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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 둘러싼 백성-관원 간 갈등, 살인까지

Bawoo 2015. 12. 10. 18:46

고전번역원, 일성록 정조 代 완역  
조선시대 형사사건들 통해 당대의 생활상 생생히 드러나

“고을에서 환곡을 갚지 않는 양하진의 백성 가족을 저에게 모조리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중략) 용천에 도착하여 허의척과 실랑이가 붙었는데 그때 허의척의 아비가 머리로 저를 받았으므로 제가 철편을 휘둘러서 의도치 않게 머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이 가는 대로 휘두른 일이고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평안도 의주의 포교인 박창일이 관의 지시로 환곡을 독촉하러 갔다가 저항하는 백성을 살해했다는 일성록(日省錄·사진)의 정조 19년(1795년) 9월 7일 기사다. 정조 17년 기사에는 반대로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함봉련이라는 이가 환곡 대신에 소를 빼앗아간 관리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도 실려 있다. 당시 환곡을 둘러싼 백성과 관리 간의 갈등이 극심했음을 알려준다.

일성록은 영조 28년(1752년)부터 1910년 국권을 잃기까지 국정의 제반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1998년부터 일성록 번역을 시작해 올해 정조 대를 완역했다. 최근 열린 기념 학술대회에서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발표문 ‘일성록 소재 형사 사건의 사료적 가치’를 통해 일성록의 형옥(刑獄)에 관한 기사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일성록에는 이미 양반과 상민의 신분제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 기록이 적지 않다.  

“저는 시골의 우매한 백성으로 윤상(倫常)과 명분이 엄격하다는 걸 모르고 며느리를 들이려는 욕심을 냈습니다. (중략) 갈수록 마음이 급해져서 더럽고 추잡한 소문을 냈습니다.”

1795년 경기도 가평에서 돈 많은 상민이 몰락한 양반의 딸을 억지로 며느리로 들이려고 추잡한 소문을 냈는데, 양반의 딸이 수치심에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같은 해 전라도 고부에서 한 상민이 ‘돈 1전 4푼을 훔쳤다’며 양반을 때려 살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상민이 양반을 넘보거나 가난한 양반을 함부로 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성록에는 정조 대 953건, 순조 대 1046건, 헌종 대 377건, 철종 대 477건의 살인사건이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료에는 없고 일성록에만 기록된 것이 많다. 김성재 번역위원은 “일성록에는 사건의 피고와 피해자 가족, 증인 등의 진술이 그대로 담겨 있어 당시 백성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며 “또 범죄를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 심리와 재판, 형조의 법 적용, 대신들의 토의까지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내년 상반기 안에 번역된 일성록 정조 대를 185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