하여 군대와 조세권 등을 주고 해당 지방을 통치토록 했다.(왕 지위의 세습도 허용). 그러나 무제 사후 중앙정부 권한(皇權)이 약화되면서 지방 번왕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간섭하는 도전 세력이 되어 정치혼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2대 황제 |혜제]](惠帝, 사마충)는 암우(暗愚)한 제왕으로 무제 사후 즉위하자마자 계모인 황태후 양씨(무제의 황후)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녀의 친정인 양준(楊駿) 일가에게 대부분의 권력이 주어졌다. 이에 정치적 야심이 있는 황후 가씨(賈氏, 가남풍)는 실권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사실 무제는 황태자 사마충(미래 혜제)의 무능함에 실망해 황태자를 제왕 사마경으로 바꿀 것을 고려했었는 데 이를 미리 알아챈 신하 가충(혜제의 장인)이 무제에게 황태자에 대한 능력을 테스트해 보도록 권유하고 미리 답을 황태자에게 알려줘 무제의 의심에서 벗어나 황태자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가씨 집안이 혜제에게 기여한 바가 컸다고 볼수있으나, 권력에서 배제됨에 따라 양씨 일족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여남왕 사마량

황후 가씨는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를 회유하여 도움을 청하니, 초왕(楚王) 사마위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낙양)에 쳐들어왔고,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양준을 반역죄로 몰아 양준과 그 일족(약 3,000명)을 죽였다(태후 양씨는 황궁에 유폐되어 굶어 죽음).

사후 권력은 연장자인 여남왕 사마량에게 맡겨졌으며, 황후 가씨는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에 가씨는 당시 친위대장인 초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황제의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반역죄로 몰아 공격했고(사실 양준 제거의 공이 큰 사마위는 중앙정부 진출을 희망했으나, 사마량이 그를 지방으로 철군토록 압력하고 있어서 서로간의 이해가 일치함), 군사 기반이 취약해 궁지에 몰린 사마량은 자살을 하게된다.

초왕 사마위

사마량 제거 후 권력 장악기회를 잡은 사마위가 주저하던 이틀동안 황후 가씨는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되는 사마위를 제거하기 위해 사마위가 단독으로 황제의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트려서 정치적 입지를 무너뜨리고 결국 체포,처형되도록 했다.

이후 정적이 없어진 가씨는 가충 등 그녀의 일족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였다.

조왕 사마윤

혜제는 황후 가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고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이 있었다. 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 노점을 궁궐에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가씨에 의해 모반 누명을 쓰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300년 결국 가씨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조왕 사마륜(혜제의 대숙부, 사마량의 동생)은 제왕 사마경(혜제의 종제(從弟))과 공모하여 칙서를 위조해 군사를 일으켜 황태자 살해 죄를 물어 가씨와 그의 일족을 처형하였고 301년 사마륜은 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사마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마경은 장사왕 사마애, 성도왕 사마영(이상 혜제의 동생) 및 하간왕 사마옹(사마충의 조부 사마의의 조카 아들)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켜 사마륜을 죽였다.

제왕 사마경

혜제 복위 후 정치실권을 장악한 사마경은 함께 궐기한 동지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였고 실제로 황태자도 독단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사마애, 사마영, 사마옹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사마경을 살해했다.

장사왕 사마애

사마경 사후 국정 운영권을 놓고 사마애 등 3인간 다툼이 벌여져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서 사마애는 사마영과 사마옹에게 공격당해 죽고 말았다.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

이제 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서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마영은 사마옹의 부하 장방(張方)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동해왕 사마월

서서히 사마영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전횡하려고 하자 이에 대해 동해왕 사마월과 혜제의 막내동생 예장왕(預章王) 사마치(司馬熾)가 반기를 들었다. 한때 사마영에게 패했던 그였으나 흉노와 선비등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번엔 사마영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후 낙양을 수호하던 장방과 사마옹을 공격하여 강화를 원했던 사마옹을 체포하였다. 기어코 사마영과 사마옹을 살해한 사마월은 306년에 죽은 혜제의 뒤를 이어 사마치를 회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 가씨에 의해 양씨 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팔왕의 난 이후

팔왕의 난 때 각 왕들은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들은 서진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전투로 인해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국가체제가 크게 약화되고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

304년 흉노족 족장 [[유총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영가의 난)하여 민제를 죽임으로서 서진은 멸망하고 유총이 (전조)를 세움)]을 시발로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화북지방은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거대한 전장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이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

사마염은 황족 종친을 우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를 사마씨 일족에게 분봉했으나 분권화를 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마염 사후 사마충이 제위를 잇자 정치는 외척 양씨 일족의 차지가 되고, 가황후가 사마위와 협력해 양씨를 처치하고 사마량에게 정권을 맡긴다. 하지만 정권이 의도대로 운영되지 않자 가황후는 사마량과 사마위를 죽인 뒤 정권을 독차지한다. 가황후가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독살하는 전횡을 일삼자 사마륜과 사마경은 가황후를 척결한다. 이후 16년간 골육상잔의 비극이 계속되었다.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司馬炎)은 위나라의 멸망이 황권 강화를 위해 지나치게 황족 종친들을 억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황족 종친을 우대할 목적으로 총 27명에 이르는 사마씨 일족 모두를 군과 현 단위의 왕으로 봉했다. 영토에 비해 분봉할 왕이 많았기 때문에 봉토의 규모는 작았으나, 이들에게 호구와 일정 수의 군대를 함께 나누어 줌으로써 우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제후왕들은 호구에 따라 하사받은 군사의 수가 달랐는데, 호구가 2만 호일 경우에는 군사 5천 명, 호구가 1만 호일 경우에는 군사 3천 명, 호구가 5천일 경우에는 군사 1,500명을 받았다. 또한 사마염은 성씨가 다른 공신들에게도 작위, 봉토, 군대를 하사했다. 이것으로 사마염은 제후국들이 황실을 보호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상은 분권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사마염 사후 백치 사마충(司馬衷)이 제위를 이으면서 제후국들은 골육상잔의 비극인 '팔왕의 난'을 일으켰고, 제후국은 황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290년, 사마충이 혜제(惠帝, 재위 290~306)로 즉위했지만, 그는 매우 아둔한 인물이었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있다는 말에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거나 두꺼비 울음소리를 듣고 조정을 위해 우는지 개인을 위해 우는지 물은 후, 궁중의 두꺼비는 조정을 위해 울고 논밭의 두꺼비는 개인을 위해 운다는 신하의 대답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사마충의 인물이 모자람을 알고 조정에서는 그의 태자 자리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그러자 사마염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문제를 밀봉하여 낸 후 그것에 태자가 답하도록 했다. 이때 사마충의 부인 가남풍(賈南風)이 미리 문제를 알아내 다른 사람을 통해 답을 얻고 사마충에게 연습시켜 모사하도록 했다. 사마염이 태자 사마충의 답을 보니 최소한 동문서답은 아니었던지라, 그는 사마충의 태자 자리를 유지시켰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마충이 황제가 되니 자연스럽게 외척이 발호하여 정권은 사마염의 황후 양태후(楊太后)와 그녀의 아버지 양준(楊駿)에게 돌아갔다.

외척 양준이 정권을 장악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생겼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황후 가남풍은 야심이 많은 여성으로 외모는 출중하지 않았으나, 일찍이 사마충의 태자 자리를 지켜 낼 정도로 권모술수에 능했다. 그녀는 우선 외척 양준을 제거하기 위해 황족 원로인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사마량은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이내 허창으로 떠나 버렸다.

 

이에 가황후는 젊은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에게 밀서를 보내 군대를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초왕 사마위가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도착하자, 가황후는 양준에게 모반죄를 적용해 그와 그의 일당 몇천 명을 죽였다. 이후 가황후는 사마량과 노신 위관(衛瓘)에게 정무 보좌를 맡겼다. 그러나 사마량이 정권을 독차지하자 가황후와 사마위에게는 각각 불만이 쌓였다. 가황후는 자신이 정권을 잡고자 했으며, 사마위는 외척 양준을 몰아내는 데 군사를 일으킨 자신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했다. 먼저 손을 쓴 것은 가황후였다. 그녀는 사마위의 불만을 알아차리고 혜제의 밀명을 빙자해 사마위에게 사마량과 위관을 체포하여 죽이도록 했다. 결국 사마량은 사마위에게 살해되었다.

 

다음으로 가황후는 사마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불과 스물한 살 남짓한데다 대규모 군대까지 가진 사마위가 정권 쟁취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혜제의 거짓 조서에 사마량과 위관을 죽인 죄를 물어 사마위를 사형에 처했다. 사마위는 비로소 가황후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았으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로써 가황후는 정권을 독차지했다.

 

가황후의 천하가 10여 년간 지속되었을 즈음 태자 사마휼(司馬遹)이 가황후의 근심거리로 등장했다. 가황후는 자신의 소생이 아닌 태자 사마휼이 영특하여 그가 장성한 후에는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녀는 태자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독살한 뒤 자신의 양자를 새롭게 태자로 삼았다. 이처럼 가황후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서진의 사마씨 일족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에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과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이 가황후를 척결했다.

 

가황후의 죽음으로 서진 조정은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이후 혈육 간의 죽고 죽이는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황후를 죽인 사마륜은 301년에 혜제를 태상황으로 몰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러한 소식이 각 제후국에게 전해지자 사마경은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과 연합하여 사마륜을 죽이고 혜제를 복위시켰다. 그리고 혜제를 보좌할 사마경만 낙양에 남고 다른 제후왕들은 봉토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마경 역시 최고 권력의 맛을 알고 주색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자, 이는 다시 사마애, 사마영, 사마옹이 군사를 일으킬 구실이 되었다. 사마경이 이들의 손에 죽임당한 후 정권을 잡은 사람은 사마애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마영과 사마옹이 연합해 사마애를 공격했으며, 이때 사마애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결국 사마영은 승상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또한 마침 혜제가 공석이었던 황후 자리에 양씨를 봉하면서 황태자까지 책봉하려 하자, 사마영은 스스로 황태제(皇太弟) 자리에 올라 황위를 예약했다.

 

그러나 사마씨 일족의 골육상잔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마영이 황태제가 된 것에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불만을 품은 것이다. 사마월은 군사를 일으켜 사마영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영이 혜제를 데리고 사마옹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렇게 세력이 약해진 사마영을 대신해 사마옹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그러자 사마월은 2차로 군사를 일으켜 사마영과 사마옹을 차례대로 죽였다. 306년, 혜제가 사망하자 사마월은 혜제의 동생 사마치(司馬熾)를 회제(懷帝, 재위 306~312)로 옹립했다. 이로써 무려 16년간 지속된 혈육 간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여덟 명의 제후왕들은 오로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며, 팔왕의 난으로 희생된 제후왕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또한 혜제 때의 연호는 무려 열 번이나 바뀌었다.

이처럼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지 불과 30년도 채 안되어 벌어진 황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내란으로 백성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수십만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생산 활동이 마비되었고,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치수 시설은 방치되어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었다. 결국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남으로 이주하는 유민들이 대거 발생했다. 또한 제후왕들이 각각 우위를 점하기 위해 흉노, 오환, 갈, 선비 등의 이민족들을 앞다투어 용병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서진의 자멸을 초래하기도 했다.

ㆍ 290년 : 사마충이 혜제로 즉위하다.
ㆍ 301년 : 사마륜이 혜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다.
ㆍ 306년 : 사마월이 혜제의 동생 사마치를 회제로 옹립하면서 16년간 지속된 혈육 간의 전쟁이 끝나다.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출처 : 정보-책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53쪽/ 수집-한국어 위키백과,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