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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명작소설 오디오북】 토요일 ː 올더스 헉슬리

Bawoo 2015. 12. 22. 22:15



         



 

 

 
올더스 헉슬리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가의 족보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년 7월 26일 - 1963년 11월 22일)는 영국 출신의 작가이다. 그는 소설과 다양한 분야에 걸친 수필로 가장 유명하나, 단편이나 시, 기행문, 각본 등도 집필했다.

 

헉슬리는 레너드 헉슬리의 아들이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손자로 태어났다.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의학도가 되려 하였으나, 점상 망막염을 앓고 3년간 사실상 맹인으로 지낸 후에는 그 길을 접고 옥스퍼드 대학교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수학했다.

헉슬리가 본격적으로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1년 소설 《크롬 옐로》로 인정을 받고 나서다. 소설 외에도 여러 수필들을 짓기도 했다. 그의 소설과 수필에서는 사회적 관행, 규범, 사상등에 대한 탐구와 비판이 주로 나타난다.

 

사망 전에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아내에게 종이로 "LSD 100 마이크로그램 근육 내 주사"와 같은 요청을 했다 한다. 그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그의 아내의 책 "이 영원한 순간"(This Timeless Moment)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녀는 헉슬리가 별세한 날 11시 45분, 한 번의 LSD 주사를 놓고 2시간 후 다시 LSD를 주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17시 20분에 평화롭게 사망했다. 사망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같은 날 암살당한 존 F. 케네디에 의해 가려져서 그의 명성에 비해 크지 못했다.

 

주요 작품

소설

철학

바깥 고리

헉슬리 비디오 인터뷰, 1950년대

[출처: 위키백과-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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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현란한 지적 대화와 냉소주의, 미래 문명 예측 및 도덕적 비판주의가 혼합된 실험성 강한 작품을 썼다. 철학, 과학, 심리학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동양 사상적 견지에서 인간과 우주에 대한 관념 철학을 전개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작품에는 《아일랜드》, 《멋진 신세계》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를 예측하고, 과학의 진보, 인간성의 상실을 경고하고 있다.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는 1894년 7월 26일 영국 서리 주 고달밍에서 레너드 헉슬리와 줄리아 프랜시스 아널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올더스 헉슬리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 세계 비판과 미래 예측을 한 박학다식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근원은 집안 배경에서 연유한다고도 할 수 있다. 헉슬리 가문은 영국에서 유명한 학자 집안이다. 올더스의 할아버지 토마스 헨리는 19세기의 대표적인 생물학자로, '다윈의 불도그'로 불릴 만큼 유명한 진화론자였다. 둘째 할아버지 제임스 역시 의사이자 정신병리학자였고, 아버지 레너드는 학교 교감이자 작가였다. 형 줄리언 소렐은 현대 영국의 대표적인 생물학자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사촌동생 앤드루 역시 생리학자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어머니 줄리아도 시인이자 여학교를 세운 교육자였는데, 외증조부 토마스 아널드 역시 명망 높은 교육자였고, 외숙인 매튜 아널드는 19세기 대표적인 문예 비평가였다.

 

따라서 헉슬리는 당시 웬만한 집안이 따라오지 못할 서가와 실험실을 갖춘 집에서, 생물학과 의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랐다. 유년 시절에는 멀번의 힐사이드 학교를 다니다 14세 때 이튼 칼리지에 입학해 생물학을 전공했다. 이어서 옥스퍼드에 진학해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데다 각막염 수술을 하면서 시력을 거의 잃어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시력 문제는 이후 헉슬리를 평생 괴롭힌다.

학교를 그만둔 후 집에서 점자 교육을 받았으며, 점차 시력을 회복해 20세 때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옥스퍼드에서 그는 역사, 철학, 종교 등 다방면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그중 특히 신비주의에 관심이 컸는데, 이는 14세 때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큰 충격을 받고, '인간의 운명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옥스퍼드 졸업 후 헉슬리는 잠시 육군성에서 근무하고, 이튼 칼리지에서 교편도 잡으면서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 《청춘의 패배》 등을 펴냈다. 첫 소설은 17세 때 썼다고 하는데 발표된 바가 없으며, 소설가로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한 것은 20대 초반부터라고 한다. 1921년 소설 《크롬 옐로》, 1923년 소설 《어릿광대 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사회적 지위를 확립했다. 헉슬리는 이 작품들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한 세태를 분석하고, 박식하고 염세적인, 방향성을 잃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 문명사회 지식인들의 불안과 회의를 풍자했다.

이때까지 헉슬리는 〈아테니엄〉 지의 편집자를 지내는 한편, 다양한 문학잡지에 평론과 서평을 기고하고, 레미 드 구르몽, 장 드 보셰르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두 작품이 성공하고 경제적 안정을 얻으면서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교류하던 T. S. 엘리엇이 소설을 쓰는 게 좋겠다고 권유한 것도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로서 성공한 후 헉슬리는 아내 마리아 니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1930년대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크롬 옐로》의 세계관을 확장, 변형한 《하찮은 이야기》와 《영원의 철학》,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연애 대위법》 등의 소설을 비롯해 《인간 연구》, 《원하는 것을 해라》 등의 평론집을 펴냈다. 《연애 대위법》은 20세기 지식인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사용한 실험적인 필법이 두드러진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의 허례허식과 위선,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과학과 문학, 진보와 발전의 허구성에 대한 다양한 토론을 전개하는데, 문예 비평가로서 헉슬리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 헉슬리는 이로써 20세기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1925년에는 아내와 함께 인도와 인도차이나를 여행했는데,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헉슬리는 동양 사상적 관점, 즉 조화와 합일의 관점에서 우주와 세계, 인간의 관계를 파악하고, 과도하게 발달한 문명 속에서 진행되는 비인간화 경향의 해결책을 여기에서 찾았다.

 

이 시기 헉슬리는 D. H. 로렌스 부부와 각별한 친분을 나누었다. 로렌스는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에 있어 같은 견지를 가지고 있던 스승이자 동조자였다. 헉슬리는 《로렌스 서한집》을 직접 편집하고 서문을 써서 출간했으며,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아내 마리아가 정서하여 타이핑했다고도 한다. 또한 1930년 로렌스의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헉슬리는 그가 있던 프랑스 방스 지역에 머물며 그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헉슬리의 허무주의, 염세주의적 관점, 도덕주의자의 입장에서 인간 혐오자로 불릴 만큼의 인간성 비판과 풍자적 작품 세계는 로렌스의 죽음으로 더욱 심화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1929년에는 H. G. 웰스, 아놀드 베네트 등과 함께 문학잡지 〈리얼리스트〉를 창간했으며, 1932년에는 《멋진 신세계》를 펴냈다. 《멋진 신세계》는 과학 기술 문명의 오용이 극대화되어 인간성이 말살된 세계를 보여 주고, 진보주의에 대한 맹신과 전체주의를 경고하는 작품이다. 헉슬리는 당초 이 작품을 공상과학소설이라기보다는 문명 비판론적 견지에서 집필했는데, 지나치게 진일보한 미래 세계는 당시 관점에서 허황되어 보일 정도여서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일각에서는 그를 정신병자 취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예측한 미래 사회의 기본 구조는 오늘날 많은 SF 작품들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공수정, 수면학습 등은 현재에 이르러 그리 허황된 이야기가 아닐 정도로 현실화되기도 했다. 《멋진 신세계》는 20세기 대표적인 과학소설이자 문명비판소설, 조지 오웰의 《1984》와 예브게니 자마친의 《우리들》과 더불어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

 

1930년대 유럽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헉슬리는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연주의적 생활론을 피력하는 《가자에서 눈이 멀어》,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정치, 전쟁, 경제, 종교, 윤리 등을 다루고 도덕주의를 설파한 《목적과 수단》 등을 발표했다.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목장을 구입해 정착했으며, 불교와 힌두교, 가톨릭 신비주의, 중국 도교에 심취했다. 이런 사색의 결과로 탄생한 작품들이 《많은 여름을 보내고》, 《시간은 멈추어야 한다》, 《만년 철학》, 《루던의 악마들》 등이다.

 

헉슬리 말년의 대표작은 1949년에 쓴 《원숭이의 본질》로, 제3차 세계대전 이후, 즉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원숭이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류를 그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헉슬리는 평화운동에 더욱 몰두했으며,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신비주의, 금욕주의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약물로 인한 환각 상태를 체험하고 요가에 몰두했다. 이런 체험을 통해 감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과학적으로 조사 분석해 《인식의 문》, 《하늘과 지옥》 등을 펴내기도 한다. 1955년 아내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에는 의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페루의 아마존 원주민들을 연구하고, 심리치료에도 관심을 보이는 등 학문 연구에 계속해서 힘을 썼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에덴이여 안녕》, 《문학과 과학》, 《당신은 표적이 아니다》 등으로 탄생했다.

 

죽기 몇 년 전에는 미국, 유럽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하고, 사후 세계와 텔레파시에 관심을 가졌다. 1963년 11월 22일 미국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날 미 대통령 J. K. 케네디가 저격당하면서 그의 죽음은 생전의 유명세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출처:작가 , 세계사 | 도서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