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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 Henrik Johan Ibsen ]
출생 | 1828년 03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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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6년 05월 23일 |
국적 | 노르웨이 |
작품/저서 | 〈브란트〉, 〈인형의 집〉, 〈페르 귄트〉 등 |
[요약 ]연극을 통한 시대의 감독관을 자처하며 현실 세계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헨리크 입센은 노르웨이의 극작가로, 현대 사실주의 연극 혹은 시민 연극의 장을 열었으며,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현대극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 발표된 1879년 12월 4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입센은 연극은 사회의 거울이자 시대의 감독관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당대의 사회 문제를 드러내고 파헤쳤다. 그는 "인생은 마음속에 있는 환영이다."라고 말하면서, 늘 현실 세계의 문제를 고민하고 당대인이 가지고 있던 관념에 도전하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헨리크 요한 입센은 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의 남쪽 지역 텔레마르크 주 시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누트 입센은 대상인으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성장기는 순탄치 않았다. 8세 때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15세 때 그림스타드 인근의 약제사 아래에 들어가 도제로 일하면서 학대와 멸시, 굶주림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밤에는 혼자 공부를 하고, 신문에 풍자만화와 시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림과 글재주는 어머니 쪽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로마 시대 웅변가들의 연설을 읽고 감동하여, 로마 공화정 말기를 배경으로 혁명가가 주인공인 영웅적인 역사극 〈카틸리나〉를 써서 자비로 출판했다. 1848년에는 파리의 2월 혁명을 전해 듣고 감동받아 산문과 시를 썼고, 그중 한 편을 국왕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21세 때 입센은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크리스티아니아 지역으로 올라왔으나 이듬해 시험에서 낙방했다. 그해 9월에는 그림스타드 지방 부르주아의 생활을 풍자한 〈전사의 무덤〉을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 상연했는데,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한편 정치와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입센은 노동단체에 가입하고, 친구들과 사회주의 경향의 주간지 〈사람〉을 발행하는 등 정치, 사회 개혁운동을 활발히 했다. 때문에 급진 세력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851년, 입센은 베르겐에 있는 국민극장에서 극작가이자 무대감독으로 일하게 되었고, 〈에스트로트의 잉겔 부인〉, 〈솔하우그에서의 향연(饗宴)〉, 〈헤르게트란의 전사(戰士)〉 등을 집필했다. 1857년에는 크리스티아니아에 신설된 노르웨이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5년 후 극장이 경영난으로 폐쇄될 때까지 이곳에서 극작가이자 무대감독으로 일한다.
그해에 입센은 소설가 막다린느 토레센의 양녀인 수산나 토레센과 결혼했는데, 여성 해방운동가들과 교류하던 그녀의 영향을 받아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 후 입센은 최초의 현대극으로 꼽히는 〈사랑의 희극〉을 집필했다. 여기에서 그는 양성 평등 문제를 제기하고, 결혼은 사랑이 바탕이 된 자유연애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제외하고, 입센은 아이슬란드 고대 및 중세의 역사, 설화 등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나 셰익스피어와 빅토르 위고, 홀베르그 등 과거 위대한 극작가들의 형식을 따른 작품을 썼을 뿐 독창적이라 할 만한 작품은 쓰지 못했다.
1864년부터 입센은 고국을 떠나 로마, 드레스덴, 스톡홀름 등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지냈다. 대극작가들의 형식을 답습할 뿐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을 찾지 못한 데 대한 우울함, 어느 정도 자리는 잡았으나 신진 작가들에게 밀리는 상황에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국을 떠날 당시의 입센은 이 여행이 30여 년이나 계속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로마에 정착한 입센은 2년 후 극단적 이상주의자 브란트의 투쟁과 실패를 통해 노르웨이 사회의 위선을 고발하는 비극 〈브란트〉를 썼다. 이 작품은 노르웨이 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힐 만큼 크게 성공했으며, 입센에게 명예와 경제적인 안정을 선사해 주었다. 다시 2년 후 입센은 부와 쾌락, 모험을 추구하는 인간의 방랑과 고난을 통해 부와 권력 같은 허상을 좇는 근대인의 황폐한 정신과 야망의 덧없음을 보여 준 〈페르 귄트〉를 발표했다. 발표 직후 이 작품은 《파우스트》와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극시라는 찬사를 받는 동시에 극시의 형식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 무절제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주인공 페르 귄트의 성격에 대한 비난 등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868년에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 입센은 산문극 〈청년 동맹〉, 로마 사극 〈황제와 갈릴리인〉을 완성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 거주하는 동안 입센은 정치, 사회적 문제점을 해부하는 사회극으로 자신의 희곡 형식을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1877년 중산층 도덕의식의 허위성을 파헤친 최초의 사회극 〈사회의 기둥〉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현대의 생활 모습을 통해 사회 문제를 보여 주는 최초의 사실주의극으로, 이후 현대 연극의 형식과 소재를 규정지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듬해 베를린의 극장들에서 이 작품이 공연되면서 입센은 독일 및 영국에서 유망한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79년에는 '아내,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겠다'라는 여인 노라의 각성 과정을 그린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 〈인형의 집〉을 발표했다. 자아를 찾기 위해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주인공 노라의 행동은 당시로서는 센세이션하기 이를 데 없었고, 발표 직후부터 이 작품은 결혼과 가정의 성스러움을 파괴한다는 등의 거센 논란에 직면했다. 1881년에 발표한 〈유령〉은 〈인형의 집〉의 주요 논란에 대한 답으로, '노라가 사회의 인습에 타협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면'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전작보다 더 사회의 인습과 도덕관념에 도전한 문제작으로 평가받으며, 각지에서 상연 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 〈유령〉 역시 비난에 휩싸이자 입센은 사회의 집단이기주의를 그려 낸 〈민중의 적〉이라는 다소 노골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인형의 집〉과 〈유령〉, 두 편은 이후 근대 사상과 여성 해방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입센은 이 시기에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이전의 대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냈다. 극적인 소재에서 현대인의 일상을 소재로, 이상주의적인 인물들은 평범한 개인들로, 인위적인 무대 형식 역시 평범한 현대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적, 감상주의적 주제 역시 일상적인 관념의 당위성을 묻는 현실적인 것으로 옮아가게 했다. 또한 방백이나 독백처럼 직접적으로 자신의 심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장치나 의상, 성격, 상황 등을 통해 섬세하게 인물의 심리를 표현했다. 이런 사실주의적 수법은 관객들로 하여금 잘 만들어진 연극 한 편을 보고 있다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느끼게 하고, 무대의 상황에 공감하고, 자신의 주변 세계를 성찰하게 만들었다.
1884년에 발표한 〈들오리〉는 이런 입센의 연극 요소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집약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로즈메르솔름〉, 〈바다에서 온 부인〉, 〈헤다 가블레르〉 등을 통해 입센은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입센은 특히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 혹은 개인의 비극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의 인습과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는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가정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말년에는 〈대건축가 솔네즈〉, 〈우리들의 사자(死者)가 소생할 때〉와 같이 인간의 운명에 작용하는 인생의 신비한 힘들을 상징을 통해 표현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1899년, 〈우리들의 사자가 소생할 때〉를 발표한 뒤 점차 건강이 쇠약해진 입센은 1905년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듬해 5월 23일에 동맥경화와 전신마비로 사망했다.
[출처: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헨리크 입센 (현대극의 아버지) [Henrik Johan Ib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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