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송년회는 대부분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난다. 조선시대 술꾼들이 부러워할 이야기다.
예전에도 ‘험난하게’ 술을 마셨던 술꾼들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백 번 금주령이 내려진다. 대부분 곡식을 아끼고자 시행되었다. “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열 사람이 굶는다”는 이야기다. 상당수의 금주령은 상징적인 조처였다. 국상이 나거나 가뭄 등 천재지변이 심할 때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렸다. 형식적일 때도 있었다. 엄할 때도 있었다.
술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영조는 술꾼들을 찾아내려고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아무리 막아도
술을 마실 방법은 있다. 금주령을 무릅쓰고 명성을 휘날린 술꾼들도 적잖다.
성종 때 문신 손순효는 ‘술잔 늘이기’로 유명하다. 늘 만취에 사고뭉치였지만 그의 재주를 아낀 성종이 특별히 술잔을 내려주며 “이 술잔으로 하루 세 잔만 마시라”고 했다. 어느 날 또 그가 만취상태로 나타났다. 성종이 “왜 술을 정해준 것보다 많이 마시고 나타났느냐?”고 꾸짖었더니 얇고 크게 편 술잔을 보여주며 “전하가 주신 잔에 조금도 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나.
숙종 때 대제학 오도일은 술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여러 번 ‘음주사고’를 쳤지만 숙종은 술꾼 오도일에게 관대했다. 작은 사고를 묵인하면 대형사고가 터진다. 기우제에서 술을 올리는 작주관을 맡았던 오도일이 술에 취해 음복주를 발로 걷어차서 쏟았다. 오도일은 전라도 장성으로 유배 갔고 6년 뒤 유배지에서 죽었다.
‘호주가 오도일’의 이름은 그로부터 몇 대를 건너서 다시 나타난다. 정조 때 오도일의 손자인 태증이 성균관 제술 시험에 합격해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만난다. 합격자들을 위한 질펀한 술자리다. 정조의 술자리 ‘룰’은 “취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는다” 즉, ‘불취무귀(不醉無歸)’였다.
피가 술보다 진한지, 술이 피보다 진한지는 알 수 없다. 손자 태증의 술도 할아버지를 닮았다. 기록에는 “오태증의 집안이 대대로 술을 잘 마셨다. 태증이 이미 5잔을 마셨는데 전혀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정조는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잔을 더 권하라”고 한다. 끝내 오태증이 술을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자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손자인 태증이 취하여 쓰러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별감이 업고 나가라”고 명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6년 3월 2일의 기록이다.
영조시대는 ‘술꾼들의 암흑기’였다. 중국 사신의 접대나 종묘 제사에도 술 대신 단술(감주)을 내놓게 했다. 금주령을 어긴 사람에게 “조상의 제사에는 감주를 사용하고 너는 술을 퍼 마시느냐?”고 질책했다. 남병사 윤구연은 숙소에 두었던 술독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금주령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영조는 윤구연의 처형장인 남대문에 직접 나타난다. 영의정 신만을 비롯하여 삼정승이 윤구연을 구명하려다 동시에 파면된다. 윤구연에 대한 벌이 과하다고 했던 이들도 좌천되거나 벼슬을 잃었다.
금주령이 느슨해진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는 술 마시는 이야기를 시로 썼다(‘청장관전서’). 그는 시에서 술꾼들의 과장된 꿈을 제대로 보여준다. 제목부터 대단하다. “백년, 삼만 육천일, 반드시, 매일 3백 잔을 기울이다”다. 이 시의 마지막은 더 대단하다. “백천만겁 동안 그릇 굽는 곳의 흙이 되어, 영원히 술잔, 술병, 옹기가 되리라”고 했다.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술잔, 술병, 옹기처럼 일평생 술을 품고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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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윤구연(尹九淵)
1750년(영조 26) 도목정사(都目政事)의 결과,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충청병사(忠淸兵使)‧남병사(南兵使) 등의 직책을 맡았다. 1762년(영조 38)에 대사헌(大司憲) 남태회(南泰會)가 윤구연(尹九淵)이 금주령을 어기고 매일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는 상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는 비답을 내렸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선전관(宣傳官) 조성(趙峸)이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발견했고, 영조는 크게 노하여 직접 숭례문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수하였다. 술 항아리가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윤구연의 참수를 두고 세간에서 억울하게 여겼다. 이후 1774년(영조 50) 영조는 윤구연에게 다시 직첩(職牒)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렸다. 성대중(成大中)이 집필한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윤구연의 점괘는 삼남에 죽을 것(死於三南)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가 삼남 지방의 관직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남병사(南兵使)로 부임하여 남태회(南泰會)의 상소에 의해서 남대문(南大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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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효( 孫舜孝/1427~1497)
본관은 평해. 자는 경보, 호는 물재·칠휴거사. 아버지는 군수 밀이다.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1457년(세조 3)에는 감찰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병조좌랑·형조정랑·집의·전한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시무책 17조를 상소하여 채택되었으며, 그 공으로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를 저질렀다 하여 무관직인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뒤에 다시 문관직인 장례원판결사로 복귀하여 동부승지·도승지·강원도관찰사·호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위하려 할 때 반대했다. 1480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기도관찰사·대사헌·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변론한 것이 화가 되어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곧 우찬성으로 복직되었으며, 이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여 〈대학〉·〈중용〉·〈주역〉에 정통했으며, 묵화에도 능했다.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식료찬요 食療撰要〉를 편찬했다. 저서로는 〈물재집 勿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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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일(吳道一)
1. 생몰 1645(인조 23)~1703(숙종 29).
2. 급제 -28세 1673년(현종 14)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2(乙科2)
3. 암행어사 연보 - 36세 1681년(숙종 7) 암행 어사 안후태·김두명·이사영·오도일 등을 보내 각 고을을 염문케 하다 - 36세 1681년(숙종 7) 전라도 암행 어사 오도일 복명하여 선치한 진안 현감 이의징과 용담 현령 심익상을 포상케 하다
4. 관련 기록 ≪숙종 011 07/01/14(무진). 암행 어사 안후태·김두명·이사영·오도일 등을 보내 각 고을을 염문케 하다≫ 암행 어사(暗行御史) 안후태(安後泰)·김두명(金斗明)·이사영(李思永)·오도일(吳道一)·이언강(李彦綱)·목임일(睦林一) 등을 나누어 보내어 각 고을을 염문(廉問)하게 하였다. 처음에 이홍적(李弘迪)이 어사(御史)에 뽑혔는데, 임금이 병든 어미와 80세가 된 조부(祖父)가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정리(情理)를 딱하게 여겨 특별히 체직(遞職)하고, 안후태(安後泰)를 대신 삼도록 하였었다.
비국(備局)에서 으레 주는 절목(節目) 외에 거듭 조목(條目)을 더하여 아뢰기를, “감사(監司)로서 자신을 단속하여 간결(簡潔)하게 하지 아니하고 출척(黜陟)을 공정(公正)하게 하지 아니한 자, 곤수(?帥)로서 군졸(軍卒)을 침학(侵虐)하여 자신을 살찌게 한 자, 문인(文人)·무인(武人)으로서 재주가 침체(沈滯)되어 떨치지 못하였거나 일반 여론이 억울하다고 일컫는 자를 아울러 염문(廉問)하도록 하소서.
도내(道內)에 윤리(倫理)를 업신여기고 상도(常道)에 어긋나고 민속(民俗)을 무너뜨리는 자, 외언(訛言)을 지어 퍼뜨려서 백성을 미혹시키고 어지럽히는 자, 위협해서 내몰아 사사로이 민력(民力)을 역사(役使)시킨 자를 아울러 조사하고 적발(摘發)하여 가두고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수령(守令)으로서 인륜(人倫)의 대죄(大罪)를 덮어 두고 옥사(獄事)를 성립시키지 아니한 자, 억울한 옥사를 신리(伸理)하지 못하게 한 자를 아울러 모두 구근(久近)과 생사(生死)를 논하지 말고 방문(訪問)하게 하소서.
수년 동안 체옥(滯獄)된 것을 관리로서 서로 추위하여 오랫동안 처결(處決)하지 아니한 자, 토호(土豪)로서 농장(農庄)을 넓게 점유(占有)하고 전결(田結)을 속여 숨겼거나 양녀(良女)를 겁탈(?奪)하여 노처(奴妻)를 삼았거나 인호(人戶)를 불러 울타리아래에 인접(隣接)해 두고 재물로 사사로이 역사(役使)시키는 자, 양호(養戶)의 폐단은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여 민결(民結)을 호수(戶首)가 혼자 많이 점유하고 그 요역(徭役)을 헤아려 갑절이나 징수(徵收)하지만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면서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관(官)에 고하지 못하는 자, 완악(頑惡)한 향리(鄕吏)로서 공관(公館)을 속이고 백성을 해롭게 하면서 횡포(橫暴)하여 스스로 방자한 자, 영리(營吏)와 읍리(邑吏)로서 진상(進上)하는 물건을 방납(防納)하고 후한 이익(利益)을 거두어들인 자, 주현(州縣)의 장관(將官)과 색리(色吏)로서 군병(軍兵)을 토색(討索)한 자를 아울러 엄히 징치(懲治)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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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李晳] 백이(白而), 장정(莊靖)
1603(선조 36)∼1685(숙종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이(白而). 장천정(長川正) 윤(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인(壽獜)이고, 아버지는 응순(應順)이며, 어머니는 판관 상시손(尙蓍孫)의 딸이다.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고, 1637년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의 좌랑을 지냈다. 이듬해 은산현감, 1641년 사간원정언을 거치고,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심양(瀋陽)을 다녀왔다. 이듬해 경차관(敬差官)으로 영남의 재해를 조사하였다.
1644년 평안도도사, 이듬해 세자시강원필선, 1646년 사간원헌납, 1649년 성균관직강을 지내고,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 김홍욱(金弘郁)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의 죄를 가장 먼저 논하였다. 1650년(효종 1) 사헌부집의로 김여수(金汝水)의 탐장(貪贓)을 논하였고, 1656년 동부승지·공조참의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행(燕行)하였다.
이듬해 여주목사로 나가 요무(妖巫)가 함부로 부중(府中)을 출입하면서 음사(淫祀)를 행하므로 그를 장살하여 그 폐단을 없앴다. 1667년(현종 8) 홍주목사, 이듬해 양양부사, 이후 첨지중추·공조참의·동지중추 등을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호조참판, 1682년 지돈녕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장정(莊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