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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Bawoo 2015. 6. 15. 21:38

 

다산 정약용 선생 -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是唯洌水丁鏞之墓也

(이는 열수[한강의 별칭] 정용의 묘이다.)

 

本名曰若鏞。字曰美庸。號曰俟菴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父諱載遠。蔭仕至晉州牧使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母淑人海南尹氏。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주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幼而穎悟。長而好學。

(용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二十二以經義爲進士。專治儷文。二十八中甲科第二人。

(22세(1783, 정조 7)에 경의經義[과문 육체科文六體의 하나]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에 갑과甲科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大臣選啓。隷奎章閣月課文臣。旋入翰林。爲藝文館檢閱。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出而爲京畿暗行御史。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課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使가 되었다. )

 

乙卯春。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由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由右副至左副承旨。爲兵曹參議。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上號都監郞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嘉慶丁巳。出爲谷山都護使。多惠政。

(가경嘉慶[청 인종淸仁宗의 연호]정사년(1797, 정조 21)에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己未復入爲承旨,刑曹參議。理冤獄。

(기미년(1799, 정조 23)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

 

庚申六月。蒙賜漢書選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是月正宗大王薨。於是乎禍作矣。

(이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十五娶豐山洪氏。武承旨和輔女也。

(15세(1776, 영조 52)에 풍산 홍씨豐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旣娶游京師。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從李家煥,李承薰等得見其遺書.自此留心經籍。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 선생 익李先生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旣上庠。從李檗游。聞西敎見西書。

(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丁未以後四五年。頗傾心焉。辛亥以來。邦禁嚴遂絶意。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

 

乙卯夏蘇州人周文謨來。邦內洶洶。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

 

出補金井察訪。受旨誘戢。

(이에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辛酉春。臺臣閔命赫等。以西敎事發啓。與李家煥,李承薰等下獄。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西敎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

 

旣而二兄若銓,若鍾皆被逮。一死二生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한 명은 죽고 두 명은 살았다.)

 

諸大臣議白放。唯徐龍輔執不可。鏞配長鬐縣。銓配薪智島。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定配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秋逆賊黃嗣永就捕。惡人洪羲運李基慶等謀殺鏞。百計得朝旨。鏞與銓又被逮按事。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조정의 뜻]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無與知狀。獄又不成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蒙太酌處。鏞配康津縣。銓配黑山島。

(태비太의 작처酌處[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함]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癸亥冬。太妃命放鏞。相臣徐龍輔止之。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그를 저지하였다.)

 

庚午秋。男學淵鳴冤。命放逐鄕里。因有當時臺啓。禁府格之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冤[원통함을 호소함]으로 방축 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後九年戊寅秋。始還鄕里。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己卯冬。朝議欲復用鏞以安民。徐龍輔又沮之。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鏞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鏞在謫十有八年。專心經典。所著詩書禮樂易春秋及四書諸說共二百三十卷。精研妙悟。多得古聖人本旨。詩文所編共七十卷。多在朝時作。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

 

雜纂國家典章及牧民按獄武備疆域之事醫藥文字之辨。殆二百卷。皆本諸聖經而務適時宜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ㆍ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不泯則或有取之者矣。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鏞以布衣。結人主之知。正宗大王寵愛嘉獎。踰於同列。
(내가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前後受賞賜書籍廏馬文皮及珍異諸物。不可勝記。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ㆍ문피文皮 [호표虎豹의 가죽]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

 

與聞機密。許有懷以筆札條陳。皆立賜允從。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陳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常在奎瀛府校書。不以職事督過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

 

每夜賜珍饌以飫之。凡內府祕籍。許因閣監請見。皆異數也。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其爲人也。樂善好古而果於行爲。卒以此取禍命也。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夫平生罪孼極多。尤悔積於中。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

 

至於今年。曰重逢壬午。世之所謂回甲。如再生然。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遂滌除閑務。蚤夜省察。以復乎天命之性。自今至死。庶弗畔矣。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夫丁氏本貫押海。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高麗之末。居白川。我朝定鼎。遂居漢陽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始仕之祖。校理子伋。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自玆繩承。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亨,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觀察使好善,校理彦璧,兵曹參議時潤。皆入玉堂。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自玆時否。徙居馬峴。三世皆以布衣終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高祖諱道泰,曾祖諱恒愼,祖父諱志諧。唯曾祖爲進士也。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洪氏產六男三女夭者三之二。唯二男一女成立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男曰學淵,學游。女適尹昌謨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卜兆于家園之北子坐之原。尙能如願。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銘曰
명銘은 다음과 같다.

荷主之寵 / 임금의 총애 입어
入居宥密 / 근밀近密에 들어갔네 
爲之腹心 / 임금의 복심腹心 되어

朝夕以昵 / 조석으로 모셨도다
荷天之寵 / 하늘의 총애 입어 
牖其愚衷 /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精硏六經 /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妙解微通 /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憸人旣張 / 소인이 치성해지니 

天用玉汝 /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斂而藏之 / 거두어 간직하고

將用矯矯然遐擧 / 장차 훨훨 노니련다.

 

출전 : 『정약용』「다산시문집」'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註)

1. 여문 : 변려문騈儷文의 약칭. 수사修辭하는 데 4자와 6자의 대구對句를 많이 쓰고 음조音調를 맞추며 고사를 많이 쓰는 한문체漢文體의 한 가지. 과문科文에 주로 이 문체를 썼다.

 

2.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 : 경모궁景慕宮은 정조正祖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 즉 장조莊祖의 궁호宮號임. 정조 19년(1795)에 장조의 궁호宮號를 내려주고,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였다.

 

3. 화禍가 일어났다 :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함으로써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는 정조 때 눌려지내던 벽파僻派와 손을 잡고 시파時派를 숙청하였는데, 시파로서 천주교와 관련되어 다산茶山 형제와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배 또는 사형되었다.

 

4. 상상上庠 : 태학太學을 말하는 것으로 곧 성균관成均館이다. 다산은 여기에 들어와 공부할 때 이벽을 만났다.

 

5. 발계發啓 : 임금이 재가한, 또는 의금부에서 처결한 죄인에 대하여 미심未審할 때에 사간원ㆍ사헌부에서 죄명을 갖추어서 아뢰는 일.

 

6. 두 형......살았다 : 천주교 금법에 연루되어 형인 약전ㆍ약종과 함께 체포되어 정약종은 처형되고 약전과 다산은 정배되었다.

 

7. 태비太妃 :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 본관은 경주慶州. 김한구金漢耈의 딸이고, 벽파僻派의 영수 김귀주金龜柱의 누이다. 정조의 승하로 11세인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하였다.

 

8. 대계臺啓 :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유죄로 인정하여 올리는 계사啓辭.

 

9. 자좌오향子坐午向 : 자방子方을 등지고 오방午方을 말함. 곧 정남방으로 앉음.

 

10. 훨훨 노니련다遐擧 : 고상한 행동의 비유.

 

* 출처;http://blog.daum.net/dark-n-light/614


 

번역문

 

이것은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이다. 아버지 성함은 재원(載遠)이며, 음직<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祖上)의 공덕 등으로 얻은 벼슬>으로 진주 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숙인<조선시대 당하관 정33품인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해남 윤씨(海南 尹氏)인데 영종 임오년(1762, 영조 38) 616일에 열수(洌水)<한강의 별칭> 강가 마현리에서 약용을 낳았다.

약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22(1783, 정조 7)에 초시에 이어 회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뒤 변려문<대과시험 문체>을 오로지 연마해 28(1789, 정조 13)에 갑과 2등으로 급제했다. 대신들의 선발에 의해 규장각에 배속돼 월과문신(月課文臣)<매달 내려 받은 과제에 따라 쓴 글로 시험받는 문신>으로 있었다. 얼마 안가 한림원에 뽑혀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어 승진해서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 성균관 직강, 비변사 낭관을 지냈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경모궁<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에 시호를 올리는 도감의 낭관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사간으로 발탁된 뒤 통정대부로서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다. 또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가경(嘉慶)<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정사년(1797, 정조 21)에 곡산 도호부사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치를 많이 베풀었다. 기미년(1799, 정조 23)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돼 억울한 옥사를 처리했다.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임금으로부터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종대왕<정조>이 승하하시니 이에 양화가 일어났다.

15(1776, 영조 52)에 풍산 홍씨(豐山 洪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무과를 통해 승지 벼슬을 지낸 홍화보의 딸이다. 장가든 뒤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이 순수하고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가환(李家煥)<이익의 종손자이면서 이승훈의 외삼촌>이승훈(李承薰)<정약용의 매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등을 따라 성호 선생이 남긴 저술을 보게 돼 이때부터 경학의 서적에 마음을 두게 됐다.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간 뒤 이벽(李檗)<맏형 정약현의 처남, 청나라에서 유입된 천주교 서적을 보고 스스로 교인이 됨>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책을 보았다.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서교에 대한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들어와 나라 안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돼 나가 왕명을 받들어 서교에 젖은 지방민들을 달래고 단속했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을 빌미로 임금께 조사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이가환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됐다. 얼마 뒤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함께 체포돼 한 사람<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함>은 죽고 둘<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살아 남았다. 모든 대신들이 무죄로 판명돼 풀어주자는 주장했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워 약용은 장기현으로, 약전은 신지도로 각각 유배됐다.

(그 해)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약용을 죽이려고 모의해 임금의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약용과 약전은 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이뤄지지 않았다. 태비(太妃)<영조의 계비이자 사도세자의 계모인 정순왕후>께서 감안하여 처분해주시는 바람에 약용은 강진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약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셨지만, 정승 서용보가 이를 막았다.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고향으로 쫓아 보내라고 명하였으나, 당시 사헌부에서 죄가 여전히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의금부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묘년(1819, 순조 19) 겨울에 조정에서 다시 약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했다.

약용은 유배돼 있던 18년 동안 경전 연구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에 관한 저술이 모두 230권이다.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우쳐 성인이 말씀하신 근본적 뜻을 제대로 파악했다. 시문집으로 엮은 것이 모두 70권인데 조정에 있을 때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하는 일, 옥사를 다스리는 일, 무력을 갖춰 방비하는 일, 국토의 강역에 관한 일, 의약에 관한 사항, 문자의 분석 등에 관해 편찬한 것이 거의 200권이다. 모두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면서, 시의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더러 인용해서 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약용은 벼슬하기 전부터 임금께서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정종대왕께서 총애하고 예뻐하고 칭찬하신 것이 동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간 하사해주신 책, , 호랑이 가죽, 그리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하도 많아서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국가 기밀에 참여할 때 의견이 있으면 글로 적어 진술하도록 허락하시어, 모두 들어주시고 따르겠다고 하셨다. 일찍이 규장각에서 서적을 교정할 때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맛있는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게 해주셨다. 궁중 안에 비장돼 있는 모든 책을 규장각의 감독을 통해 언제든지 열람을 청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모두가 남다른 대우였다.

약용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과감히 실천하고 행동했다.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마음 속에 원망과 후회가 가득 쌓였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말하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마침내 긴요치 않은 일을 씻어버린 뒤 밤낮으로 자기성찰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회복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어그러짐이 없길 바란다.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선왕조가 열린 이후 마침내 서울에서 살았다. 처음 벼슬한 조상은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판서를 지낸 옥형(玉亨),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 교리를 지낸 언벽(彦璧),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이 모두 홍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절의 운수가 안맞아 마현으로 옮겨 살았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 3대 모두 벼슬을 지내지 않고 돌아가셨다. 고조의 성함은 도태(道泰), 증조의 성함은 항신(恒愼), 조부의 성함은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부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아내 홍씨는 63녀를 낳았는데 6명이 요절하고 오직 21녀만 제대로 컸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시집갔다. 약용의 무덤은 집 뒤란에 있는 자좌의 언덕으로 정했다. 부디 바라던 대로 되었으면 한다. ()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 한 몸에 안고 / 荷主之寵

궁궐에 들어가 곁에서 모셨네 / 入居宥密

임금의 심복이 되어 / 爲之腹心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 朝夕以昵

하늘의 총애 한 몸에 받아 / 荷天之寵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쳤네 / 牖其愚衷

육경(六經)을 정밀하게 연구해 / 精硏六經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네 / 妙解微通

간사한 무리들이 기세를 떨쳤지만 / 憸人旣張

하늘이 너를 사랑해 쓰셨으니 / 天用玉汝

잘 거두어 간직하면 / 斂而藏之

장차 멀리까지 날래고 사납게 떨치리라 /將用矯矯然遐擧

 

<출전: 여유당전서 시문집 제16>

 

해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 그는 엄청난 글쟁이였다. 자찬묘지명 집중본에서 경집 232권과 문집 260여권 등을 열거했다. 이중 ‘12로 불리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우리는 주로 기억한다. 정작 다산 자신이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솔직한 속내는 그가 남긴 묘지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본이 된 자찬묘지명

다산은 자신의 자찬묘지명(집중본과 광중본 2)을 포함해 29명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 29(묘표 포함)을 지었다. 이 가운데 자신과 그의 형 정약전, 이기양, 이가환, 권철신, 오석충 등 6명의 묘지명 7편만 따로 수사본(手寫本: 손으로 베껴 쓴 책)에 모은 뒤 문집 표지에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는 의미로 비본(秘本)’이라고 써놓았다.

 

그의 사후 50여년 뒤인 1885년 고종이 다산의 명성을 듣고 친히 어람본 여유당전서를 만들도록 지시했을 때 그의 후손들은 비본으로 남겨진 묘지명 7편만은 제외시켰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빠진 7편의 묘지명에 어떤 내용을 담았길래 그 자신도, 후손들도 이토록 몸을 사린 것일까.

 

7편 묘지명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살피면 의문은 쉽게 풀린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을 비롯해 이가환 이기양 등 6명은 모두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기록된 1801년 천주교 박해 때 감옥 또는 유배지에서 죽거나 유배를 산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개혁군주 정조 재위 때 총애를 받은 남인계 관료들로, 그 중에서도 성호 좌파(星湖 左派)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조선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성호 이익(李瀷) 선생의 학풍을 따르는 문하 중 천주교와 서학의 수용에 개방적이어서 신서파(信西派)라고도 불린다.

 

1800년 정조 사후 재집권한 노론 벽파(僻派)는 정국 물갈이를 위해 천주교 박해 카드를 꺼내들어 신서파에 대한 대대적 공격에 나선다. 이때 저격수를 자처하고 나선 이들이 같은 남인이지만 천주교에 수용에 반대했던 공서파(功西派). 다산이 악인이라고 칭했던 홍희운(홍낙안의 다른 이름) 이기경 목만중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공서파는 다산을 비롯한 신서파를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교(邪敎)집단으로 규정, 극형으로 몰아간다. 실제 이 과정에서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중사하고 이기양과 오석충은 유배지에서 얼마 뒤 사망한다. 다산의 두 형제만 극형을 면하고 다시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렇게 시작된 다산의 강진 유배는 18년간이나 계속된다.

 

그러나 형 정약전마저 유배 16년 만에 배소에서 눈을 감는다. 다산은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결국 신유박해 때 연루된 신서파 중 다산만 유일하게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증언, 변론, 사료로서의 묘지명 쓰기

곰곰이 생각할수록 다산은 억울했다. 자신을 비롯해 신서파 동지들이 이토록 수난을 당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죄목이 된 천주교와 관련, 한때 관심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정말 신자로서 신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공은 평생 동안 서서(西書: 천주교 서적)를 한 자도 보지 않았다”(이기양 묘지명) “공의 여러 차례의 소계(疏啓)와 옥중에서 한 말을 보면 서교(천주교)를 극구 배척하였으니 가령 공이 진실로 서교를 믿었다 할지라도 죽어도 신심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못되는데 어찌 괴수가 될 수 있겠는가.”(이가환 묘지명) “서교를 믿지 않았다”(권철신 묘지명) “서교의 설을 듣고 좋아했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고 신해년(1791)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했다”(정약전 묘지명)

 

하지만 이런 항변은 당시 집권세력에겐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것인가. 다산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당장은 정치적 패배자이지만, 향후 역사에서도 똑같이 취급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산은 붓을 들어 자신은 물론 먼저 간 형님과 동지들의 삶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도가 아닌 증언으로서, 정치적 신원(伸寃)을 위한 변론으로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사료로서 말이다.

 

7편의 비본 묘지명을 통해 자신과 동지들의 결백과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만큼 이야기 서술 형식은 상당히 비슷하다. 다산과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비교평전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을 쓴 고미숙은 다산 묘지명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탁월한 능력과 인품, 정조대왕의 지극한 총애, 간신들 혹은 적당들의 모함, 박해와 수난, 이것이 다산묘지명의 공통적 서사구조다.(중략) 영웅과 소인, 왕과 간신, 적과 나, 선과 악의 선명한 이분법을 구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중략) 다산은 증언과 복권에 초점을 두었다,”

 

자찬묘지명은 그가 쓴 비본 묘지명의 공통 서사구조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먼저 뛰어난 재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하던 일을 자랑스레 회고한다. 특히 정종대왕께서 총애하고 예뻐하고 칭찬하신 것이 동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면서 하사받은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하도 많아서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라고 임금의 총애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그런 임금이 승하하자 간신들의 모함이 시작되고 이로 인해 박해와 수난을 당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다. 이 대목에서 자신이 뒤집어 쓴 혐의에 대해 분명하게 반박한다. “이벽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책을 보았다. 정미년(1787)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서교에 대한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고 말이다.

 

이벽은 큰 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청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읽은 뒤 감화돼 스스로 신자가 된 인물. 그는 친구 동료들에게 천주교 지식을 전파해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발아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다산 역시 믿고 따랐던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 관련 서적을 소개받고 빠져든다. 그러나 다산은 천주교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지는 않았다. 정조 재위 때 천주교 관련설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소가 잇따르자 쓴 반박 상소문에서 천주교 서적에 관심을 둔 두 가지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하나는 천문 농경 측량 등에 대한 서양 과학 기술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를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유학의 한 별파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고미숙은 다산의 이런 태도를 격의종교, 또는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이라고 이해한다.

 

천주교와 어정쩡한 관계를 맺고 있던 다산이 아예 연을 끊은 것은 1791년 발생한 이른바 진산사건때문이었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이 천주교리에 따라 부모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는 불사르고 위패를 파묻은 사건이 발생했던 것. 효를 인간의 근본적 윤리로 규정하고 조상의 제사와 신위를 효행 실천의 기본 행위로 인식하던 당시의 사대부가 받은 충격은 실로 컸다. 다산 또한 그랬던 모양이다. 특히 윤지충은 그의 외종 육촌이어서 다산으로선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천주교와 선을 긋고 있던 다산의 아버지는 정재원은 아들들에게 확실히 천주교와 멀리하도록 다시금 명한다. 다산과 정약전은 이를 철저히 따른다.

 

하지만 다산의 바로 위, 셋째 형 정약종은 다른 길을 간다. 다산보다 뒤 늦게 접했지만 천주교에 급속히 빠져들었던 탓이다. 한자를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 한글로 주교요지라는 교리서를 쓸 정도로 열혈한 신자가 돼 있었다. 아버지의 엄명이 있자 그는 자신의 가족만 솔가해 고향을 떠나면서까지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간다. 신유사옥이 발생하자 그는 스스로 의금부에 잡혀간다. 국문과정에서 형 정약전과 동생 다산은 천주교인이 아님을 증언하는 한편 당당하게 순교한다.

 

천주교와의 절연

다산이 함께 신유옥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바로 위의 형인 정약종의 묘지명을 쓰지 않은 이유도 형이 진실한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역으로 다산은 형과는 달리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실제 다산은 이때 순교한 제매 이승훈과 큰 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의 묘지명도 짓지 않았다.

 

이처럼 다산이 천주교와의 관계를 반박하고 확실히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적당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산과 정약전은 극형을 용케 면하고 유배형에 처해지지만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자 유배지에서 끌려와 다시 국문장에 선다. 이때 악인 홍희운 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다산은 증언한다. 여기서도 다산과 정약전은 살아나온다. 대신 다산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더 멀리 유배길에 오른다.

 

무려 18년 동안의 다산 유배기간 중 몇 차례 해배(解配)의 기회가 찾아오지만 집권 노론세력은 번번이 이를 가로 막는다. 이때 얼마나 상심이 컸었을까. 정작 다산보다 더 실망한 사람은 정약전이었다. 간만에 전해들은 동생의 해배 소문을 듣고 조금이라도 빨리 동생을 보려고 흑산도에서 이웃 섬 우이도로 옮겨 이제나 저제나 설레었던 정약전은 해배가 좌절되자 상심한 나머지 유배생활 16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의 죽음을 통곡한다. “오호라! 현자가 그토록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그 원통한 죽음 앞에 목석도 눈물을 흘릴 텐데 다시 말해 무엇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손암(정약전의 호)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가 되어 주셨는데 이제 그 분마저 잃었구나.”

 

실제 다산은 강진에서 한 권의 저작이 마무리될 때마다 흑산도의 형에게 인편으로 초고를 보내 의견을 물었다. 그 때마다 정약전은 자세한 비평을 담아 회신했고, 다산은 형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고 한다. 결국 다산이 유배지에서 남긴 그 엄청난 저작물엔 정약전의 생각도 상당 부분 담긴 셈이다.

 

역사적 무죄증명을 위한 글쓰기

묘지명에서 언급했듯이 다산은 18년이라는 그 엄청난 유배기간 동안 500여 권에 이르는 저작을 저술한다. 1년에 27.7권 꼴. 한양대 교수 정민의 계산에 의하면, 당시 500여 권은 현대식 책으론 70~80권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이 정도면 생산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종류도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면서, 시의에 적합한 경학, 경세 뿐 아니라 언어와 의술까지 폭도 넓기만 하다.

 

왜 이토록 많이 썼을까. 물론 유배기간 중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이 유배 갔다고 글만 쓰는 일에 매달리진 않는다. 다산의 진정한 속내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담아 전한다. ‘폐족이 됐다고 공부에 손 놓고 있는 아들들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토로한다. “너희들이 마침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버린다면 내가 쓴 저술과 편찬한 책들은 장차 누가 거두어 모아서 책으로 엮고 다듬고 교정을 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내 책들은 끝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고,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에 기대어 나를 평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결국 다산에게 글쓰기는 묘지명처럼 역사에서 자신의 흔적을 분명히 남기고, 무엇보다 억울한 누명을 벗고 무죄를 증명해낸 뒤 역사적으로 복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산의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정조가 죽은 직후 불어 닥칠 정치 회오리를 두려워하며 다산이 낙향해 있던 시절 지은 것이다. 역사 저술가 이덕일은 다산이 노자에 나오는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 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다산은 자신에게 올 정치적 고난을 예상하고 몸을 사렸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일단 역경에 휘말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장기간 유배에 처해졌지만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았다. 현실에선 일단 졌지만 역사에선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저서를 남기며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새겼다. 특히 그와 정치적 동지들에게 가해졌던 가혹한 정치적 멍에에 대해 자신 뿐 아니라 동지들의 묘지명을 통해 역사적 복권을 시도한다.

 

역사적 복권

그가 남긴 7편의 비본 묘지명은 서거 100년을 1년 앞둔 1935년 여유당전서가 현대식 출판물로 간행될 때 비로소 세상에 공개된다. 이때는 노론의 세상도 아니고, 공서파도 영향도 없던 일제 강점기였다. 다산은 해방 후 재조명되면서 민족의 지성으로 우뚝 솟았다. 다산이 변론했던 정약전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다섯 사람의 삶도 재조명받으며 역사의 양지에서 그 억울함이 풀렸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 버려도 괜찮다.” 다산은 자찬묘지명 집중본에서 자신이 쓴 묘지명과 저작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서의 정당성과 하늘의 도리에 운명을 맡긴 자신의 기록들을 어떻게 불태워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고미숙은 이 말은 지독한 반어다. 반드시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을 거꾸로 표현한!”이라고 평했다.

 

그만큼 자신의 행동과 신념에 대한 자긍심이 확고했던 다산. “잘 거두어 간직하면(斂而藏之)/ 장차 멀리까지 날래고 사납게 떨치리라(將用矯矯然遐擧)”(자찬묘지명 광중본)던 자신의 말 대로 다산은 이제 역사의 승자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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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茶山이 몰래 쓴 7人의 묘지명, 신유사화의 白書격”

 

"신유년(1801) 2월9일에 큰 옥사가 일어났다. (중략) 공(이기양·李基讓)은 평생 동안 서서(西書·서학책)를 한 자도 보지 않았다. (중략) 임술년(1802) 12월16일 적지(謫地·유배지)에서 죽었으니, 악인(惡人)이 선류(善類)를 해침이 이처럼 혹독했다."

이덕형의 7대손인 이기양(1744~1802)의 묘지명(墓誌銘)을 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초상화)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선비가 억울하게 죄를 입어 죽었다는 점에서 신유옥사(辛酉獄事)를 '사화(士禍)'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 ‘묘지명 비본(墓誌銘 秘本)’이란 글이 표기돼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 소장 ‘열수전서속집 권8’의 표지(왼쪽)와 이 책에 실린 정헌(貞軒·이가환의 호) 묘지명. 서지학자인 고 안춘근(1926~1993)이 수집해 한중연에 기증한 것이다. 실학박물관 제공

 

다산은 자신을 포함해 27명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 28편을 지었는데, 이 가운데 자신과 이기양·이가환(李家煥·1742~1801)·권철신(權哲身·1736~1801)·오석충(吳錫忠·1743~1806)·정약전(丁若銓·1758~1816) 등 6명의 묘지명 7편을 수록한 수사본(手寫本·손으로 베껴 쓴 책) 문집 표지에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는 의미로 '비본(秘本)'이라고 써놓았다. 표지에 '묘지명 비본'이라고 적혀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열수전서속집(洌水全書續集) 권8'이 바로 그것. 다산을 비롯한 이들 6명은 모두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도 불린 1801년 옥사 때 감옥 또는 유배지에서 죽거나 유배를 산 사람들이다.

김상홍 단국대 석좌교수는 지난 9일 고려대에서 열린 다산 탄신 2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과 천주교'에서 "이들 묘지명 7편은 죄 없는 선비를 천주교도로 낙인 찍어 희생시킨 공서파(攻西派)의 무도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역사적 반론이자 진실의 기록으로 '신유사화(辛酉士禍)의 백서(白書)'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산이 장장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온 1818년 9월 이후 지은 이가환·이기양 등의 묘지명 5편과 회갑(1822)을 맞아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묘지명 2편 등 7편을 '비본'으로 후세에 전한 것은 묘지명이 공개될 경우, 정치적 파문이 크게 일어나고 자신과 후손들이 화를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란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이들 '비본' 묘지명 7편은 1885~1886년(고종 22~23) 고종이 어람용으로 베껴 적은 '여유당집(與猶堂集)' 78책(서울대 규장각 소장)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다산 서거 100년을 1년 앞두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76책을 신조선사에서 간행할 때 공식적으로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다산의 '비본' 묘지명에는 '악당(惡黨)' 또는 '한둘의 음사(陰邪)한 사람'으로 기록된 목만중(睦萬中)과 홍낙안(洪樂安), 이기경(李基慶), 서용보(徐龍輔), 민명혁(閔命赫) 등이 묘지명의 주인공인 다산 등 6명의 '선류(善類)'를 해친 신유사화의 전말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또 "평생 동안 서서를 한 자도 보지 않았다"(이기양) "서교(西敎)를 믿지 않았다"(권철신) "서교의 설을 듣고 좋아했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고 신해년(1791)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했다"(정약전) 등의 표현에서 보듯 다산은 자신을 포함해 묘지명 주인공들이 천주교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희생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산이 1801년 순교한 셋째형 정약종(丁若鍾)의 묘지명을 짓지 않은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순교한 정약종의 삶은 다산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천주교 발전에 기여했던 권일신(權日身·권철신의 동생)이나 자신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 및 자형인 이승훈(李承薰) 등의 묘지명을 짓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특히 "조선 교구 제5대 주교였던 안토니 다블뤼가 1858년에 쓴 편지에 등장하는 다산이 저술했다는 '조선복음전래사'는 바로 이 '비본' 묘지명 7편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며 다블뤼 기록을 토대로 다산이 만년에 다시 천주교로 기울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한국한문학회와 한국실학학회,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등이 공동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다산 연구의 새로운 모색'. 모두 23편의 논문이 4가지 주제로 나눠 발표된 이번 학술대회에서 관심을 끈 것은 '다산 연구의 자료와 시각'을 소주제로 한 분과였다.

다산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소개한 이 분과에선 김 교수 외에 정민(국어국문학) 한양대 교수가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자료를 중심으로 다산과 승려들 사이의 교유 관계를, 고서연구가인 박철상 씨가 '선암총서(船菴叢書)'에 실려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 초기 필사본을 통해 '목민심서'가 20년 이상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준비된 역작이란 점을 강조한 논문이 각각 발표됐다.

* 문화일보-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