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작부터 사기 협박에 악용돼
간통죄는 올 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여성과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나온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4일 개최한 학술대회 ‘성(聖·性)스러운 국민: 국가, 법, 젠더·섹슈얼리티’에서 홍양희 한양대 HK연구교수는 “‘포스트 간통죄’ 시대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간통죄가 근대 형법에서 어떻게 규율되기 시작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간통죄가 대한민국 형법에 제정된 것은 1953년이지만 일제강점기 처음 도입된 것은 1912년 공포된 ‘조선 형사령’이다.
간통죄는 또 며느리와 처를 학대하거나 보복성으로 고소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홍 교수는 “이 같은 문제는 간통죄가 피해자가 고소해야 공소할 수 있는 친고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했다.

○ 처음에는 유부녀만 처벌
간통죄가 친고죄가 된 이유는 “피해자인 남편이 자신의 ‘명예와 이해’를 위해 간통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또 간통죄 도입 당시 처벌 대상은 ‘유부(有夫)의 부(婦)’, 즉 결혼한 여성으로 한정됐다. 남편은 바람을 피워도 혼인의 평화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로 처벌받지 않았다. 기혼 여성의 성을 부권(夫權)의 관점에서 다뤘던 것이다.
간통죄 규정 개정 주장은 도입 초기부터 나온다. 1926년 법 개정을 위한 회의 자료에는 “간통죄를 처벌해 재판 기록을 남기면 자손이 혈통을 의심하게 돼 조상과 자손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처벌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온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950년대 퀴어 장의 변동: 여성혐오의 전이와 동성애의 범죄화’ ‘나라를 위해 죽을 권리: 병역법과 남성적 국민 만들기’ ‘탈식민 국가의 ‘국민’ 경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 ‘내선결혼(內鮮結婚)’ 가족의 법적 지위’ 등의 주제가 발표됐다.
[동아일보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