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 가이슈 勝海舟 | |
시대 | 막말 ~ 메이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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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3년 3월 12일 |
사망 | 1899년 1월 21일 |
별명 | 막말 삼슈 |
묘소 | 센조쿠이케 공원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이에사다, 이에모치, 요시노부 |
씨족 | 가쓰 씨 |
부모 | 가쓰 고키치 |
아내 | 1처 5첩 |
자녀 | 가쓰 고로쿠 등 양자: 가쓰 구와시(친부: 도쿠가와 요시노부) |
가쓰 가이슈(일본어:
에도 시대 및 메이지 시대의 고위관리이다. 관위는 종1위 백작이며, 야마오카 뎃슈, 다카하시 데이슈와 함께 「에도막부 말기의 3슈」라고 불린다. 본명은 가쓰 요시쿠니(勝 義邦)이며 메이지 유신 후에는 가쓰 야스요시(勝 安芳)로 개명했다. 호인 가이슈는 사쿠마 쇼잔에게서 받은 전각「海舟書屋」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생애
유·소년기
고향은 스미다 구(墨田区) 혼조(本所)로서, 하타모토 가문 출신으로 아명은 린타로(麟太郎)였다.
난학[蘭學]에 심취하였고, 사쿠마 쇼잔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1850년 아카사카[赤坂]에 사설학교를
세워 서양 병학을 가르치다가 1854년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전습생 감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인 교관들과 접촉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된다.
정치 활동
막부말기의 정치 활동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한 사절로 함림환(咸臨丸 , 간린마루 : 일본 최초의 증기범선)을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귀국 후에는 일본 해군의 근대화 및 해안방어체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와 막부의 사이에서 중개역을 맡아 정부군이 에도 성에 무혈입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메이지 시대
모든 재산을 메이지 정부에 압류당해 가신에게 봉급을 줄 수 없던 도쿠가와가는 당시 슨푸(시즈오카 현)로 이동하여, 그의 주도 아래 마키노하라 차밭을 일궈 부족한 재정을 메웠다.
가계
그의 스승인 사쿠마 쇼잔은 그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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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슈[海舟]는 호이고 이름은 요시쿠니[義邦], 관직에 오르면서부터 아와노카미[安房守]라 불렸고 메이지[明治] 시대부터는 야스요시[安芳]라 했다. 해군을 개혁했으며,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황권이 회복된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 중재역할을 했다.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1845년경부터 서양 병학을 습득하기 위해 란가쿠[蘭學]를 배우면서 해안방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50년부터 아카사카[赤坂]에 사설 학교를 세워 서양 병학을 가르치면서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등과 함께 거론될 정도로 유명해졌으며, 바쿠후의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 설립 시에는 창설준비위원으로, 나가사키[長崎] 해군전습소(海軍傳習所) 설립(1854) 시에는 해군전습생 감독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인들과 접촉하며 세계정세에 관한 정확한 인식과 넓은 시야를 얻은 것이 이후 그가 관료로서 성장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1858년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美日修好通商條約)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한 사절단을 수행하여 간린마루[咸臨丸]의 선장으로 태평양을 횡단함으로써 일본 최초로 배를 타고 미국에 건너가는 데 성공했다(1860).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일본 해군을 근대화하고 해안방어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노력했다.
한편 1866년 제2차 조슈[長州] 정벌에 실패한 도쿠가와 바쿠후 내의 온건파 지도자로서 덴노 지지파와 바쿠후 지지파 사이에 점점 커지는 갈등을 완화해보려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덴노 지지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1868년 5월 덴노 군대의 에도 입성(入城)을 앞두고 정국을 수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설득하여 자신의 비전론(非戰論)을 관철시키는 한편 덴노군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협상함으로써 내전을 회피할 수 있었다.
그의 정치활동은 이 시기를 고비로 막을 내렸다. 신정부의 요직을 맡기도 했으나 일시적이거나 명목상의 직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년의 활동은 주로 저술 및 편찬사업이었다.
그는 바쿠후의 자료를 수집하여 각종 제도에 관한 사료집을 편찬하는 한편 〈스이진로쿠 吹塵錄〉·〈개국기원 開國起原〉·〈해군역사 海軍歷史〉·〈육군역사 陸軍歷史〉 등을 저술·편찬했다. 1887년 백작 작위를 받았다.
[출처: 정보- 책 / 자료 수집- 위키, 다음백과
[참고 자료]
히카와 청화 - 막부 시대 말기의 개화파 정치가 가쓰 가이슈의 수필집으로, ‘뛰어난 사람은 널리 내다본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기에 탁월한 정치 수완을 발휘한 가쓰 가이슈가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정치 야화와 체험담, 메이지 시대의 정치와 세상사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의 아시아 정세 등에 대해 자신의 정치관을 주축으로 이야기하듯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위대한 인물은 시야가 넓어야 한다
위대한 인물이란 그리 자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통례로 100년에 한 사람 정도 나오니까 지금 뛰어난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다음은 200년이나 300년 뒤에나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인물은 자서전의 힘이나 다른 어떤 힘을 빌려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200~300년 지나면 대개 그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 다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앞뒤 일을 살피다 보면 300년 전에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통칭 린타로(麟太郞)로 불렸던 가쓰 가이슈의 이름은 요시쿠니[義邦, 훗날 야스호(安芳)로 개명했음]이고, 가이슈는 그의 호이다. 가이슈는 “내가 가이슈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사쿠마 쇼잔이 쓴 ‘가이슈 서옥(海舟書屋)’이라는 현판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가이슈는 1823년 1월 31일 가쓰 쇼키치(勝小吉)와 노부(信) 부부의 장남으로 에도 가메자와초(龜澤町)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을 섬겨온 막부의 신하였는데 연간 20석 정도 받는 하급 관리였다. 따라서 가이슈는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청년기에는 검술과 난학을 익혔다. 그 뒤 오쿠보 다다히로(大久保忠寬, 1817~1888, 막부 시대 말과 유신기의 정치가)를 사귀게 되면서 막부 관리로 정식 등용되었다. 1860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한 사절단의 수행선을 지휘해 일본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당시 가이슈의 나이는 38세였다.
1862년 8월, 가이슈는 함선에 관한 행정 일체를 관할하는 직책인 군함부교(軍艦奉行)가 되어 정국의 표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막부 내부에서 일어난 공무합체운동(公武合體運動)각주[1] 을 이끌며 고베 군함훈련소의 창설과 경영에 힘쓰는 한편, 시코쿠(四國) 연합 함대의 시모노세키(下關) 포격 중지 교섭과 제2차 조슈(長州) 정벌 전쟁을 중재하고 메이지 원년인 1868년 도쿠가와 가문의 대표로서 조정 측 군 대표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교섭으로 에도 성을 무혈로 개방하는 등 정치적 사건의 전면에서 활약했다.
가이슈의 정치적 행동과 정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막부의 신하이면서도 막부를 뛰어넘는 시각으로 막부의 이익에 앞서 ‘일본’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시각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이슈는 앞서 언급했듯 정치 무대의 전면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동시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 반막부파 지사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덧붙여 가이슈는 기능주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선악이라는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효과라는 측면에서 판단했으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했다. 이 같은 생각은 그가 주창한 아시카가 요시미치론(足利義滿論)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시카가 요시미치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의 국왕으로 봉해진 것에 대해 역사가들은 갖가지 말로 공격하고 있다. 나는 요시미치를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그가 허명에 불과한 책봉을 받은 것은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고자 함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시미치가 명나라에 머리를 숙임으로써 번번이 영락전(永樂錢) 하사를 청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만만찮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관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고정된 생각을 품고 천하를 다스리려 함은 결코 왕자(王者)의 길이 아니다”라든가, “나는 전부터 주의라든가 도리(道) 등을 고집하면서 꼭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단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등의 말에도 일관되어 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유덕의 향기를 천년 뒤에도 남기겠다느니, 소행의 악취를 만세토록 흐르게 하겠다느니 하면서 그것을 출처진퇴(出處進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그런 옹졸한 생각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 후세의 역사가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쳤다느니, 역적이라느니 할 테지만 그런 견해는 알 바 아니다”라는 말도 거침없이 했다. 가이슈는 그러한 오명이나 폄훼에 초월한 태도를 지녔던 것이다.
가이슈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업이었던 에도 성의 반환에 대한 회고담은 가이슈의 심정을 가장 솔직히 나타낸 저술이며, 아울러 그의 정치적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다.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 1163~1224)는 나라를 위해 불충하다는 말조차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며 온 힘을 다한 것이다. 그와 같은 고민은 경솔한 소인배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라이 산요의 무리는 식견이 좁았다. 나 역시 막부가 와해될 때에는 요시토키에게 억지 웃음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조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가이슈는 해군 다이후(大輔,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와 해군경 참의원 등을 역임했고, 1888년에 추밀원(樞密院)이 구성되자 추밀 고문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맡았는데, 국가의 중추부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가이슈는 260년 동안 영화를 자랑했던 에도 막부가 한순간에 무너진 메이지 유신이라는 ‘격변기’를 체험했다. 그러한 가이슈의 입장과 체험은 앞서 살펴본 가이슈의 발상과 맞물려 시대와 상황 그리고 ‘명분’을 뛰어넘는 시각을 형성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시대와 상황 그리고 명분에 얽매인 정신을 비판한 것이다.
가이슈는 자신의 그 같은 정신적 태도를 ‘여유’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여유’는 막부 신하라는 곤란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막부 시대 말과 유신기라는 혼란스러운 격동기를 살아남은 가이슈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쓰 가이슈(1823~1899)는 막부 말기의 정치가이자 메이지 정부의 고급 관리였으며,
해안 방어 체제의 발전에 공헌한 근대 해군의 창시자이다.
에도 시대 말기에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검술을 익혔고, 난학자 나가이 세이가이(永井靑崖)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난학(蘭學)을 공부했다. 그 시절에 만난 사상가 사쿠마 쇼잔의 권유로 병학과 화포술을 배우고, 1850년에는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 사설 학원을 세웠다.
1860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 체결)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사절단을 태운 배의 선장이 되어 일본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1868년 신정부파(천황파)와 도쿠가와 막부가 무력으로 대치하자 가쓰 가이슈는 막부 대표로 신정부파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협상해 신정부파가 무력 충돌 없이 에도에 입성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병부성(兵部省) 대신을 거쳐 원로원 의관, 추밀원 고문관 등을 역임했고, 막부 체제 붕괴에 따른 혼란을 최대한 막기 위해 30년 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해군역사』와 『육군역사』, 『개국기원(開國起源)』 등 옛 막부 시대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며 만년을 보낸 가이슈 주변에는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수많은 언론인들이 모여들었고, 『국민신문』과 『도쿄아사히 신문』, 『도쿄마이니치 신문』, 『여학잡지(女學雜誌)』 등 당시의 대표적인 언론 매체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쟁하듯 실었다.
그 가운데 『여학잡지』에 실린 글은 1900년에 이와모토 요시하루가 ‘가이슈(海舟) 여파’라는 제목로 상장했고, 훗날 요시하루는 이 책을 토대로 『가이슈 좌담』을 펴냈다. 이 내용은 그 뒤 다시 재편집되어 ‘가이슈 어록’이라는 제목으로 『가쓰 가이슈 전집』에 수록되었다. 또한 요시모토 죠(吉本襄)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가이슈의 담화를 편집해 1898년에 출판했는데, 이것이 바로 『히카와 청화』이다. 『히카와 청화』는 그 뒤 가이슈 전집에 ‘청담(淸譚)과 일화’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그 밖에는 앞서 소개된 여러 책들을 토대로 가쓰베 미타케(勝部眞長)가 편집한 『히카와 청화』가 있다.
『히카와 청화』는 가이슈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기록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내용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 책으로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을 따지려 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올바른 독서법은 가이슈의 정신적 자세와 사상적 시각을 파악하며 읽는 데 있다. 그렇게 하면 가이슈 수필의 독창적인 발상과 어투 속에 가득 찬 정교한 비유와 해학 그리고 역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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