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안에 드러나는 미술에 대한 인간의 인식
- ‘피그말리온(pygmalion)’ 과 ‘조안(趙顔)’ 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
한유나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 이 글은 2007년 1학기 ‘동·서양 신화의 대화’(담당교수: 배철현, 조현설) 강좌의 리포트이다.
제6회 우수리포트 공모대회 장려상 수상작
차 례
1. 서론
2. 실제와 환영의 무너진 경계
3.‘창조자’로서의 미술가와‘창조된 대상’으로서의 여성
4. 감상자로서의 남성과 감상대상으로서의 여성
5. 감상자로서의 창조자와 창조자로서의 감상자
6. 결론
1. 서론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한 솜씨로 눈같이 흰 여인의 상아상을 조각했다.
이 상아상은 언제나 살아 있는 것 같고, 언제 보아도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이 신묘하였으며,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이 상아상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이 상에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보석을 끼워주기도 하고, 살갗을 쓰다듬으며 입맞추기도 하였다.
비너스 여신의 축제 날 피그말리온은 제단 앞에서 제몫의 제물을 드리고 더듬거리는 어조로 기도했다.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피그말리온은 “상아 여인을...”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 “상아 여인 같은 여자를..”, 이런말로 기도를 끝내었다.
그러나 비너스 여인은 그 기도의 참뜻을 알아차리고, 불길이 세 번 하늘로 치솟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조각상에게 입맞춤을 한 피그말리온은 온기를 느꼈다. 그의 손끝에 와 닿은 살갗은 부드러웠다. 상아 여인은 분명히 인간의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여인을 갈라테이아라고 이름붙이고, 결혼하여 아기를 얻는다.1)"
"당대의 학자 조안(趙顔)2)이 하루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갖춘 미인이 그려진 병풍을 보았다.
그는 화가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이런 미인은 없소. 만약 당신이 그녀를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그녀를 아내로 삼겠소.”
화가는 사실 신령스런 화가(神畵)로, 조안에게 그녀의 이름인 진진(眞眞)을 100일동안 부르면 그녀가 인간으로 변할 것이라고 했다. 조안은 그의 말대로 했고, 결국 인간이 된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 뒤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조안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 친구가 그녀는 귀신이라고 말하며 마술의 칼을 주면서 침실에 걸어 두라고 했다. 그날 밤 여인은 그 칼을 보고 주안에게 슬프게 말했다.
“비록 내가 귀신은 아니지만, 당신이 날 의심하니 더 이상 여기에서 살수가 없군요.”
그래서 그녀는 다시 병풍의 초상이 되었다. 헌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그림 속의 그녀 옆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3)"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신화는 인간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창조적 원천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신화의 내러티브들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거나 혹은 이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화와 예술이 전통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두 이야기는 신화가 미술과 관계하여 가지는 중요한 또 한 가지의 역할을 드러낸다.
인간이 미술 작품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제작과 감상에 있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인간과 미술의 관계 그 자체를 신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미술 작품들이 ‘현실과 같은’ 착각을 주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고 생명을 부여받아 ‘현실 그 자체’의 일부분이 되는 점, 그리고 이 신비한 미술 작품 모두 ‘여성’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두 이야기는 상당히 유사하다. 또한 형상에 생명을 부여한 주체는 양쪽 모두 ‘신’으로 상정된다.
물론, 생명을 부여하는 이 행위의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양자 간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피그말리온 신화에서는 형상 자체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인간이 만든다. 반면, 조안의 이야기에서는 신적인 존재인 화가가 형상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생명을 부여하되, 조안이라는 인간이 여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형상을 생명으로 만드는 행위 자체에 관여하게 된다. 피그말리온의 미술작품은 3차원의 조각이며 조안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2차원의 회화라는 것도 또 하나의 차이점이라 하겠다.
신화가 신화를 생산한 사람들의 세계관과 사고 및 관념 체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 동서양의 두 가지 이야기의 유사성이 미술과 미술 작품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보편성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동서양은 분명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구체화 되는 신화 혹은 미술 작품은 필연적으로 서로 구분될 수밖에 없음 또한 자명하다. 따라서 이 두 신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규명하는 것은 이러한 보편성과 개별성의 문제를 추적하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미술이든, 신화이든, 혹은 인간의 관념이나 사고체계이든 시간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들 두 신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러한 모티브가 시간적 흐름 안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고 재창조되었음을 살펴볼수 있다.
본고에서는 ‘생명을 부여 받은 미술 작품 속의 여성’이라는 모티브를 소재로 한 위의 두 가지 신화와 이들을 변용한 몇 가지 사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안에 형상화 되어 있는 미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밝히고, 이들이 보여주는 보편성과 차별성, 또 시간에 따른 개별적인 변화 양상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오비디우스, 천병희 역,『변신이야기』, 숲, 2005, pp. 340∼342 해제요약.
2) ‘조안’ 이야기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지괴 양식이지만, 본고에서는 이것이 신화를 문헌에 기록한 형태이며, 신화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3) 우훙, 서성 역,『그림 속의 그림』, 이산, 1999, pp. 129∼130.
2. 실제와 환영의 무너진 경계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이자 공통점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미술 작품이 결국 ‘사실’이 된다는 점이다.
서양 미술사에서는 모더니즘의 시작과 함께 미술의 개념이 나날이 다양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 개념의 정의 가능성에조차 의심을 표명하지만, 그 이전 시기까지 전통적으로 미술은 현실세계의 ‘모방’ 혹은 ‘재현’으로 간주되었다. 그 때문에 화가들은 화면 위에 최대한 3차원적인 세계를 실제와 동일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주의적 재현의 전통이 시작된 것은 고대 그리스였다. 완벽한 신체 비례와 균형, 아름다움을 갖춘 조각상들은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절정을 맞이하였다.
또한 연대는 좀 내려가지만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인「크니도스의 비너스」<그림 1>는 가히 갈라테이아 상에 비견할 만한 아름답고도 사실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의 미술 전통이 피그말리온 신화의 발생 배경과 어느 정도 관련있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동양 미술의 경우는 이러한 회화적 리얼리즘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적이 없었으나 적어도 미술이 현실세계 특히 자연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발전하였으며, 건축물을 그리는 계화나 ‘여성’을 소재로 하는 사녀도(미인도)에서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사실적인 표현들이 중요시되었다. 특히 조안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되
는 당(唐)대는 사녀도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다.
8세기 중엽 경의 화가 장훤의 작품을 보면, 당대의 최신 유행의 화장법과 옷차림을 보여주는 궁중 여인들의 모습이 실제 살아 있는 것처럼 세밀하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그림 2>.
<그림 1>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프락시텔레스, 기원전 350년경) Aphodite Knidos . Praxiteles
<그림 2> 잠화사녀도(장훤, 당 8세기) 簪花仕女圖
중국 고대 문헌에서 사람을 속이는, 혹은 이와 유사한 성격의 이미지를 ‘환(幻)’이라 불렀는데, 이는 서로 다르지만 내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4)
‘일루전(illusion, 幻影)’, ‘일루저니즘(illusionism, 幻覺)’, ‘마술적인 변형(ma- gical transformation)’이 그것이다. 일루전의 의미로 사용될 때, ‘환’은 표현에서의 박진성을 의미한다. 보는 이는 사물이나 공간을 현실처럼 느끼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이 그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여기서 기초가 되는 개념은 ‘환(幻)’과 진(眞, ‘사실’ 또는 ‘사실성’)의 이원론이다.
이때 일루전이 있는 회화 이미지는 사실을 반영하며 그래서 사실과 반대된다. 여기에 비하여 일루저니즘은 이러한 구별을 혼란시키고 또 없애기 때문에 감상자를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다. 그래서 보는 이는 그려진 것을 진짜로 믿는다. 한편, 세번째 ‘환’의 의미는 진짜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사실이 될 수도 있음을 소개하는 것이다.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이야기는 이러한 세 번째 개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루저니즘이 있는 그림, 즉 관람자가 ‘사실’이라고 속게 되는 그림이 사실과 비사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이것이 마술적 변형이나 마술적 주술의 주체와 대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이 단계까지는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신화가 유사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에 의해 실제와 재현의 경계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관념의 이면에는 서로 상반되는 태도가 나타난다. 전자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로서 이러한 마술적 변용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대’의 심리를 보이는 반면, 후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먼저 피그말리온의 신화를 살펴보자. 갈라테이아가 ‘사람을 속이는 이미지’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생명을 얻어 피그말리온과 결혼함으로써 낭만적 사랑이 완성된다는 이 행복한 결말은,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구와 기대의 심리를 반영한다. 이러한 욕망은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핵심적인 두 주체, 즉 미술가와 감상자 중에서 미술가와 좀 더 관련되어 있다.
진진과 결혼한 주안이 작품의 감상자였던 것과는 달리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의 형상을 창조한 미술가였고, 갈라테이아는 그의 사적인 작품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갈라테이아를 보거나 만진 사람이 없었다. 이 신화에서는 작품과 작가의 관계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 심리는 역사적으로 미술가들에게 있어 언제나 창작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5) 바자리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연대기에서 도나텔로가 그의「로 주코네(Lo Zuccone)」를 제작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작품을 바라보면서 “말해라, 말해! 네가 육체가 될 것이다(favella, favella,che ti venga il cacasangue)”라면서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부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6)
과학적, 이성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의 작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20세기 영국의 화가인 루시언 프로이트(Lucien Freud)는 “미술 작품의 창작에서는 완전한 행복의 순간이란 결코 찾아와 주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약속(작품이 생명을 얻을지도 모른다는)은 창작행위 과정에서는 느껴지지만, 작품의 완성을 향해 다가가면서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화가가 자신이 그리고 있는 것이 한낱 그림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작품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 그 화가는 자기 그림이 벌떡 살아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도 감히 품어 보고 있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7)
피그말리온 신화는 이러한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화가들에게 있어 피그말리온 신화는 자신의 작품도 생명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약속이자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4) 위의 책, p. 111.
5) E.H. 곰브리치, 차미례 역,『예술과 환영』, 열화당, 2003, p. 110.
6) Giorgio Vasari, translated by George Bull, The lives of the artists, Baltimore: Penguin Books, 1987-1993, p. 404.
7) Lucien Freud, “Thoughts on Painting”, Encounter, No.10(1954), p. 72.
조안이 진진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얻는 전개는 피그말리온의 신화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조안은 피그말리온처럼 직접 여인의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를 감상하던 감상자였다는 점에서 일단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그냥 끝나지 않는다.
조안의 친구는 진진이 ‘귀신’이라고 말하며 마술의 칼을 방에 걸어놓으라고 한다. 물론 이 칼은 귀신을 쫓는 칼이다. 조안의 친구는 조안이 처해 있는 상황, 즉 한 때는 그림이었던 여인과 살고 있는 조안의 상황을 부정적으
로 판단하고 이를 타개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조안 역시 이러한 친구의 판단을 받아들여 칼을 걸어놓게 되고, 여인의 존재를 의심한 것에 대한 벌로서, 여인은 다시 그림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러한 회귀로 인하여 조안의 경험이 단지 일루저니즘의 이미지에 속은 것일 뿐이었다는 모호함을 남기지 않도록, 화면 안에는 아이가 등장한다. 즉, 사실과 환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술적 변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결과는 불행하며, 또한 조안 친구, 혹은 조안 자신의 태도로부터 ‘살아 있는 듯한’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가 나타나는 원인은 그림 속의 이미지를 실제 세계를 끌어낸 것이 근본적으로 ‘금기’를 깨는 행위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의 경우에도 자신의 대리석 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용기가 없어, ‘그 상과 같은 여자’를 아내로 달라고 기도한다. 그림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나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는 별도로 인간에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금기시 된 일이라는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피그말리온의 경우에는 미술 작품에 생명을 부여한 것이 신이었고, 신전에서의 언행도 조심하였으므로 금기를 깨는 행위에 피그말리온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반면, 조안의 경우에는 ‘진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분명 일정부분 금기를 깨는 행위를 하였다. 결국 조안은 ‘금기’를 깼다는 데에 불안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불안감이 전이되어 금기를 깬 행위의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진을 ‘쫓아내야 할 귀신’이라는 부정적인 대상으로 상정하는 친구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두 신화는 결국 미술 작품이 생명을 얻음으로써 실제와 환영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통적인 믿음에서 출발했지만, 이러한 믿음의 주체와 그 믿음을 대하는 구체적인 태도에서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곧 두 이야기가 후대에 재생산 되는 과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피그말리온 신화의 경우, 사실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모방함으로써 여기에 생명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야심과 목표에 그 내용이 부합한다. 따라서 후대에 있어 피그말리온 신화에 더 큰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감상자들보다는 미술가들 자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피그말리온 신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그 모티브를 바탕으로 변용과 재창조를 시도한 무수한 미술 작품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반면, 중국 회화에서는 이러한 소재로 제작된 작품의 예가 거의 없다. 후대에 ‘그림 속의 여성’ 이 살아난다는 모티브로 무수한 ‘이야기들’은 전해지지만, 이것이 작품으로 시각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는 조안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생명을 부여받은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근본적으로 감상자의 것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3.‘창조자’로서의 미술가와 ‘창조된 대상’으로서의 여성
피그말리온 신화는 형상을 만든 인간과 생명을 부여한 신, 이 두 명의 창조자와 작품 속의 여성이라는 3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를 조각하지만, 그녀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는 오직 ‘신’ 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직접 갈라테이아에게 생명을 부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에게 도전한 인간은 십중팔구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아테네에게 베짜기로 도전을 했다가 거미로 변한 아라크네, 레토를 비방했다가 남편과 일곱 아들, 일곱 딸을 모두 잃은 니오베의 이야기 등이 그 예이다. 피그말리온은 이렇게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비너스에게 기도를 한다.
그것도 직접적으로 조각상에 생명을 부여해달라는 과도한 요구가 아니라, ‘조각상과 같은 여자’라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겸손한 피그말리온의 태도는 이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 비너스는 기꺼이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갈라테이아의 형상을 만든 것은 피그말리온이지만, 갈라테이아를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은 비너스라는 ‘신’이다. 피그말리온의 능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물이나 공간을 현실처럼 느끼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이 그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게 하는 ‘일루전’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친다면, 비너스의 능력은 사람을 속이는 일루저니즘적인 그림을 ‘마술적인 변형’으로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형상이나 이미지로서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개념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 기원이 아주 이른 시기까지 올라간다. 이집트 신화에 있어 멤피스의 주신인 프타신과 관련된 내용은 늦어도 약 기원전 1200년경에는 이미 정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8) 이 내용은 피그말리온 신화와 어느 정도 그 연관성을 추정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프타 신화에 따르면 세계는 프타신의 인식과 말로써 창조되었다.9) 이때의 인식은 곧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의미하며, 이 이미지가 현실화 되면서 세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프타 신의 말, 이 신성한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성각 문자를 뜻하는데, 성각문자는 개념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곧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형상, 바로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 넣음으로써 현실 세계에 속하는 존재를 ‘창조’한다는 이러한 모티브에 실제로 피그말리온 신화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프타는 대장장이, 조각가, 건축가의 수호신이기도 하였다. 이는 금속가공, 조각, 건축 등과 같은 인간의 창조행위가 모두 장인의 창조적 개념을 전제로 하며, 이후 금속이나 석재 같은 질료를 통하여 그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는 행위의 유사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가진 개념이나 기예 등이 궁극적으로 조각상이나 건축물로 창조될 수 있는 그 신성한 원동력이 바로 프타신이었다.10) 이는 이미지를 통한 창조의 행위가 일찍부터 조각가나 건축가와 같은 장인, 혹은 미술가들과 관련이 있었음을 말해주며, 형상은 인간이, 생명은 신이 부여한다는 피그말리온 신화의 구조를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다.
8) James P. Allen, Middle Egyptian :an introduction to the language and culture of hieroglyphs, New York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 171, (한글 번역본 참조, 역자 : 배철현).
9) 멤피스의 프타 신전에 세워졌던 ‘샤바카석(Shabaka Stone)’ 마지막 부분에는 “그(프타)가 바로 이 심장과 이 혀를 통해 모든 신들과 생명의 힘(카)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존재이니라.”라는 내용이 있다.; 위의 책, p. 172에서 재인용.
10) 위의 책, pp. 171∼172.
Jean-L?on G?r?me, Pygmalion and Galatea, ca. 1890
<그림 3> 피그말리온(장 레옹 제롬, 1890) Pygmalion et Galat?e, oil on canvas, 94x74 cm
프타신과 마찬가지로 ‘창조 행위’를 주관했던 피그말리온 신화의 비너스는 후대의 피그말리온 신화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그 능력이 점점 축소된다. 결국에는 형상을 만들고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마저도 ‘미술가의 능력’, 그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인 미술가가 신의 능력까지도 아우르게 된 것이다.
장 레옹 제롬이 제작한 두 점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인식할 수 있다<그림 3>. 1890년의 작품에서는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아프로디테의 모습이 화면 오른쪽에 작은 천사의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는데, 신의 전능함과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장 레옹 제롬이 제작한 동일한 제목의 다른 작품은 이러한 천사의 모습마저도 사라지고 조각가와 작품만이 남는다. 피그말리온 신화의 성격이 신과 미술가, 미술작품이라는 3원 구조로부터 창조자로서의 미술가와 창조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이원 구조로 변모되었음을 드러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신화적인 요소가 퇴색된 이러한 새로운 구도의 탄생은 피그말리온이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에도 등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1913년 발표된 버나드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은 중년의 독신인 음성학자(音聲學者) 헨리 히긴즈가 우연히 만난 꽃파는 소녀 일라이자의 심한 사투리를 3개월 내에 고쳐서 후작부인으로 행세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고 친구 피칼링 대령과 내기를 하여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후작 부인 일리이자’는 하나의 작품이며, 이것은 헨리 히긴즈라는 새로운 피그말리온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미술가들이 자신을 ‘창조자’로서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를 예찬하는 찬송가 『파라고네(Paragone)』에서 “화가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태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주(主)이다. 만약 화가가 자신이 사랑할 만한 미인이 보고 싶다면, 그는 자기 힘으로 그들을 불러낼 수 있으며, 만약 무섭거나 어리석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정말 동정할 만한 괴물들을 보고 싶다면, 그 자신이 그들의 주군이며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1)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는 알브레흐트 뒤러는 1500년의 ‘자화상’에서 자기 자신을 주 예수 그
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그림 4>.
<그림 4> 자화상 (알브레흐트 뒤러, 1550년) Albrecht D?rer selfporitrait
이 역시도 화가인 뒤러가 ‘창조주’로서 자아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2) 고대의 한 작가인 필로스트레이트는 자신의 저서『이미지 또는 이코네스』에서 신들은 계절과 계절이 만들어내는 색을 통해 세상을 그리기 때문에 신들도 화가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는데,13) 신이 곧 화가라는 이러한 인식이 화가는 곧 신과 같다는 자기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든 르네상스 이후로 이러한 관념은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후대의 ‘천재’ 개념으로 변모하게 되고, 현대의 미술에까지도 지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1) 곰브리치, 앞의 책, pp. 111∼112.
12) Joseph Leo Koerner, The Reformation of the Image, London : Reaktion Books, 2004, p. 15.
13) 마르틴 졸리, 이선형 역,『이미지와 기호』, 동문선, 1994, p. 73 참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쇼의 희곡은 창조자로서의 미술가와 미술 작품이라는 이원화된 구조를 보여준다.
문제는 이 작품이 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헨리에게 사랑을 느꼈던 일라이자는 그가 자신을 여자가 아닌 실험의 ‘대상’ 으로서만 인식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 그를 떠나게 된다. 대상화된 오브제로서의 여성은 페미니즘 미술 운동이 시작된 이래 미술사 내에서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페미니즘 미술사가인 린다 노클린은 “피그말리온 신화는 남성이 곧 성적으로 지배적인 창작자라는 관념을 훌륭하게 구현한다. 남성-예술가는 생명이 없는 물질로 자신에게 이상적인 성적 대상, 즉 자신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여성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4)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갈라테이아는 처음에 상아로 만들어진 ‘조각상’, 즉 물질이었다. 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여성을 ‘대상화’, ‘물화’시키는 남성 위주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더구나 여기에서 남성인 피그말리온은 이러한 여성의 ‘창조자’로서 등장하며, 이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림 5>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를 그리는 베르나르도 캄피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6세기 후반)
Bernardino Campi Painting Sofonisba Anguissola, c. late 1550s
16세기 후반에 소포니스바 앙귀솔라에 의하여 그려진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를 그리는 베르나르도 캄피」는 여류 화가의 입장에서 피그말리온 신화가 드러내고 있는, ‘창조자’로서의 남성 미술가와 작품의 소재로서 대상화된 여성이라는 구조를 파악하고 이에 문제의식을 제기한 작품이다<그림 5>.
자신을 그리고 있는 스승 캄피의 초상화인 이 작품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의 신화를 암시하고 있다.
즉, 캄피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로, 소포니스바가 그려지는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화가로서의 소포니스바를 ‘창조’하는 데에 캄피가 스승으로서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학자인 메리 게라드에 의하면 소포니스바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으로 여류 화가들이 부딪치는 핵심적인 문제점들 몇 가지를 피그말리온 신화의 구조 안에서 다루려 했다고 생각한다.15)
소포니스바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남성은 창조력을 가진 주체적인 행위자였던 반면, 여성은 남성에 의존해 행동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는데, 이것은 피그말리온 신화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를 시각화시킨 것은 소포니스바가 ‘남권주의 사상’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그 사상이 지배적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일종의 위장술을 사용한 것이다.
캄피가 분명 ‘능동적’이고 전경에 있지만 소포니스바의 초상이 그녀의 스승보다 중앙에 있고 더 크며, 화면에서 더 높이, 더 밝게 그려져 있다. 캄피와 관람자는 모두 사실상 소포니스바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캄피는 피그말리온이 아닌 가짜 피그말리온으로서, 사실은 소포니스바의 창작물이면서도 그녀의 창조자인 양 자신을 드러내는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 한 가지 처리로써 소포니스바는 남성 미술가이자 행위 주체가 자신이 그리는 대상 및 수동적 산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제로 부각시켰다. 만일 소포니스바가 남자였다면 다룰 수 있는 주제의 폭이나 후원자의 폭이 더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여성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기보다 그림에 나오는 대상으로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그녀는 남성이 지배하는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능동적 여성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자기가 살
고 있는 바로 그 문화에 의해 부정되고 있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결국 소포니스바는 복잡하고 역설적인 이 작품을 통해 여성-객체, 남성-주체의 인습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는 메시지를 의식적으로 작성했다고 할 수 있다.
14) 스티븐 컨 저, 남경태 역, <문학과 예술의 문학사>, 휴머니스트, 2005, p. 235 참조.
15) Mary D. Garrard, “Here’s Looking at Me: Sofonisba Anguissola and the Problem of the Woman Artist”, Renaissance Quarterly XL VII, no 3 (Autumn 1994), pp. 556-622 요약.
4. 감상자로서의 남성과 감상대상으로서의 여성
조안의 이야기에서는 피그말리온 신화의 경우와는 달리, 창조자와 감상자, 작품으로 구성된 3원 구조가 나타난다. 그림속의 여인 진진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사람은 신령스러운 화가이다. 그런데 진진을 그린 이 화가는 굳이 그녀를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여인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감상자인 조안이며,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도 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안의 이야기에서 ‘살아난 그림 속의 여성’ 모티브는 생명을 주는 ‘창조’의 행위보다는 ‘감상’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피그말리온 신화가 창조자와 창조된 여성 사이의 관계를 다룬 것과는 달리, 조안의 신화에서는 감상자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라는 이원적 구조가 핵심적으로 부각된다.
감상하는 남성과 감상되는 여성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보다’라는 행동을 취하는 남성의 능동성과 ‘보여지다’는 대상의 입장에 놓인 여성의 수동성으로 이해된다.
1971년 발표된 존 버거의 Ways of Seeing 이나 로라 멀비의 『시각적 기쁨과 서술적 영화』는 미술 작품, 광고 카피, 영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들과 감상자들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들이 내린 결론은 남성 감상자가 스스로의 환상을 작품 속의 여성에게 투영함으로써, 자신의 관음증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이때 작품 속의 여성은 지배적인 남성의 시선을 위한 성적 대상이 된다.16)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러한 지배와 종속, 능동과 수동의 이원화된 구조는 피그말리온 신화의 창조자와 창작된 대상으로서의 여성 관계에 있어서도 유효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안의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감상자와 감상 대상의 능동성과 수동성 관계가 반드시 절대적이지는 않다. 여인 진진과 결혼한 조안이 이 이야기 안에
서 주도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차적으로 친구에게 잘못 인도된 그는, 그림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진진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림에서 살아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귀신’)가 그 여성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심리로 확대 변형되면서 감상자와 감상되는 대상의 이 새로운 구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조안 이야기처럼 ‘그림 속에서 살아난 여성’의 모티브가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안정지(顔廷之, 384-456)는 애첩을 잃고 난 후 어느 날 밤 그녀 생각에 마음이 산란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한 여인이 침상 머리맡의 병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인이 다가오면서 무거운 병풍이 그를 덮쳤다. 이 악몽 같은 일이 있고 나서 안연지는 병이 들어 곧 죽었다.17)
또『양태진외사(楊太眞外史)』에는 채색 환영이라 불린 병풍 하나가 나온다. 수 문제의 명을 받아 제작된 이 병풍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미인들이 그려져 있다. 수정, 진주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보석이 여인들의 옷에는 물론 손에 든 물건과 악기에도 장식되어 있었다. 이 병풍에 여인들을 표현하는 초인적인 솜씨는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작되자마자 수나라는 멸망하였고, 그 당시 병풍의 주인이던 의성공주는 북방의 오랑캐에게 비참하게 죽었다.
당나라가 건국된 다음 이 병풍은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는 병풍을 자신의 침상에 둘러 세웠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 눕자마자 역사상 유명한 미인들이 모두 병풍에서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고대 초(楚)나라 궁전에서 새롭게 도착한 수십 명의 가녀와 무희들이 양국충의 집안과 당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의 노래를 불렀다. 양국충은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마지막 여인이 병풍 속의 원래 자리로 돌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즉시 병풍을 접어 창고에 처넣었다.
그러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귀비는 죽임을 당했으며, 당은 두 번 다시 국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18) 물론, 이들의 신비로운 경험은 꿈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이야기 자체로는 환상과 실제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악몽에서 깨어난 이후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상황들의 원인이 이러한 그림이 가지고 있는 마력에 기인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환상은 실제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러한 믿음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림의 여인은 일단 생명을 얻게 되자 찬탄을 받는 수동적인 대상이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면서, 감상자와 감상 대상간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이러한 사건 전반은 그 그림을 창조하고 주술로 여인을 불러낸 신령스러운 화가에 의해 꾸며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화가에 대한 감상자의 비밀스러운 의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핵심적인 것은 생명을 부여 받은 작품과 그로 인하여 영향을 받게 되는 감상자이다.
그림 속의 여성들이 보여주는 수동성의 거부라는 변형은 필연적으로 불행한 결말로 나타나며,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죽음과 파멸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남성 감상자는 미술 작품의 일루저니즘적인 표현이 지닌 당혹스럽고 신비한 힘에 대단히 상처받기 쉽다.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남성 감상자들의 불안하고 두려운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9)
이러한 남성의 불안은 앞에서 소개했던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으로 표상된다. 그는 온몸이 마비되어 그림의 미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오가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걸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작품을 감상하는 모든 감상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슷한 유형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성행한 점, 실제로 사녀화의 전통이 당나라 시기 이후로 중국회화의 전통에서 미미하게만 이어져온 점 등은 이러한 관념이 어느 정도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기괴한 이야기들을 문헌으로 옮긴 중국의 저자들도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가 일어난 것이라고 믿었고, 감상자의 두렵고 불안한 심리를 감수하면서까지 화가들이 굳이 ‘사실적’인 미녀화를 그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인화의 수가 서양에 비하여 월등하게 적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16) Laura Mulvey, Visual and Other Pleasure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c1989; 존 버거, 편집부 역,『이미지-시각과 미디어』, 동문선, 1990.
17) 우훙, 앞의 책, p. 130.
18) 위의 책, pp. 130∼131.
19) 우훙, 앞의 책, p.132.
결국, 이야기 안에서는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요청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여성, 그 자체이기도 한 그림을 치워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국충은 병풍을 접어 창고에 넣어둠으로써 그림의 감상자 역할을 포기하고 그것의 나쁜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다. 당의 현종도 비슷한 사연이 얽힌 불길한 그림을 완전히 태워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안의 이야기에서는 감상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 모색된다. 그것은 바로 마술적 변형을 역전시켜 살아난 이미지를 그려진 이미지로 다시 환원시키는 것이다. 진진의 존재는 ‘사실’에서 다시 ‘사실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마술적 변형의 증거로 병풍 안에 아이의 모습이 진진과 함께 나타나기는 하지만, 모든 불안한 상황은 종료된 것이다. 그녀는 이제 하나의 ‘그림’일 뿐이며 더 이상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또한 감상자는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감상자가 다시 주도권을 되찾았다고 해서, 감상자가 그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영구적으로 획득한 것은 분명 아니다. 이미 마술적 변형을 겪은 감상자로서는 언제나 그림 속의 여인이 살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림 속에서 살아나온 여인의 모티브는 인간의 심리적인 환
영일 뿐이며 실제와 사실의 경계는 언제나 명확하다는 강조가 지속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포송령의『요재지이』에 나오는 ‘화벽(畵壁)’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감상자가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림 속의 여인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조안의 신화 구조를 역전시킨 형태로 보여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실제와 환영의 경계가 무너지고, 감상자와 그림 속의 여인을 다루고 있다는 점, 감상자가 현실세계로 들어온 이후에 그림 속 여인의 머리 형태가 변형됨으로써 마술적 변형이 계속 유효하다는 점 등에서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 덧붙여지는 말이다.
"사람에게 음탕한 생각이 들면 곧 갖가지 외설스러운 정경이 나타나게 되고, 음란한 마음이 생기면 또 온갖 가공할 환영이 생겨나게 된다.(...) 환상이 사람의 의념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은 진정 도를 깨친 사람의 말이다.20)"
이러한 신비한 체험이 결국 인간의 심리적 작용으로 인하여 생기는 착각일 뿐 결코 실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시함으로써 환영과 실제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고 공고해진다.
이제 환(幻)의 세 번째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것은 환영과 환각의 다른 두 개념으로 통합되어 버렸다. 인간은 그림 속의 여성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도(道)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이러한 환영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0) 포송령 저, 김혜경 역,『요재지이』 1, 민음사, 2002, p. 34.
5. 감상자로서의 창조자와 창조자로서의 감상자
피그말리온 신화에서는 피그말리온의 창조자로서의 성격이, 조안 이야기에서는 조안의 감상자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피그말리온은 대리석 처녀의 상을 만든 창조자였지만, 동시에 유일한 ‘감상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감상자로서 조안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기까지 하였다. 그의 감상은 ‘본다’는 시각적인 행위에 멈추지 않고 3차원의 조각상인 갈라테이아를 ‘쓰다듬고 입맞추는’ 촉각적인 행위까지 이어진다. 이에 반해 조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은 2차원의 회화이기 때문에 감상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행위에 머무르게 된다.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남성과 여성의 수동성 및 능동성의 대응 관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감상 행위의 차이로부터 연유한 점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피그말리온의 감상자로서의 성격은, 미술 작품에 있어서 1차적인 감상자가 작가 자신임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작가의 감상 행위는 이미 창작의 행위 자체에도 포함되어 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표를 충실히 달성하기 위하여 작가는 틈틈이 작업을 중단하고 작품을 꼼꼼히 살피며, 이는 곧 ‘본다’라는 감상행위의 일종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미술가의 작업과정에는 창조와 감상의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조안 역시 기본적으로는 감상자이지만 여인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행위에 일정 부분을 담당하는 ‘창조자’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물론, 그는 피그말리온처럼 직접적으로 형상을 창조하는 기술적인 측면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타 신화에서 모든 창조 행위는 머릿속의 ‘생각’과 ‘말’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던 것처럼, 그림 속의 여인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조안의 생각과 100일 동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곧 진진이 생명을 얻는 발단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진진의 ‘창조자’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작품의 창조는 작가의 몫만은 아니다.
H.G. 가다머가 “예술은 작품과 감상자의 부단한 소통을 통하여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21)라고 말하기도 한 것처럼, 작품의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 생산을 통해 그 작품에 정체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며, 이것은 곧 ‘작품’의 창조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미술 작품을 둘러싼 핵심적인 두 주체인 작가와 감상자의 명확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 논의가 이 두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미술작품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가지는 시대를 초월하는 어떠한 보편성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겠다.
21) H.G. 가다머, 이길우 역,『진리와 방법 :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문학동네, 2000, p.15.
6. 결론
초기의 피그말리온 신화는 인간의 능력과 신의 능력을 명백하게 구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사람이 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마술적 변형의 최초 계기는 분명 인간인 피그말리온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인간’인 피그말리온의 작품이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비록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이상이자 목표라 할 수 있다.
결국, 피그말리온 신화는 미술가들의 이러한 욕구와 기대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신화로 변형되었고, 끊임없이 미술가들에게 창작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의 전능한 능력이 미술가의 능력으로 통합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거의 신과 유사한 ‘창조자’로서의 미술가의 자기 인식이 확립된다.
반면, 조안의 신화에서 미술가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며, 감상자와 작품의 관계가 핵심을 이룬다. 감상자는 ‘진짜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진짜’가 됨으로써 그림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과 제어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두려움은 물론 그림을 파괴하거나 감상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그림을 치워버리면 해소된다. 그러나 감상자들은 결코 감상을 포기하지 않으며,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그림 속에서 살아난 여성을 다시 그림으로 환원시킨다. 또한 두려움을 가능한 한 축소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경험은 단지 인간의 의식적 작용이며, 실제와 환영의 경계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고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환시킨다. 피그말리온이나 조안의 신화가 기존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용되고 새로운 의미 부여를 통한 재창조의 과정을 겪는 것은, 미술, 미술 작품, 그리고 그와 관련된 제반 사안에 관한 인간의 인식과 관념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며, 또한 기존의 개념을 비판하거나 확장하기 위한 수정, 혹은 보완 작업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렇게 개별적인 문화적 전통 내에서 발생한 피그말리온 및 조안의 이야기나, 조안의 이야기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 발생한 무수한 이야기들이 미술에 대한 인간의 서로 다른 인식과 특징들을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그 안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공통점들이다. 지역적, 시간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신화는 사실주의적 이미지의 마술적 변형이라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 실제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미술 작품’은 살아 움직이지만 않을 뿐 실제 세계와 극도로 유사하다. 이러한 작품을 두고 창조자이든, 작가이든 이 화면 안의 세계가 생명력을 얻음으로써 실제 세계와의 간극이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상상을 공통적으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세부적인 내용의 전개나 이러한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서로 강조점을 두는 부분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상 상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구성 요소로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하나의 작품에 있어서 감상과 창조, 감상자와 창조자의 구분은 굉장히 모호하며 사실상 작품의 완결을 위해서는 양자가 모두 중요하다는 현대적인 관점이 몇 백, 혹은 몇 천 년의 차이를 뛰어넘어 과거의 신화들에 등장한다는 점 역시도 놀랍다.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신화를 해석하는 주체인 우리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 잣대로써 이 신화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다. 그러나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이야기에서 이미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 역시도 인간의 보편성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물론 이때의 보편성이란 생물학적인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본능과 문화적 환경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낸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성격을 띤다. 결국, 피그말리온과 조안의 이야기라는 동서양 두 신화간의 대화를 통해 미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가지는 바로 이러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보편성의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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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Gallerary of Art (www.wga.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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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포트 공모대회 장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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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昉
簪花仕女圖
周昉生卒年不詳,又稱周景玄,字仲朗。京兆(今陝西西安)人。唐代?家。
他出身官宦之家,故他的?自然而然就有一種貴族風格。曾官至宣州長史。他擅?肖像?,上承六朝顧愷之和陸探微的?純細?遺風,其?風?「衣裳簡勁,彩色柔麗,以?厚?體。」唐末?評家朱景玄曾說:「周昉之佛像、?仙、人物、仕女等?,皆屬神品。」
周昉《簪花仕女?》
張萱
張萱,京兆(今陝西西安)人,生卒年不詳,是一位唐朝的宮廷?家。
他的藝術創作活動主要集中在唐開元、天寶年間(713-755),張萱供奉於內廷,在集賢院中任?直,司宮廷?家之職。他以善?貴族仕女、宮苑鞍馬著稱,他與稍後於他的仕女?家周昉在?史上相提?論。他的作品今已無一遺存。歷史上留下兩件重要的摹本:一是傳說宋徽宗臨摹的《?國夫人游春圖》卷,一是《搗練圖》卷。
張萱《?國夫人游春圖》,宋摹本
張萱《搗練圖》,宋摹本
《搗練圖》(局部) . 知名於貴族仕女、宮苑鞍馬
?壁。 蒲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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