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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의 원조] 푸거가[ Fugger family , ─家 ]

Bawoo 2015. 12. 27. 23:59

푸거가[ Fugger family , ─ ]

요약
남()독일의 상업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점으로 하여 근대 초기에 번영하던 호상().

창업주 한스는 슈바벤의 그라벤 마을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주하였다. 처음에는 모직물 ·바르켄트직(綿)의 거래로 재산을 모았으나, 나중에는 동양산품()의 거래, 금융업, 은 ·구리 ·수은 등의 광산업(광산은 에 대한 대여금의 담보물로서 보유)까지도 하였다. 그의 막내아들 야콥(1459∼1525) 때가 번영의 절정기로서 거래 범위가 전유럽에 이르러,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를 비롯하여 교황 ·제후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특히 카를 5세가 푸거가에서 빌린 돈을 선거비용으로 써서 황제에 당선된 일, 마인츠의 대주교가 푸거가에서 빌린 차용금을 변제하기 위해 속죄부() 판매를 강행하여 루터의 비난을 초래한 일 등은 유명하다.

한편, 야콥이 구빈시설()인 푸게라이(일종의 아파트)를 건설한 일도 유명한데, 푸게라이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지금도 남아 있다. 푸거가는 전성시대에 전유럽에 지점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조직을 통하여 수집한 정치 ·경제 정보(1568∼1608)는 ‘푸거시보()’라고 불려, 근대 초기의 좋은 사료()로서 빈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푸거가는 16세기 말 이후 쇠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푸거가 [Fugger family, ─家]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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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푸거(독일어: Jakob Fugger, 1459년 3월 6일 ~ 1525년 12월 30일) 는 독일의 은행가이다. 조상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광산 등에 손을 대어 막대한 부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의 집안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에도 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여러 면에서 도와 많은 땅을 얻어서 영주가 되었다.


<재산 규모>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부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가진 기업의 자본금은 순금만 17톤이 였다고 하며, 경제학자들은 그가 가졌던 돈이 현재 독일의 DAX30에 상장된 30개의 기업의 시장가치를 합한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이정도의 재산 규모 때문에 유럽에서는 최초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고 한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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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유착의 원조, 야콥 푸거 ]

 

때는 16세기 초. 교황이 유럽지역에서 가장 자금이 풍부한 지역인 프랑스와 영국의 추기경을 불러 얘기한다. “그대들은 한 시간 안에 3t의 황금을 모을 수 있는가.” 추기경들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시골동네인 아우구스부르크의 일개 시민도 하는 일을 부국의 추기경들이 못 하는가”라는 면박이 돌아온다. 16세기 유럽에서 회자되던 ‘카더라’ 통신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아우구스부르크의 한 시민’으로 불린 이가 바로 16세기 유럽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대상인 야콥 푸거다. 당시 유럽대륙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엮는 ‘황금실(golden thread)’로 불렸던 인물. 독일지역에서 거두어진 ‘면죄부’의 판매대금을 로마로 송금하는 유통 업무를 담당했던 이 초기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는 ‘정경유착의 원조’라고 불릴만한 사람이었다.

 

15세기말 16세기 초 막대한 부를 쌓은 야콥 푸거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은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남으로는 나폴리, 서로는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동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에 이르는 전 유럽지역에 푸거가(家) 지점망을 갖추고 은과 동, 화폐와 직물 등의 거래를 사실상 독점했다.

야콥 푸거에 필적할 만한 상인은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고 15세기말 16세기 초 50년간 합스부르크가가 그들의 영향력 확장을 위해 유럽 내에서 행한 많은 협상과 전쟁의 배후에는 푸거가문의 자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럽의 상인들과 일반 여행자는 물론 공공기관, 도시국가 관계자, 영주들, 교황청 모두 유럽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야콥 푸거의 지점들을 활용해 금전거래와 물자거래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에스파냐로 간 독일의 광산업자들은 멀리 있는 친척에게 돈을 부치기 위해 에스파냐 소재 푸거가의 지점을 통해 송금했다. 16세기 초 여행자들은 다른 지역의 푸거가 지점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푸거가의 신용장을 미리 사놓곤 했다.

퍼스티언 천 거래로 일어선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 가문인 푸거가문의 지도권을 1490년대에 잡게 된 야콥 푸거는 그의 전임자들이 주력했던 천과 향신료 교역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광산업과 금융업이라는 ‘신수종 사업’에 집중한다. 1525년이 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5세가 “야콥 푸거는 다른 모든 상업적 행위를 포기하고 광산업에만 몰두”했다고 평할 정도가 됐다.

 

특히 헝가리와 티롤 지방의 광산이 야콥 푸거의 관심을 끌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장악하고 있던 16세기의 이 두 광산은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귀금속을 대량으로 수입하기 전까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금과 은의 생산지였다. 연간 100kg의 금과 10t의 은이 생산되던 이 광산들은 신대륙 광산 개발 이전시기에 전 세계 금생산량의 33%와 유럽 은 생산량의 25%를 담당했다.

이곳을 독점한 야콥 푸거는 초기 유럽 산업의 지존 자리에 올랐다. 광산권의 독점 과정에선 정경유착이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야콥 푸거는 합스부르크가와의 금융 커넥션을 활성화시키면서 광산업 진출을 시도했다. 푸거가는 1487년에 ‘부유하지만 언제나 돈이 모자랐던’ 티롤 공작 지그문트에게 선금을 주고 은과 동을 확보하는 계약을 맺으며 광산업에 발을 들인다. 이후 푸거가는 티롤지방 공작들에게 일정 금액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빌려준 돈과 이자가 완납될 때까지 공작 소유 광산에서 나오는 이득을 얻어왔다.

광산업은 오늘날 인식과는 달리 당시에는 고수익 신사업이었다. 역사학자 막스 얀센의 연구에 따르면 푸거가는 성장 초기인 1487∼1494년 사이에만도 40만 라인골드굴덴의 수익을 본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야콥 푸거는 지그문트 사후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된 독일왕이자 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1세와 사업관계를 이어갔다.

 

막시밀리안1세와의 유착관계는 당시까지 티롤지방 합스부르크가 영지로부터 생산되는 은의 구입과 관련한 금융업의 선두주자였던 한스 바움가르트너를 제치는 계기가 된다. 막시밀리안1세가 바이에른 출신인 바움가르트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치상황을 십분 활용해 푸거가의 성장을 유도한 것이다. 결국 야콥 푸거는 1491년에는 티롤지방 은교역의 우선권을 획득하게 됐다.

 

푸거가는 1522년 이전에는 티롤지방 광산을 사실상 직접 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빽’을 활용해 경쟁자인 마틴 바움가르트너의 파산을 유도해 슈바츠와 라텐베르크, 리엔츠의 중요한 광산권을 획득한 뒤에는 광산업에 직접 관여하게 됐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와 잘츠부르크의 은 교역으로 인한 수익도 야콥 푸거의 부를 불려나갔다.

 

푸거가는 은 뿐만 아니라 지그문트 및 막시밀리안1세와 맺은 티롤지방 동에 관한 계약과 동 교역을 통해서도 부를 축적해 갔다. 특히 푸거가는 이탈리아 기술자이자 상인가문인 투르조(투르조 가문과는 이후 이중삼중 결혼정책으로 결합이 강화된다.)와의 협력을 통해 동의 원광석에서 동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기술을 개발, 수익성을 더욱 높이게 됐다.

 

여기에 푸거가의 금융업은 광산업과 결합돼 확장을 계속했다. 정경유착의 활용은 헝가리 광산에 진출할 때 더욱 빛났다. 헝가리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은 오스만튀르크와의 접경지대였고 신성로마제국과 적대적 관계를 가진 마자르족 지도자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지배하에 있어서 독일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범독일과 헝가리 간의 적대간계는 1491년 프레스부르크 화약으로 해소됐고 야콥 푸거는 프레스부르크 화약 직후 헝가리 광산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결단을 했다.

 

그는 마자르족 헝가리의 독일 상인에 대한 적대감을 합스부르크를 ‘빽’으로 삼아 극복하며 광산업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 왕실과 이중의 결혼동맹을 맺어 헝가리 내에 합스부르크가가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푸거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푸거가의 입지도 굳게 다졌다.

이 아우구스부르크의 상인은 꾸준한 수익이 창출될 때까지 엄청난 양의 금액을 헝가리 광산과 용해소, 제철소는 물론 광석을 옮길 도로건설 등에 쏟아 부었다.

 

이후 야콥 푸거의 사업성장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정치권력과의 독점계약 이었다. 야콥 푸거는 두건의 중요한 동 독점계약을 정치권력과 맺었는데 하나는 1514년에 막시밀리안1세와 푸거가 독점으로 맺은 것으로 1515년 크리스마스부터 1520년 크리스마스까지 신성로마제국내 동 독점권을 푸거가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520년 크리스마스부터 1523년 크리스마스까지 회히스테터 가문과 공동으로 동 독점권을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야콥 푸거의 정경유착은 정치권력의 대를 이어 계속됐다. 막시밀리안 사후에 야콥 푸거는 그의 후계자인 칼5세와 독점계약을 맺었다. 1525년 에스파냐 톨레도에서 칼5세가 직접 발표한 칙령은 “야콥 푸거와 그의 가문만이 원광석 거래를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금속 독점권을 바탕으로 푸거가는 유럽 경제권을 장악해갔다. 동유럽 지역에서 생산된 푸거가 소유 동은 우선 한자동맹 상인과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뤼벡이나 함부르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갔다. 이어 앤트워프의 푸거가 지점으로 집결됐다. 다시 앤트워프에서 푸거가의 동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로 갔다. 물론 혈연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 투르조가를 통해 육로로 이탈리아 반도와 남유럽으로도 동이 퍼졌다.

 

이처럼 야콥 푸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유력한 영주들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았으며 그가 죽기 몇 주 전 까지도 여러 영주들에게 선물과 뇌물을 사용하면서 협상과 청탁을 계속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야콥 푸거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헝가리 국왕이 “푸거가가 헝가리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한다면 전 유럽을 헝가리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푸념할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후대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제외한다면 정치세력과 그토록 꾸준하고 효과적인 커넥션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가문은 푸거가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독일과 에스파냐에서의 황제의 ‘통 큰 정치(grosse Politik)’는 모두 푸거가의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실제 합스부르크가가 프랑스의 샤를8세와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고, 플랑드르 공작의 반발을 제압하고, 동쪽의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을 수행하는데 모두 푸거가의 황금과 야콥 푸거의 고갈되지 않는 신용지원이 배경이 됐다. 그전에 칼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데도 엄청난 푸거가의 자금이 투입됐음은 물론이다.

황실과 제국의 재정담당자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 및 다른 유력 정치세력들과의 꾸준한 접촉으로 야콥 푸거는 언제나 정치의 가장 비밀스런 핵심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후원한 합스부르크가의 정치적 승리를 자신의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하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나 헝가리, 티롤을 비롯해 합스부르크가가 새로이 얻은 지역에 언제나 합스부르크가와 함께 들어가 이윤을 창출해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금은식기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만찬상을 영주와 기사들에게 대접하며 자신의 막대한 부를 과시하려고 했지만 만찬 참석자들은 모두 밥상의 실질적 ‘전주(錢主)’는 야콥 푸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교황청과도 밀착해 교황청 주조 동전의 거의 모든 원료를 공급했으며 면죄부 판매와 수익금 전달에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푸거가문은 정치권의 몰락으로 발목이 잡혔다. 그의 후계자인 안톤 푸거를 비롯한 후손들은 16-17세기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정부가 파산하면서 빌려준 돈들을 날리게 된다. 그가 뿌린 유착의 씨앗은 고속성장의 지름길이기도 했지만 후계자의 파멸을 잉태한 파괴의 요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고한 책>

Jacob Strieder, Jacob Fugger the Rich-Merchant and Banker of Augusburg, BeardBooks 2001

Gordon A. Craig, The Germans, Meridian 1983

Jean Berenger, A History of the Habsburg Empire 1273~1700, Longman 1994

[출처] 정경유착의 원조, 야콥 푸거|작성자 동글기자

 

[정보] - 책 세계사 속 경제사 201~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