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어회
조선시대 내내 사대부들의 머릿속에는 늘 농어회가 살아 있었다. 그들은 ‘순갱노회(蓴羹(노,로)膾)’를 그리워했다. ‘순갱노회’의 주인공은 장한이다. 제(齊)나라에서 벼슬살이(동조연)를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채국(蓴羹·순갱)과 농어회((노,로)魚膾·노어회)가 그립다”고 고향인 강동 오군(吳郡)으로 돌아갔다. 세속의 영화로움 대신 순채국과 농어회를 택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장한의 농어회’를 그리워한다. ‘농어회’는 그들에게 ‘핫 아이템’이자 ‘스테디셀러’였다.
조선 중기의 양명학자 계곡 장유는 “외로운 학 울음소리에 나그네 꿈 깨고 보니, 주방에서 큰 농어로 회를 뜬다네. 평생토록 장한의 흥취를 그리워했으니 지금 곧장 노 저어 동오(東吳)로 갈거나”라고 했다. ‘오군 출신 장한의 농어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할 꿈을 시를 통해 펼쳤다.
회는 시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상민부터 궁중까지 두루 회를 접했다. 먼 바다의 큰 생선은 구하기 힘들었으니 민물고기나 근해의 바다생선들이 횟감으로 널리 쓰였다. 오히려 구중궁궐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만나는 것은 힘들었다. 궁중은 사옹원 관리 아래 위어소(葦魚所), 소어소(蘇魚所)를 두었다. 소어는 밴댕이, 위어는 웅어라고도 불리는 생선이다. 예나지금이나 밴댕이 소갈딱지다. 쉬 상한다. 결국 싱싱한 회는 위어다. 위어는 강화도, 고양, 행주산성 언저리 등 서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혔다. 한양 도성과 멀지 않으니 얼음을 이용하여 궁궐까지 직송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위어소가 사용하는 얼음의 관리, 위어소 근무자들 급료, 병역, 세금 문제 등이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중종 11년(1516년) 6월에는 ‘난지포의 위어 등 생선을 잡을 권리’를 두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상소를 올린 이는 중종 옹립 반정 공신 박원종의 처 윤씨다. “난지포에서 위어를 잡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 없이 궁중 사옹원에서 그 권리를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사옹원에서 반론한다. “난지포 일대 생선을 잡을 권리는 성종 당시 월산대군에게 주었다. 그 후 박원종에게 권리가 넘어갔으나 지금은 월산대군, 박원종 모두 세상을 떠났다. 궁중에서 돌려받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중종은 윤씨의 손을 들어준다. “궁중에서 필요한 위어는 김포, 통진, 교하, 양천 일대에서 구할 수 있는데 굳이 개인이 취하고 있는 권리를 빼앗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었다. 위어는 소중한 생선이었다.
단천 사는 김택기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김택기는 낚시, 그물질을 통하여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버지에게 황어회를 올린다(일성록·정조 13년). 강릉의 벼슬아치 이성무의 노모는 79세였다. 이성무의 형제들이 잉어회를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강가의 얼음을 깼더니 잉어 한 마리가 스스로 뛰어나왔다(세종실록 13년 6월). 조선시대에는 붕어, 피라미부터 고래까지 다양한 회를 먹었다. 고래는 국내에서도 먹었고 일본에 갔던 사신들도 먹었다. 회는 민간부터 궁궐까지 모두 먹었다. 궁중 제사상에도 어회, 육회, 전복회 등이 등장한다.
음식은 맛과 더불어 멋으로도 먹는다.
[동아일보 -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