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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젊은 한국’ 선수교체론

Bawoo 2015. 12. 22. 21:52

우울한 연말엔 반성이 제격이다. 이름하여 ‘선수교체론’. 나라가 어려우면 젊은이를 부른다. 조선 패망 직전인 1908년 육당 최남선은 ‘소년’에게 호소했다.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치면서.” 이른바 청년담론의 시작이었다. 청년담론은 절망적인 식민치하에서 영웅담론으로 진화했다. ‘2000만 민족사회의 미래 영웅’이고 “암매한 민지를 문명케 하고, 사회의 악관을 귀정(歸正)케 함도 청년이라”. 화급한 시절, 선수 교체를 발령한 과감한 결단이었다.

 영웅담론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는 법, 한니발·나폴레옹·워싱턴·잔 다르크가 등장했다. 신채호는 을지문덕·이순신·최영을 푯대로 세워 “차시대는 영웅이 흥기 분발할 계절 아닌가”라고 절규했다. 국권회복의 문명적 사명을 청년세대에게 이양한 것이다. 2000여 개의 야학(夜學)과 6000여 개의 사립학교가 문을 열었다. 서울에는 물장사(水商)야학도 출현했다. 1920년대 드디어 청년시대가 열렸다. 동아·조선일보를 끌어간 것도, ‘개벽’을 위시한 계몽지 집필자들도 모두 20, 30대 청년들이었다. 청년은 쇠망한 나라를 짊어지고 ‘절망의 시대’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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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이 지난 오늘날, 청년은 시름시름 앓는 고사목이 되었다. 비대해진 독립 한국의 온갖 병증을 끌어안은 행려병자, 연애·결혼·출산·주택·희망을 포기한 가난뱅이다. 아니 그 잘난 기성세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사회의 상징자본을 독점한 산업화, 민주화 세력이 우리의 미래세대를 새장에 가둬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장하성 교수가 최근 저서에서 ‘청년세대여 분노하라!’고 외쳤지만 뻗을 곳이 있어야 분노라도 하지 않겠는가. 가진 것 없고, 발언권도 없는 이 상황은 기성세대에 의한 식민통치다. 그들이 미래세대의 주권을 빼앗았다. 요즘 맹위를 떨치는 위기담론을 세계시장 문제로 자꾸 외화(外化)하는 것은 결국 기득권을 움켜쥔 기성세대의 권력연장 음모다. 위기는 내부에 있다. 넓게는 힘 있는 5060세대, 좁게는 독주·독점의식에 사로잡힌 산업화, 민주화 세력이 주범이다.

 부국과 독재종식에 인생을 바쳤는데, 억울하다고? 아니다. 필자를 포함해 기성세대는 성장과 항쟁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기득권을 언제까지 움켜쥘 생각인가? 사회적 자원인 3P, 권력(power)·금력(property)·위신(prestige)을 몽땅 독점한 채 진입 문을 잠가 버렸다. 게다가 ‘성공의 기억’에 유난히 집착하는 습관은 미래대응력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산업화 세력은 굴뚝산업 시대의 정책마인드에 매몰됐고, 민주화 세력은 민중적 명분을 독식한 채 특권 집단화했다. 시대의 장애물이 따로 없다.

 물러앉는 게 맞다. 우리 역사에서 대변혁은 두 차례 있었다. ‘제1 변혁’은 1894년 갑오경장. 주도세력은 600여 개의 근대법안을 입법했는데 일제의 침략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대실패였다. 61년 ‘제2 변혁’이 시동을 걸었다. 결과는 유례없는 성공. ‘경제성장은 민주화를 촉진한다’는 정치사회학의 오랜 명제에 기대면 산업화와 민주화의 지난 60년 세월은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 사회제도가 연속성을 갖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그 패러다임이 낡고 병들었다는 것, 그것으론 향후 60년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구각(舊殼)을 고집하고 리더십 이양을 거부하는 산업화, 민주화 세력의 늙은 합창 때문이다.

 구각을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릴 ‘제3 변혁’이 절실한 지금 그것을 막는 최대의 난관은 다름 아닌 기성세대다. 이들이 미래세대를 식민화했다. ‘미래세대의 식민화’가 초래할 화(禍)의 리스트는 우울하다. 무엇보다 열정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다. 한국 특유의 역동성은 물론 아기 울음, 일자리, 가족애, 희망과 도전, 공감과 신뢰, 교육열, 세계 일등기업이 사라지고 그 빈터에 패배의식, 범죄, 치안 불안, 불만과 분노, 투기와 사행심, 불공정 경쟁, 빈곤이 확산될 것이다.

 ‘젊은 한국’을 위한 선수교체론이 생뚱맞은가? 난민을 마중 나간 캐나다 트뤼도 총리! 그런 참신한 리더십을 키워내기는커녕 청년들을 미궁에 처박아 놓았는데도 그런가. 영화 ‘인턴’처럼 뒷전에서 지그시 보살펴줌이 어떤가. 이건 필자 스스로도 묻는 말이다. 상징자본과 문화자본을 4050세대(40대 중반~50대 중반)에 일찍 이양하는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청년담론, 영웅담론은 특히 국가운영 주체인 공공부문에서 더욱 시급하다. 정부와 공기업의 주요 직책에 젊은 세대를 과감히 발굴해 앉혀야 한다. 젊은 총리, 젊은 장차관, 젊은 기관장을 보고 싶다. 정치권의 구조조정은 핵심 과제다. 할 일 다한 운동권은 제발 물러나 달라. 더불어 세대혁명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한다면 50대 중반 이후의 정치인들도 과감히 퇴장하는 게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결단은 빠를수록 좋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출처: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젊은 한국’ 선수교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