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모호치( 明眸皓齒 , 明眸皓齿 , míng móu hào chǐ )
뜻
밝은 눈동자와 흰 이. 미인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전략)
맑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피땀으로 얼룩진 떠도는 영혼 돌아오지 못하네
맑은 위수(渭水)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劍閣)은 깊은데
그대 가고 나는 머물러 서로 소식조차 없네
인생살이 정이 있으니 눈물은 가슴을 적시고
강가의 풀과 꽃은 여전히 옛 풍광이네
저물녘 오랑캐 말들 일으키는 먼지 성안에 자욱한데
성 남쪽을 가려고 성의 북쪽을 바라본다
明眸皓齒今何在
血汗遊魂歸不得
淸渭東流劍閣深
去住彼此無消息
人生有情淚霑臆
江草江花豈終極
黃昏胡騎塵滿城
欲往城南望城北
- 두보(杜甫) 〈애강두(哀江頭)〉
당나라 현종(玄宗) 말년, 현종은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고 양국충(楊國忠)에게 정사를 일임했다. 양국충이 정권을 농단하면서 나라 전체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하동(河東) · 범양(范陽) 절도사를 겸하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 타도를 외치며 난을 일으켰다. 낙양이 반란군에게 함락되고, 수도 장안마저 함락 위기에 처하게 되자 72세의 현종은 양귀비와 황족, 그리고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무장한 천여 명의 친위군이 이들을 호위했다.
다음 날, 장안에서 백수십 리 떨어진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현종 일행을 수행하던 친위군 장병들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친 나머지 지금까지 참아 왔던 불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모두 재상 양국충의 잘못이라고 성토하며, 양국충을 잡아 목을 베고 현종의 거처를 포위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양귀비의 주벌을 요구했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것을 명령했다. 현종은 태자 이형(李亨)에게 양위하고 성도(成都)로 피신했다. 태자 이형이 영무(靈武)에서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이가 바로 숙종(肅宗)이다.
당시 43세의 늦은 나이로 주조참군(冑曹參軍)이란 미관말직에 올라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꾸려 가던 두보는 난을 피해 장안에서 탈주하여 여기저기 피난을 다니고 있었는데, 숙종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숙종을 배알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도중에 반군의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벼슬이 높지 않았고, 남달리 겉늙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허약한 노인으로 여겨져 두보는 별 고충을 겪지 않고 장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머물 수가 있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참조)
두보는 이때 장안의 동남쪽에 있는 곡강(曲江)을 찾아가 옛 영화를 그리며 슬픔에 젖어 〈애강두〉를 지었다. 이곳은 당시의 왕후장상들이 자주 찾던 명승지였고, 현종도 여기서 양귀비와 즐거운 때를 보낸 적이 있었다. 곡강은 큰 연못으로 곡강지(曲江池)라고도 하는데, 당현종 때에 본격적으로 유람지로 개발되었다. 두보가 이 시에서 쓴 ‘명모호치’는 양귀비의 미모를 표현한 말이다.
용례
미인 대회에 출전한 사람들은 모두 ‘명모호치’를 자랑하는 미녀들이다. 그걸 보면 ‘명모호치’야말로 미인의 기본 조건인 것 같다.
〖역사 · 문화 자료─양귀비와 안녹산의 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시대 중의 하나는 당나라 때였고, 당나라 시대의 최고 전성기는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개원(開元) 연간과 천보(天寶) 연간의 초기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인구는 900만 호 5,300만 명에 달했으며, 수도 장안에는 아시아 각국은 물론 멀리 페르시아, 사라센 등지에서 온 외교 사절과 상인들로 북적댔다. 훌륭한 정치는 경제 발전을 가져오고, 발전된 경제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 법. 이 개원 연간을 중심으로 하여 당대의 문화 역시 극성기에 오른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개원 연간을 정점으로 하여 천보 연간에 당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물론 구조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겠지만, 이 혼란과 쇠퇴의 중심에는 현종이 극진히 총애했던 양귀비(楊貴妃)라는 여인이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성취하고 나면 긴장이 풀리게 되고, 어느 순간 몸도 마음도 지쳤다고 느껴지면서 어딘가로 멀리 떠나 푹 쉬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법. 어느 날인가 현종이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한 말을 보면 그가 많이 지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평한 세상이로다. 국정은 이임보(李林甫)에게 맡기고 짐은 좀 쉴까 생각하는데······.” 25세의 젊은 나이에 쿠데타를 성공시켜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로부터 시작되어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의 황비인 위황후(韋皇后)에 이르기까지 무려 반세기에 걸친 여인천하를 종식시키고, 권좌를 이(李)씨의 손으로 되찾아 온 공로로 황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다시 양위를 통해 제위에 오른 후, 정적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 정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선정을 펴 국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아온 현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소회가 남달랐으리라. 더군다나 뒷짐을 지고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아니던가.
현종 당시의 조정에는 과거(진사과(進士科))를 통해 등용된 관료와, 문벌에 의해 등용된 관료들 사이에 파벌 싸움이 한창이었다. 이 파벌 싸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과거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과거는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로 구분되었다. 명경과는 유가 경전을, 진사과는 시문(詩文)을 주요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인쇄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유가 경전을 소장하고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명문 세가의 자손들이었다. 자연 문벌이 좋은 사람들이 명경과를 통해 관직에 들어섰고, 이들 명문 세가의 자손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문벌에 의해 등용된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의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특정 서적을 외워 시험을 보는 명경과와 달리, 시문을 과목으로 하는 진사과는 특정 지식보다는 천부적인 재능을 요구하는 면이 강했다. 하여 문벌이 낮은 빈한한 집안의 자제들도 능력만 있으면 진사과를 통해 출사를 할 수가 있었으니, 진사과야말로 진정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처음에는 명경과 출신들이 대우를 받았으나,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했던 측천무후 때에 이르러 진사과 출신들이 더 대우를 받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양대 파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당시 진사과 관료의 주요 인물은 장열(張說) · 장구령(張九齡)이었고, 문벌파의 주요 인물은 이임보였다. 이임보는 증조부가 당고조 이연의 사촌이었으므로 황족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런 배경을 이용하여 진사파의 대표적 인물인 장구령을 실각시키고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전형적인 ‘구밀복검’형의 간신이자 권신으로,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쥐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죽였다.(▶ 구밀복검(口蜜腹劍) 참조) 모두들 이임보를 두려워하여 그의 의견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황태자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현종은 이임보를 신임했다. 길고 다양한 치세 뒤의 피로와 노화를 숨길 수 없게 된 지친 황제에게 복잡다단한 신하들의 세계를 한 손아귀에 장악할 수 있는 권신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큰 위협이 되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큰 힘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 한 사람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이 있기만 하다면 황제는 그런 신하에게 전권을 일임하고 자신은 안식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이임보는 유가 사상에 근거하여 상권(相權,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여 황권(皇權, 황제의 권한)과 자주 갈등을 심화시키던 전임 재상들과는 달리 현종의 말을 잘 듣고 충성을 다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던가! 하여, 전임 재상들의 임기가 보통 3, 4년이었던 반면 이임보는 무려 19년 동안이나 중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736년 사랑하는 무혜비(武惠妃)를 잃고, 그 길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조정의 실권은 이임보의 손에서 좌우되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000여 명이나 있었지만 현종의 마음을 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럴 즈음에 현종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종은 수왕비(壽王妃)가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했다. 수왕비는 미모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음악과 무용 등 예능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그녀는 현종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 수왕비가 바로 훗날 절정기의 막강한 당 제국을 일거에 혼란 속에 몰아넣은 장본인 양귀비다. 그녀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으로,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열여덟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현종에게는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와 22세 며느리의 세기적인 사랑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 불길의 끝이 어디인지 모른 채······.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여도사로 삼아 남궁에서 살게 하고, 그녀에게 태진(太眞)이란 호를 내리고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귀비는 황후 다음의 지위였으나 당시에 황후가 없었으므로 양귀비가 사실상의 황후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원래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의 육촌 오빠 양쇠(楊釗)는 품행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 있는 행동으로 현종의 신임을 받아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가 바로 안녹산에게 반란의 명분을 제공한 양국충이다.
현종이 얼마나 양귀비를 사랑했는가에 대해서는 중당 시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쓴 〈장한가(長恨歌)〉의 일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자.
봄 밤 짧다 하고 해 중천에 걸리면 일어나니
황제는 이로부터 조회조차 걸렀다지
총애를 입어 잔치 자리 모시니 한가한 틈 없어
봄에는 봄놀이에 따라가고 밤에는 잠자리를 독차지
후궁엔 빼어난 미인 삼 천이나 있지만
삼 천 명에 내릴 사랑 한 몸에 다 받아
화려한 집에서 단장하고 요염한 모습으로 밤 시중들고
아름다운 누각 잔치 끝나면 춘정에 취하지
형제자매 모두 작위에 봉해지고
가문에 광채 나니 부럽기도 하지
하여, 천하의 부모들 마음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되었다네
春宵苦短日高起 從此郡王不早朝
承歡侍宴無閑暇 春從春遊夜專夜
後宮佳麗三千人 三千寵愛在一身
金屋粧成嬌侍夜 玉樓宴罷醉和春
兄弟姉妹皆列士 可憐光彩生門戶
遂令天下父母心 不重生男重生女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불타올랐던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너무나도 참담하고 허망했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정사를 등한히 하자 조정에서는 간신들이 정사를 농락하고 정치는 부패 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져 세입원이 줄어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져 군대를 모집해도 응모하는 자가 없어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가고 있었다.(부병제란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세습 병역의무를 지닌 군인 가문이나 일반 가문에서 선택적으로 병력을 뽑는 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병을 보내는 집안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속했다.) 게다가 변경의 병마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던 절도사들이 점차로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서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들에 의한 반란의 씨앗들이 도처에서 싹트기 시작했다.(당(唐)나라 초기에 중요한 각 주에 도독부(都督府)를, 예종(睿宗) 때는 절도대사(節度大使)를, 현종(玄宗) 때는 십(十)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했는데, 이를 통털어 ‘번진’이라고 칭한다. 각 번진은 한 지역의 군정(軍政, 병권(兵權))을 장악했는데,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힘이 쇠약해지자 번진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민정(民政)과 재정(財政)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었고 특정 지방에 할거하면서 중앙의 조정과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일러 ‘번진할거(藩鎭割據)’라고 한다.)
무려 330근의 거구였던 절도사 안녹산은 익살스럽고 털털하며 모나지 않고 수수한 성격으로 손쉽게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안녹산은 비록 변방을 지키는 일개 절도사에 불과했지만, 범양(范陽), 평로(平盧) 등 하북과 동북의 병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황하 이북을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일찍부터 야망을 가지고 있던 안녹산은 호시탐탐 반란의 기회를 노리며, 중앙 정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중앙에 출입했다.
당시 28, 29세 정도의 양귀비는 43, 44세 정도의 안녹산을 마음에 들어하여 수양아들로 받아들였고, 자주 그와 가까이했다. 이들 사이의 추문이 널리 퍼졌지만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안녹산을 신임했으며, 오히려 하동(河東) 절도사를 겸하게 했다. 당시에는 수양아들을 두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권위와 세력을 과시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마치 춘추전국 시대의 왕족들이나 대부들이 경쟁적으로 휘하에 많은 식객을 들였듯이 이 시대에는 앞다투어 양자를 두었다.
752년(천보 11년), 이임보가 죽고 양국충이 그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양국충은 뇌물로 인사(人事)를 문란하게 만들고, 중앙정계를 그의 일파로 채워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하는 등 실정을 계속했다. 양국충은 또한 안녹산을 반란을 일으킬 인물로 지목하고 의심하며 현종을 부추겨 그를 소환하게 했다. 만약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반란의 뜻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현종은 양국충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시험 삼아 안녹산을 소환했다. 안녹산은 지체 없이 달려와 입궐했다. 현종은 안녹산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으며, 좌복야의 벼슬을 더하여 임지인 범양으로 돌려보냈다.
원래 반란의 뜻을 가지고 있던 안녹산은 평소 권모술수에 능한 이임보를 두려워하여 그의 생전에는 감히 모반을 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임보의 죽음으로 이제 두려울 것이 없게 되자 755년, 밀조를 받아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진짜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는 범양, 평로, 하동의 병력 등 총 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낙양을 향해 진군했다. 그가 거느린 정예 병사들이 달리며 일으키는 자욱한 먼지 기둥이 백 리까지 뻗었다. 안녹산의 반란 소식을 들은 현종은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을 찾았으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사가 없었다. 현종은 할 수 없이 당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장안에 와 있던 하서 · 농우(감숙성과 청해성 일대) 절도사인 가서한(哥舒翰)에게 급히 긁어모은 잡병 8만을 거느리고 동관을 수비하도록 명령했다. 동관은 섬서성에 있는, 낙양에서 장안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였다.
안녹산이 거느린 정예병들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낙양을 함락했다. 무려 30년 동안 지속되어 온 태평성세의 이면에는 무방비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하북 일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안녹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 후, 이곳저곳에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특히 안진경체로 서예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평원(平原) 태수 안진경(顔眞卿)이 의병을 일으켜 곡창지대인 강남으로 진출하는 안녹산의 반란군을 저지하고, 삭방(朔方, 영하) 절도사 곽자의(郭子儀)가 하북에 출병하여 반란군의 교통로를 차단해 버리자, 장안 동쪽의 요충지인 동관(潼關,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황하 북쪽의 좁은 계곡)을 공격할 수도, 강남으로 진출할 수도 없게 된 안녹산군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운동경기나 바둑 등에서는 자신의 실력으로 이기는 경우도 많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상대방의 실수나 패착으로 역전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것을 무슨 법칙이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한 개인의 인생이나 조직의 항로에도 심심치 않게 적용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종종 볼 수 있다. 궁지에 몰린 안녹산을 살린 것은 바로 안녹산의 앙숙 양국충이 둔 자충수였다. 당시 양국충은 남조(南詔)를 토벌하기 위해 8만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 길에 올랐다. 남조는 중국의 남서부 끝 운남성에 있는, 백족(白族)이 세운 왕국으로 9세기에는 미얀마, 타이,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혔던 강력한 왕국이었다. 남조의 왕 각라봉(閣羅鳳, 재위 748∼779)은 양국충에게 사죄하고 강화를 요청했으나, 무공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양국충은 이를 무시하고 전쟁을 벌이다가 그만 병력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6만의 전사자를 내고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현종과 장안의 조정에 패전 상황을 숨기고 터무니없이 전공을 조작하여 보고했다. 그 후, 양국충은 장안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양국충은 당나라 군사가 계속 승리를 거두어 난을 평정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동관을 수비하고 있는 가서한이 군사를 돌려 자신을 토벌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사전에 가서한군의 힘을 약화시켜야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서한군에게 낙양 탈환의 명령을 내리도록 현종에게 상주했다. 현종은 적군과 아군의 역학 관계도 고려하지 않고 가서한에게 낙양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잡병으로 구성된 가서한군은 사실 동관을 지키기도 역부족인 상황이었지만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서한군은 낙양을 공격하자마자 대패했고, 가서한은 반란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장안의 동쪽 요충인 동관은 안녹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72세의 현종은 양귀비와 황족, 그리고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무장한 천여 명의 친위군이 이들을 호위했다. 다음 날, 장안에서 백수십 리 떨어진 마외역(馬嵬驛, 섬서성 흥평시(興平市) 서쪽)에 이르렀을 때, 현종 일행을 수행하던 친위군 장병들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친 나머지 지금까지 참아 왔던 불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모두 재상 양국충의 잘못이라고 성토하며, 양국충을 잡아 목을 베고 현종의 거처를 포위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양귀비의 주벌을 요구했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것을 명령하였다.
양귀비가 죽은 지 10여 일 후에 장안도 함락되었다. 현종은 촉(蜀, 사천성) 땅으로 피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연도의 백성들이 현종의 피난 행차를 가로막았지만 현종은 태자 이형(李亨)에게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이르고 자신은 피난길을 계속 재촉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태자를 가로막고 함께 힘을 합쳐 수도 장안을 탈환하자고 간청했다. 현종은 극구 사양하는 태자에게 양위하고 성도(成都)로 피신했다. 태자 이형이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이가 바로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다.
안녹산은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한때 낙양과 장안을 수중에 넣었으나, 2년 후인 757년, 맏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당했다. 애첩의 아들 안경은을 후계자로 정하고 적자인 안경서를 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안경서는 안녹산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시위(侍衛)를 시켜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킨 후부터 눈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성 종양까지 생겨 공연히 울화통을 터뜨리는 등, 부하들에게 난폭하게 굴다가 결국 아들의 사주에 넘어간 부하의 손에 죽고 만 것이다.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진용을 정비하여 반란군을 공격하고 장안을 탈환한 후 낙양까지 탈환했다. 반란군은 패주하여 업(鄴)까지 밀려났다. 758년, 곽자의의 명을 받은 아홉 절도사들이 안경서의 반란군을 토벌하자 안녹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史思明)이 안경서를 지원하고 나왔고, 절도사들의 군대는 패주했다. 역사에서는 안녹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을 합쳐 ‘안사의 난’이라고 칭한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사사명 역시 그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당했다. 사조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패전을 거듭한 끝에 763년 자살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755년에서 763년 초까지 이어졌던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은 골육상잔(骨肉相殘)을 그 끝으로 하고 평정되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당나라 국력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안사의 난 이후 당 왕조는 무력이 우선하는 사회가 되었으며, 절도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 정부를 장악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 왕조는 종언을 고했고, 이후 50여 년에 걸쳐 중국 땅에는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혼란기가 전개된다.
757년, 당나라 군대가 장안과 낙양을 탈환한 후 현종은 피난해 있던 촉의 성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 마외역에 이르러 현종은 이곳에서 숨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했다. 다재다능하였고 명필이었으며, 특히 스스로 작곡까지 할 정도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고 감성이 풍부했던 현종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양귀비를 그리워하면서 슬픔과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7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양귀비의 한’, 중국어로는 ‘楊貴妃的遺憾’이라는 별칭을 가진 여지(荔支)라는 열대과일이 있다. 껍질이 붉고 과육이 희며 크기는 탁구공 정도인 이 과일을 양귀비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과일 좋아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마는, 양귀비는 이 과일로 인해 많은 죄를 지었다. 남방의 열대 지역에서 나는 이 과일을 북방의 장안까지 신선한 상태를 유지한 채로 운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과일을 더는 먹지 못하고 비명에 간 양귀비의 한과, 그 과일 때문에 억울하게 고생하고 비명에 간 무고한 인민들의 한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깊을까? 과일에 붙은 별칭을 보니 아마 양귀비의 한이 더 깊고 슬펐나 보다.(‘楊貴妃的遺憾’은 사실은 ‘양귀비의 유감’으로 번역되어야 맞는데, 우리말의 ‘유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의 분위기에 그다지 걸맞지 않은 것 같아 좀 더 깊은 맛을 주는 ‘한(恨)’이라는 글자를 택했다.)
* 출처: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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