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다 문 밖의 변 (桜田門外の変)
일본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존왕양이파 지사들에게 암살된
사건(1860. 3. 3).
T. 해리스 등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한 바쿠후는 쇄국양이를 주장하는 조정과 여러 한[藩]들의 비난을 받아 위기에 직면했다. 마침 당시의 정계는 쇼군[將軍] 계사문제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요시토미[德川慶福]를 내세운 기슈[紀州]파와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를 추천한 히토쓰바시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다이로로 임명된 이이 나오스케는 조약의 칙허를 얻어내고자 로주[老中]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를 통해 조정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혈통론을 내세워 히토쓰바시파를 물리치고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존왕양이운동의 중심지였던 미토한은 이이와 대항하는 한편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삼도록 조정에 공작을 했다.
이이 등은 양이파 공가와 지사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처벌을 내렸는데(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 이에
격분한 미토의 무사 18명이 바쿠후로 등청하러 가는 이이를 사쿠라다몬 밖에서 습격하여 암살했다.
[경위]
이이는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칙허를 받지 않은 채로 독단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조인하여 히토쓰바시 파, 난키파로 쇼군 후계자 문제를 체결하였다. 안세이 대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해왔던 이이 나오스케에게,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근신처분 등으로 인해 특히 반발이 컸던 미토 번에서는, 다카하시 다이치로나, 가네코 마고지로등의 과격 낭인 지사들이 탈번하여 사쓰마 번의 아리무라 지자에몬등과 공모, 모반을 꾀했지만 사쓰마번 내에서의 정세 변화에 의해, 양 번의 무사 합동 거사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후 미토의 과격파가 독자적으로 다이로 습격을 단행하였고, 사쓰마에서는 아리무라 혼자 가세했다.
당일 이른 아침, 일행은 결행 전에 연회를 개최하고, 하룻밤 지낸 도카이도 시나가와 여관을 출발하여, 도카이도를 따라 나아가며 관문을 지나 후다노쓰지를 돌아 아미 고개, 신메이 고개 , 나카노 다리를 지나 사쿠라다 거리로 나와, 아타고 신사에서 기다린 뒤, 사쿠라다 문 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에도 번 저택에서 우치보리 길을 따라서 등성하는 도중의 나오스케를 에도 성 밖 사쿠라다 문 밖에서 습격했다. 이이 가에 미리 경고문이 도착했지만 이이는 굳이 호위를 강화하지 않았다.
습격
당일에는 계절과 맞지않는 눈으로 인해 시야가 나빠서 호위무사들은 비옷을 걸치고, 칼의 손잡이에는 자루를 씌워놓았기 때문에 습격하는 측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에도 막부가 열린 이래 막부에서는 에도 시중에서 다이묘의 가마를 습격한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히코네 번 측의 방심을 불러온 측면도 있다. 습격자들은 무가 연감(武鑑)을 손에 들고 다이묘의 가마를 보는 구경꾼 모습을 하면서 나오스케의 가마를 기다렸다.
가마가 가까워지면서, 먼저 앞쪽을 맡은 모리 고로쿠로가 가마 행렬의 수행원쪽으로 다가가, 붙잡으러 온
쿠사카베 사부로에몬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이렇게 해서, 호위무사들의 주의를 앞쪽으로 끌어들이고, 구로사와 주자부로가 신호로 권총[1]을 가마를 향해 발사하면서 이이가 있는 가마 습격이 개시되었다. 권총으로 신호를 준 인물이 세키 데쓰노스케라는 설도 있다.
이이 나오스케는 발사된 탄환에 의해 허리 부분에서 대퇴를 걸쳐 총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습격에 놀란 가마꾼은 도주하였고, 수명의 수행 무사들이 가마를 움직이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들 역시 베여져 가마는 눈 위에 방치된다. 히코네 번 무사들은 손잡이에 씌워놓은 자루가 오히려 방해가 되어 칼을 뽑을 수 없어 칼집으로 저항하거나, 맨손으로 칼을 잡는 바람에 손가락이 잘리는 등 불리한 형세였지만, 이도류를 사용하여 저항했다.히코네 번 무사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가사이 주자에몬은 가마 옆을 지켜 이나다 주조를 쓰러뜨리는 등 습격자들을 애먹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에는 살해된다.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가마에 차례차례로 검이 찔렸다. 아리무라 지자에몬은 가마 문을 활짝 열어고 숨이 끊어져가는 나오스케의 상투를 잡아 가마로부터 끌어냈다. 나오스케는 지면을 기어가려 했지만, 아리무라의 ‘원규[2]’와 같이, 이이의 목은 공처럼 날았갔다. 습격개시로부터 이이 암살까지는 고작 몇 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한다. 일련의 사건 경과와 극명한 모습은, 가노 호우가이작품《사쿠라다 사건 에마키》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아리무라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칼 끝에 나오스케의 수급을 찔러 위를 향해 올렸지만, 졸도하고 있던 고쇼 오가와라 히데노죠가 함성 소리를 듣고 깨어나 주군의 머리를 되찾으려고 아리무라의 후두부를 베었다. 오가와라는 히로오카 네노지로에 의해 베였지만, 아리무라도 중상으로 인해 걷기 곤란하게 되자 와카도시요리의 엔도 쓰네노리 저택의 문 앞에서 자결한다.
습격 소식을 들은 히코네 번 저택에서는 곧 사람들을 보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하는 수 없이 사상자나 가마, 선혈 투성이인 많은 손가락이나 귀가 떨어진 눈까지 회수했다. 나오스케의 머리는 엔도의 저택에 보내졌지만, 소재를 알아낸 히코네 번 측이, 싸우다 죽은 번의 사무라이 중에서 연령과 체격이 나오스케와 가장 닮은 가타 구로타의 목으로 속여서, 번 저택에서 전의에를 시켜 몸통과 꿰매어 붙였다.
사상자와 처분
습격자 측 중에서, 맨 처음으로 가마를 겨냥해 칼로 벤 이나다 주조는 가사이에게 베여 즉사했고 아리무라 지자에몬 외 히로오카 네로지로, 야마구치 다쓰노스케, 고이부치 가나메는 히코네 번 무사들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중상을 입고, 다른 번 저택에 가서 자수한 뒤 할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수하거나 포박 된 뒤에 살해되거나、옥사하였다. 마스코 긴파치와 가이고 사키노스케는 잠복하여, 메이지 시대까지 살아 남았다.
이이 가 측은 이이 의외에 8명이 사망(즉사한 사람 4명, 나중에 사망한 사람 4명.하였고,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의 집에서는 가독 상속이 정해졌지만, 나오스케의 호위에 실패한 생존자에 대해서는, 2년 후인 1862년에 처분이 내려졌다. 구사카리 슈고로 등 중상자는 번의 영지였던, 시모쓰케노쿠니의 사노의 아게야에 유폐된다. 경상을 입은 자는 전원 할복이 명해졌고, 상처가 없는 자는 시분(士分, 무사의 계급)부터 가마꾼까지 전원이 참수되어 가문이 단절되었다.
영향
이이 다이로가 시도했던, 막부의 정치를 세력있는 번과의 협조체제 구축하려는 시도가 각 번의 주도형으로 회귀시켰다. 막부의 권위도 실추되어 막말의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오이자카의 변에 이르기까지의, 실력행사와 무력에 의한 전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덧붙여, 1864년에 덴구당의 난이 일어나면서, 히코네 번 무사는 ‘나오스케 공의 복수’ 라고 전의를 고양시켜, 나카센도를 봉쇄하여 쓰쿠바 산에서 교토로 향한, 미토 번 무사를 추격하려 했다. 역부족이었던 덴구당은 미노에서 히다를 지나 에치젠으로 들어가, 쓰루가에서 항복했다. 다케다 고운사이등 미토 낭인 무사 352인은 여기서 처형당한다. 이때 히코네 번 무사가 미토 낭인 무사를 처형한 형장은 라이코 사이다.
이이가의 그 뒤
당시의 공식기록으로는 “이이 나오스케는 갑작스럽게 병을 앓아, 잠시동안의 투병을 위하여 급히 상속원을 제출하였고 서류 수리를 기다리던 중하던 중 병사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이이가의 단절과, 이로 인한 미토 번에게로의 원한이라고 하는 전란의 격화를 막기 위한 막부의 파격적인 배려였다. 이이가의 보다이 사・고토쿠 사에 있는 묘비에 사망일이 ‘3월 28일’이라고 조각되어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오스케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나오스케의 이름으로 사쿠라다 문밖에서 부상을 입은 손가락이 막부에 제출되었고, 쇼군가에서는 나오스케한테 보내는 병문안 선물이 번 저택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해 많은 다이묘들의 병문안 사자가 방문했지만, 그 중에는 사건 당사자 중 하나인 미토 번에서 온 사람도 있어, 히코네 번 무사들의 증오에 가득찬 시선 속에서 접대를 받았다라고 전해진다. 이이가의 떨어져 있는 영토였던 세타가야 령의 대리를 맡은 오바 가의 기록에 의하면 투병중인 나오스케를 위해 가족들이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습격당한 뒤의 현장을 오와리 도쿠가와가 등의 다이묘 가마가 계속해서 지나가 선혈이 묻은 눈이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다이로 암살은 순식간에 에도 시중에 널리 퍼졌다.
1862년에 병사를 거느리고 상경한 시마즈 히사미쓰는,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를 추대하여 막부 정치의 쇄신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주도로 이이 나오스케의 청산을 도모했다. 그 결과, 나오스케의 측근이었던 로주 안도 노부마사를 불러 구제 히로치카를 파면하는 동시에, 나오스케의 실정을 이유로 교토 수호직을 이이가로부터 박탈하고,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임명했다. 또한 녹봉도 35만석에서 25만석으로 줄였다. 히코네 번에서는, 나오스케의 심복이었던 나가노 슈젠이나 우쓰기 로쿠노죠를 참수, 방지하려고 하였지만 감봉은 면해지지 않았다.
각주
- 이동 ↑ 이 때 사용된 권총은, 페리 함대가 내항할 때 막부에 증정한 미국제 콜드M1848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입수하여 번 내에서 모방하여 제조한 물건이며,제조기술수준이 낮아 총 안에 강선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 판명되었다. 또한, 미토 번의 많은 낭인지사가 습격할 때의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구전으로 그 손자가 전해주고 있다.
- 이동 ↑ 사쓰마 번 지겐류의 특징으로 원숭이의 절규를 모방한 독특한 기합
이이 나오스케 井伊直弼 | |
히코네 귤 | |
출생 | 1815년 10월 29일 |
---|---|
사망 | 1860년 3월 3일 |
번 | 히코네 번 |
씨족 | 이이 씨 |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1815년 10월 29일 - 1860년 3월 3일)는 오미 히코네 번의 제15대 번주이자 에도 막부의 다이로이다.
일생
유년
1815년 11월 29일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나케(井伊直中)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4남이라는 위치, 한미한 생모의 신분 등으로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탓에 어린 나이에 집안의 후원을 받는 절로 보내졌다.
17세부터 400석의 한직을 맡아 15년간 은둔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동안 13명의 형들이 대부분 죽거나 다른 집안에 양자로 가는 바람에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
다이로 취임
형이자 14대 번주 이이 나오아키(井伊直亮)의 아들이 죽자 형의 양자가 되었고, 1850년 제15대 번주가 되었다. 1853년 매튜 C.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찾아오자 개국 여부를 둘러싸고 막부 중신 및 다이묘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겨나고, 쇼군 이에사다가 취임하자 그의 후계자 문제까지 겹쳐 양이파와 개국파의 대립은 극심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1858년 에도 막부의 비정기 최고직인 다이로에 취임하였고, 당시 천황의 승인을 받지 못해 계류중이던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쇼군의 후계자 분쟁에서도 기슈 번주 요시토미를 추천한 난키파의 손을 들어주고 그에 반발하던 히토쓰바시 파를 숙청하는 이른바 안세이 대옥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강압정책은 여러 사람의 불만을 샀고, 특히 전 미토 번 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가택연금당한 것에 원한을 품은 미토 번 출신의 유랑무사 로닌에게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당시 암살당했다.
* 출처: 정보 - 책 / 수집-다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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