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나리아키(일본어:
일생
1800년 3월 11일 제7대 미토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문하에서 미토가쿠(水戶學, 주자학을 배경으로 존왕양이를 주장했다.)을 배웠다. 1829년 맏형인 제8대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뒤를 이어 제9대 번주가 된다.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일으킨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가택연금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인물·일화
- 시호인 烈公(열공)에서도 짐작이 가지만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나가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 나리아키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여색을 밝혀 형수인 미네 공주(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의 시녀인 가라하시(원래는 오오쿠의 시녀였다)까지 측실로 삼을 정도였다. 이 일의 영향으로 오오쿠의 여성들은 그를 싫어했고,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에도 어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리아키는 3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이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거나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다.
- 미토학파의 영향을 받아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 인재가 부족했던 막말의 도쿠가와 가문에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막부의 큰 타격이었고, 그가 죽은 후 미토 번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그가 발굴해낸 인재도 모두 자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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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노와 대영주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고 외국인이 입국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혁조치들을 주장한 일본의 강경파 존왕양이론자(尊王攘夷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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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이상 일본을 지배해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29년 형의 뒤를 이어 미토 한[水戶藩]의 한슈[藩主]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지역의 하나였던 미토 한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를 받았지만, 미토 한은 쇼군[將軍]에게 빼앗긴 덴노의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존왕운동의 중심지였다.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나리아키는 더 많은 권한을 봉건영주들에게 보장해주고 국내의 단결을 고취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군사 및 산업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중앙정부에 강력히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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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양과의 교역과 접촉이 늘어나면 일본의 성스러운 전통이 파괴되리라고 생각한 그는 서양인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양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리아키가 미토한에서 실시했던 개혁조치는 그의 명성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 모범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미토 한의 재정과 행정을 재조직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으며 철강 및 조선업을 시작하는 한편 서양의 군사기술을 들여왔다. 그는 바쿠후의 치안조항을 정면으로 어기고 대포를 만들게 되면서 아들 게이키[慶喜]에게 미토 한을 물려주고 물러났으나, 미토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고 1848년 다시 한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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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뒤인 1853년 미해군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내항하여 2세기에 걸친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문호를 개방할 것을 강요했다.
국내 여론을 모으기 위해 바쿠후가 나리아키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그는 여기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페리와 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바쿠후의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가 1858년에 죽자 그의 아들 게이키가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결국 다른 경쟁자가 후계자로 뽑혔으며, 정부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통상을 규정한 조약을 체결했다(미일수호통상조약). 나리아키는 덴노의 동의없이 체결된 이 조약이 일본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쇼군은 이러한 비난을 자신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보아 나리아키와 그 추종세력에게 사퇴를 명령했다. 나리아키가 죽은 뒤 도쿠가와 세력은 붕괴되었으며, 바쿠후 내에서 좀더 개혁지향적인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라는 이름으로 쇼군이 된 게이키는 바쿠후 체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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