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포탕(軟泡湯)’의 ‘포(泡)’는 거품이다. ‘연포’는 연두부다. 두부를 만들 때 거품이 인다.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초계군수 입장도 난처했으리라. 벼슬이 끊어진 백의종군 신세지만 전직 삼도수군통제사다. 대접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귀한 연포탕을 준비했지만 얼굴은 떨떠름하다.
두부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두부의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泡)라 했고 또 다른 이름은 숙유(菽乳)”라고 밝혔다. ‘숙(菽)’은 콩이다. 숙유는 ‘콩 우유’ 즉, 두유다. 두유로 두부를 만드니 숙유라고 불렀음 직하다. 두부는 ‘두포(豆泡)’라고도 했다. 역시 콩, 거품의 의미다.
“전생에 지은 죄가 커 금생에 두부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두부를 만들기 힘들다는 뜻이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주로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사찰은 힘든 일을 해낼 인력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사찰의 승려를 통해 두부를 만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왕릉의 제사에 두부를 공급하는 사찰, 조포사(造泡寺)가 있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년) 4월의 기록에는 “중국 사신이 오면 한양 인근 사찰에 곡식을 주고 두부를 맡기자”는 제안도 나온다. 영조 9년(1733년) 3월에는 남원에서 ‘백복사(百福寺) 흉서 사건’이 터진다. 범인으로 지목된 노이겸은 “백복사에서 연포(軟泡)를 설비하였다는 일은 이제 처음 들었습니다”며 공범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역시 사찰의 두부다.
두부는 연포탕을 통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발전한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은 두붓국과 지진 두부를 먹었다. 단순하다. 이색은 ‘목은시고’ 제33권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두부가 마치 갓 썰어낸 비계 같고, 성긴 이로 먹기에도 그저 그만”이라고 했고, 제9권에서는 ‘두부와 토란을 섞은 반찬’을 이야기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도 ‘사가집’에서 “서리 빛보다 흰 두부를 잘게 썰어 국을 끓이니 부드럽고 향기롭다”고 했다. 두부를 넣은 평범한 국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두부를 잘게 썰어 서너 개씩 꿴 다음, 흰 새우젓갈을 섞은 물에 넣고 끓이되 굴(石花)을 더한다고 했다. 새우젓갈, 굴이 있으나 고기는 없다. 추사 김정희의 ‘대팽두부(大烹豆腐)’에도 “가장 맛있는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라고만 했다. 차별화된 두부 맛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맛있는 두부를 먹었던 민족이다. 허균은 ‘도문대작’(1611년)에서 “창의문(자하문) 밖의 두부가 맛있다”고 차별화했다. 세종 때는 중국으로부터 “두부와 반찬 잘 만드는 여인들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일본의 고급 두부, ‘당인두부(唐人豆腐)’는 경주 출신 박호인이 만들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이제 맛있는 두부를 잃어버렸다. 중국에는 ‘취두부(臭豆腐)’ ‘모두부(毛豆腐)’ 등 발효두부가 남아 있다. 일본의 두부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우리만 ‘물에 담아 포장한 두부’로 찌개를 끓이거나 지져 먹는다. 고려 말의 두부 수준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두부 먹다가 이 빠진다(豆腐喫 齒或落)”고 했다. 두부를 쉽게 여기다가 좋은 두부를 다 잃었다.
[동아일보 -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