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공주(598年-623年), 중국 당나라 당고조 이연의 딸(적녀-황후와의 출생 자녀)
적생자 중에서 2번째, 이건성의 동생이며 당태종 이세민의 누이. 2명의 서출 출신 언니, 장사공주와 양양공주가 있어 여자 중에서는 3번째이다. 사람들이 삼낭자라고 불렀으며 시소에게 시집을 갔다.
당고조 이연이 처음 병사를 일으킬 때 평양공주와 시소는 장안에 있었으나 탈출의 불편함을 고려하여 시소혼자 탈출하도록 하고 자기는 그냥 남아있었다. 시소가 장안을 떠난 후 평양공주는 장안에서 호현(현재 섬서 호현)으로 피하였다. 가재를 나눠 산속으로 숨어버린 수백명을 구해 부친의 봉기에 호응하였다. 또, 심복에게 3가지 보물을 주어 지주인 반인이 항복해서 무장하여 호현성을 함께 공략하도록 하였다. 또, 수나라에 반발하던 이중문, 향선지, 구순리 등의 항복을 받아 최대 인원이 7만명에 달했고 이들을 낭자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주질(현재 섬서성 주지), 무공(현재 섬서성 무공진), 시평(현재 섬서성 동남부) 등 관중(섬서성 위수부근 분지 지역)일대의 요충지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역사가들로 하여금 “병사는 7만이나 관중을 휩쓸었다(떨게 만들었다)” 하게 만들었다.
평양공주는 사람을 부친에게 보내 보고를 하자 이연은 생각지도 않은 소식에 기뻐하였다. 더불어 시소에게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화음을 점령하고 접응토록 하였다. 평양공주가 이끄는 정예병 일만여명은 위하 북쪽 기슭에서 이세민과 합류하도록 하고, 뒤이어 시소가 막부(군 지휘관들의 지휘막사)를 나눠 설치하여 장안성을 포위 공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드문 걸출한 여자 군사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병사를 일으킨 것은 수나라 군을 견제하게 되었다. 이는 이연이 서진을 하며 장안성과 관중 지방을 점령하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들을 제거한 역할을 하였다. 이연이 황제가 되자 그녀를 평양공주의 봉작을 내렸다. 낭자군의 혁혁한 공로와 이연의 유일한 적녀로 당나라를 건국한 이후 모든 공주들이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무덕 6년(서기 623년), 평양공주가 죽자 장례에 취타대 등 군인 장례 의장과 무사들이 줄을 이었다. 시호는 소(昭), 그녀가 죽을 때 불과 20여세에 지나지 않았기에 역사는 그녀를 평양공주라고 칭한다. 게다가 621년 그녀가 아직 낭자군을 떠나지 않았기에 어떤 사람은 그녀가 전사하거나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았다고도 한다.
그녀의 아들 시영무는 당태종의 딸 파릉공주를 부인으로 얻었다. 옛날 그녀가 지켰던 지역을 지금은 낭자관이라고 부른다.
* 출처: 정보- 책/ 수집- 검색 자료 [cafe.daum.net/c.c.c.n/UTwm/70에서 번역문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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