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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의 역사속 한식]해장국

Bawoo 2015. 12. 15. 18:59

 
콩나물해장국. 동아일보DB
 
‘해장국’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나타난다. 술꾼들은 깜짝 놀랄 이야기지만 고려, 조선시대에는 ‘해장국’이 없었다. 해장국은 ‘해정+장국’이다. ‘해정(解정)’은 ‘술을 깨우다’는 뜻이다. 장국은 ‘장갱(醬羹)’,

 즉 된장 등으로 끓인 국이다. ‘술 깨우는, 된장 넣은 국물’이 해장국이다.

해장국의 기원(?)을 고려시대 ‘성주탕(醒酒湯)’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 않다. 통역관 교과서

 

격인 ‘노걸대’에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얼굴 씻고, ‘성주탕’을 먹고, 점심 한 후에 떡 만들고 고기 볶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내용을 보면 성주탕은 해장국이라기보다 ‘약’이다. ‘탕(湯)’은 국물이 아니고 약일 때가 많다. 국물은 ‘갱(羹)’으로 표현했다.

1499년 발간된 우리 고유의 의서 ‘구급이해방’에는 술병(酒病) 치료법이 있다. 과음으로 구토, 손발 떨림, 정신 어지러움, 소변 불편이 나타나면 갈화해정탕을 권한다. ‘갈화(葛花)’는 칡꽃이다. 칡꽃, 인삼, 귤껍질 등 여러 약재를 넣고 달인 물을 먹으면 술병이 낫는다고 했다. 이 치료법의 끝부분은 술꾼들이 새길 만한 내용이다. ‘갈화해정탕은 다 부득이해서 쓰는 것이지, 어찌 이것만을 믿고서 매일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우리 선조들은 해장국을 먹어야 할 정도의 음주는 ‘병’이라 여겼다. 병은 탕(약)으로 다스렸다.

술을 깨게 한다는 ‘성주’는 조선시대 기록에도 자주 나타나지만 해장국, 성주탕이란 표현은 없다. 조선시대까지도 해장국은 없었다. 1.최영년(1856∼1935)의 ‘해동죽지’(1925년)에 나오는 ‘효종갱(曉鐘羹)’을 해장국으로 여기는 것도 틀렸다. 효종갱은, 이른 새벽, 파루 칠 때 남한산성 언저리에서 4대문 안으로 날랐다. ‘프리미엄 국물’이지 해장국은 아니다. 그나마 효종갱은 일제강점기에 나타난다. 

혜원 신윤복(1758∼?)의 풍속도 ‘주사거배(酒肆擧杯)'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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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거배>『 혜원전신첩』종이에 색, 28.2× 35.6㎝, 간송미술관, 국보 135호 

 자그마한 가마솥이 두 개 보인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국물은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었을 것이다. 술국은 술을 마실 때 한두 숟가락 가볍게 마시는 것이다. 된장 푼 물에 마른 멸치, 우거지 등을 넣고 푹 끓인다. 탁주 한두 잔 정도는 신 김치와 술국으로 마시는 게 보편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창업한 해장국집들도 마찬가지. ‘이른 새벽 동소문 밖에서 땔감, 나물 등을 가지고 온 이들이 요기를 했다’고 말한다. 밥상 한 귀퉁이에 술국과 막걸리 한 잔도 곁들였을 것이다.

 
예전의 해장법은 낭만적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이승소는 ‘삼탄집’에서 ‘포도의 효능은 여럿 있지만 술을 깨우는 공로가 가장 크다’고 했다. 고려 문신 이규보의 아들 이름은 ‘삼백’. ‘하루 삼백 잔을 마신다’는 이태백의 시 ‘장진주’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아들이 어린 나이에 술을 마신다. 속이 탄 아버지 이규보는 술의 폐해를 아들에게 일러준다. “술은 창자를 녹게 해 몸을 망친다. 결국 폐인이 되고 남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린다.” 이규보도 과일로 해장을 했다. ‘서왕모에게서 훔쳐온 복숭아로 입맛을 돌게 하거나 술을 깨게 한다’고 했다(동국이상국전집). 

선조들은 바람을 쐬면서 자연스럽게 술을 깨웠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은 “대나무로 지은 방에서 바람 부는 창밖을 본다. 여린 잎의 차를 마시며 술을 깨운다”고 했고(동문선 설매헌부), 다산 정약용도 “찰랑찰랑 물결은 뱃전을 치고 스치는 바람이 술을 깨운다”고 했다(다산시문선). 

 
조선시대 기록에는 ‘성주석(醒酒石)’이 자주 나타난다. ‘술 깨우는 돌’이다. 이 돌의 주인은 당나라의 이덕유다. 그는 평천장이라는 대저택을 짓고 각종 나무, 꽃, 돌 등을 옮겨 두었다. 그중 이덕유가 가장 아꼈던 것이 바로 성주석이다. 술에 취하면 늘 이 돌에 앉아서 술을 깨우곤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해장’과 ‘해정’이 혼용된다. 총독부 관리가 만취, 종업원 폭행으로 용산서에 연행된다. 동아일보(1926년 9월 12일자) 기사는 총독부 관리가 ‘해장국’도 못 얻어먹고 총독부 차량을 타고 빠져나갔다고 조롱한다. 1938년 3월 12일자 기사에는 모범농촌 건설을 위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시고, 남에게 무작정 시비를 거는 해정술’을 금해야 한다는 내용도 나온다. 해장술에 취하면 위아래 못 알아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동아일보 - 황광해 음식평론가]

 

[참고 자료]

1. 최영년(崔永年, 1859년 음력 2월 6일 ~ 1935년 양력 8월 29일)은 대한제국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다.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신소설 작가 최찬식의 아버지이다. 필명으로 매하산인(賣下山人, 梅下山人), 매하생(梅下生)을 썼다.

생애

1894년 경기도 광주에 사립 시흥학교를 설립하고 독립협회의 활동에 참여한 개화파 출신이다.

1907년 일진회 회원이 되면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활발해진 의병 항쟁 탄압을 위한 〈거의선언서(擧義宣言書)〉 발표에 동참하는 등 친일파로 활동했다. 일진회 이름으로 발표된 〈거의선언서〉는 의병 운동을 계속하면 살육하겠다는 협박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특히 최영년은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이들의 운동을 암매(闇妹)하다고 비하한 〈경고지방폭도문(警告地方暴徒文)〉을 직접 작성해 반포하기도 했다

 

1909년에는 송병준 계열의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제4대 사장에 임명되었다. 일진회 기관지 격인 국민신보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일진회의 병합 청원 운동을 지원하는 논설을 실어 《대한매일신보》로부터 “난적배”로 지칭되던 친일 매체였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이때 송병준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한석진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최익현의 7촌 조카를 자처하는 최영년을 사장에 앉혔으며, 한학에 밝고 글재주가 뛰어난 최영년이 각 기관에 보내는 병합 청원 취지의 글을 도말아 작성하여 “침 뱉으며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만큼 많은 비난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최영년은 국민신보 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일진회 정견협정위원을 지내고 이토 히로부미 추도를 위한 단체에 참가했으며, 일진회의 건의서 작성에도 가담했다. 1910년에는 이용구 계열의 친일단체인 대한상무조합 본부장에 임명되었고, 1912년 한일 병합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7년 《조선문예》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메이지 천황 부인인 하루코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이 잡지에 싣는 등 문필을 이용한 친일 활동을 계속했다. 일본의 통치가 시작된 뒤 “문명의 기상이 증진하고 승평의 광휘가 발양되었다.”라고 평가하거나 요순 시대에 비유하는 등 일제 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비롯하여, 일제 하의 조선 민중을 “태평성대 태평한 사람들”로 묘사한 한시를 창작해 발표했다.

 

1919년 경 유교 계열의 친일 단체인 대동사문회 발기인과 이사를 지냈고, 1930년에는 역시 유교계열 친일 단체로 김종한이 원장을 맡은 대성원(大聖院) 강사장에 임명되었다.

최영년은 1910년 한일 병합 전에 이미 아들 4형제와 그 친구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지어줄 만큼 앞서가는 친일 행적을 보여 “도적보다 더 흉악한 영년같은 저 흉적은 천하만국 역사상에 전무후무 하리로다.”라는 적나라한 비난이 《대한매일신보》 평론란에 실릴 정도였다. 1926년 《조선어》라는 잡지를 통해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어를 배울 것을 강권하는 글을 발표한 바도 있다.

사후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2002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