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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작에 관한 이야기 모음

Bawoo 2017. 6. 17. 23:55


역사에 남을 위작생산자들, 그들은 누구인가?

 

글|홍경한, 월간[퍼블릭아트] 편집장


세계적인 위작전문가였던 '반 메헤렌'은 네덜란드 화가인 베르메르의 작품을 다수 위조했고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조차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그곳에서 운명했다.(법정에서 메헤렌의 위작을 감정 중인 전문가들) 

 

우리가 위작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대게 금전적인 이득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미술가인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 씨가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위작 공모에 가담하게 된 배경도 결국 돈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며 모 매체에서 진위 의혹을 제기한 박수근의 45억원짜리 경매낙찰품 <빨래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 역시 국내 최고가라는 금전적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진위여부로 논란이 일고 있는 반 고흐의 템페라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에 대해 대중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고흐의 작품이 한국인의 손에 있다는 흥미로운 소스와 함께 그것이 진품일 경우 1000~3000억 원이라는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을 호가할 것이라는 언론보도 탓이 크다.

 

위작자들의 세 가지 공통점

역사적으로 위작자들이 가짜 작품을 생산하는 이유가 대체로 '돈'때문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경제적 이윤만을 목적으로 그러한 행위들을 자초해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의 그림을 똑같이 모방해 내다 파는 생계형 위작범들이 많았음은 사실이지만 반면 미술평론가들이나 미술관, 전문 화상들을 속여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부러 위작을 만들어 파는, 비교적 ‘낭만적인’ 가짜 미술품 생산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창작한 그림이나 조각품으로는 인정받기 어렵지만 진짜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역대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위조해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만족하려 했던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상 뛰어났던 가짜 미술품 생산자들을 보면 특이한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음에도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자신들이 그린 그림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에 비통해 했으며 진짜보다 더욱 진짜같이 만들기 위해 상당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였음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반 메헤렌’처럼 미술평론가들의 거만함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것이 증오심이 되어 보란 듯이 위작을 만들어냈던 자가 있었는가하면 화가를 착취하는 미술상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위작을 본업으로 삼았던 ‘톰 키팅’이나 20세기 초 최고의 위작전문가라 불렸던  ‘알체오 도세나’ ‘에릭 헵번’처럼 위작 사실을 하나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길 원한 사람도 실재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교합점은 그들이 아무리 기가 막힌 위작을 생산해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원작자들이 지닌 위상을 결코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과 말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공통분모로는 이들의 직업이 작가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예로 ‘엘미르 드 호리’는 영화감독이었으며 ‘케네스 월튼’은 소프웨어 제작자이자 변호사였고, ‘빌라스 리카이트’는 하버드 의대 교수, ‘로다 말스캇’은 미술품 보존 수리 전문가, ‘오토 와커’는 전문 화상이었다. 재주가 너무 많아도 박복하다는 옛 어른들의 격언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세계 최고의 위작 전문가들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위작을 만들어 팔았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이다. 유명한 비평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잠자는 큐피드>라는 작품을 만들어 땅에 묻어두었다가 꺼낸 후 고대 유물이라며 로마의 ‘산 조르조’ 추기경에게 팔았다. 따라서 위작은 이미 15세기 르네상스시대부터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가짜미술품이 본격적으로 감정사들과의 한판 대결을 시작하게 된 시점은 위작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19세기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엔 실로 ‘대단한’ 위작자들이 출현하게 되는 데, 위작전문가들에겐 매우 달콤한 ‘유혹의 시기’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유럽과 미국에는 런던 국립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뉴욕 메트로미술관 등 대형 국립미술관들이 속속 들어섰고 이들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수집하려고 열띤 경쟁을 벌였다. 이는 곧 귀한 작품들을 컬렉션하려는 미술관들의 움직임은 곧 위작 전문가들에겐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 

 

해당 시대에 득세한 위작자들 중에는 ‘조반니 바스티아니니’라는 인물이 있다. 이탈리아 출생인 그는 잘난척하는 미술전문가들과 권위적인 행동을 보이던 미술관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가짜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못내 궁금해 하던 끝에 그는 한 가지 실험을 계획했고 그것은 가짜 유물들을 만들어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후 고대 유물이 발견된 것처럼 속이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바스티아니니가 감춰둔 조각들을 찾아내곤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며 흥분했으며 당대의 내로라하는 미술사가들도 그의 가짜 작품을 진품이라 감정하곤 했다.

 

한 예로 그가 가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 부인의 흉상을 만들자 한 유명한 미술사가는 15세기 피렌체 조각의 걸작이라고 상찬해 마지않았으며 루브르박물관은 위조된 작품을 진품으로 판정, 거금을 들여 구입하고 말았다. 이는 바스티아니니의 인생에 있어 기리 남을 속임수의 백미였다.

 

바스티아니니가 사망한 후 10년 뒤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될 가짜 미술품 제작자가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Cremona)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알체오 도세나’. 도세나가 만든 가짜 중세 조각상들은 워낙 완벽해서 클리블랜드 미술관, 세인트루이스 시립미술관, 뉴욕 프렉 컬렉션 등 수많은 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물론 누구도 위작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의 가짜들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진품’으로 둔갑한 채 팔려나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이유로 그의 행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도세나 스스로 판사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였다. 도세나는 죽은 아내를 위해 장례식을 화려하게 해주고 싶었으나 화상들이 매우 적은 금액만을 지급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홧김에 지금까지 가짜 미술품을 만들어 팔았다는 사실을 고백해버렸다. 가짜를 거금에 구입했던 미술관들은 난리가 났지만 고백의 대가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위작범들의 주요 대상이다. 위작을 만드는 사람들은 국경과 시대, 장르를 넘나들며 르네상스 이후 베르메르, 렘브란트는 물론 르누아르, 고흐, 샤갈, 피카소, 달리와  같은 작가들의 그림을 위작했다. 현재에도 다수의 위작이 시장에 나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Crucifixion>

 

속이고 또 속이고…반전의 극치 ‘반 메헤렌’
누군가 위작의 역사를 기술한다고 할 때 ‘반 메헤렌’을 빼놓는다면 그것은 쭉정이에 불과할 것이다. 멀쩡하게 화가생활을 하며 개인전도 두 번이나 열었던 반 메헤렌이 위작의 길로 들어서도록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베르메르(네덜란드의 국보급 화가) 전문가이자 평론가였던 ‘아브라함 브레디우스’ 박사였다. 지금도 많은 화가들이 평론가에 대해 심드렁한 입장인 건 사실이지만 메헤렌은 유독 그의 거만하고 권위적인 행동에 환멸을 느꼈고 환멸은 증오심이 되어 그를 궁지에 빠트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브레디우스의 전문분야인 ‘베르메르’의 그림을 만들어 감정을 받아 보는 것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30여 작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베르메르’의 그림 대부분이 일상 소품들을 이용한 실내화이지만 이전에는 종교를 주제로 여러 편의 그림을 완성했을 거라고 믿고 다양한 방법으로 베르메르의 그림을 찾았다. 브레디우스 박사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확인된 것은 1901년 자신이 진품이라고 인정한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있는 그리스>가 유일해 적잖이 실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메헤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새롭게 발견된 작품이라며 자신이 그린 가짜 베르메르의 그림 <에마우스의 제자들>을 공개했고, 83세의 노 평론가 브레디우스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즉각 진품으로 인정해버렸다. 메헤렌이 속으로 쾌재를 부른 것은 당연했다. 가짜를 팔아 부자가 된 것 보다 꼴 보기 싫던 브레디우스를 속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메헤렌의 인생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베르메르’의 작품 6점 중 하나를 히틀러의 후계자라 불리던 ‘헤르만 괴링’에게 팔아치웠는데 이게 그만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이 패전하자 네덜란드는 자국의 국보급에 해당하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나치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그를 국가반역죄로 체포했다. 당황한 메헤렌은 부득이 이 혐의를 벗기 위해 자신이 그린 그림이 위작이었음을 법정에서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국가반역죄보다는 가짜 미술품을 만든 죄가 더 가볍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사형당할 위기를 넘기자 메헤렌은 갑자기 ‘괴링을 속인 남자’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정작 속은 사람은 메헤렌 자신이었음을 머잖아 깨달아야 했다. 그림을 살 때 괴링이 지불한 돈이 위조화폐였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재능, 그러나 불우했던 위작전문가들

이밖에도 근현대를 아울러 뛰어난 감각의 위작자들은 꽤나 많았다. 이탈리아의 ‘바스티아니니’처럼 미술상들이 화가를 착취하는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가짜 그림을 만들어 마구 뿌렸던 영국의 ‘톰 키팅’, 누구보다 위작법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영국의 ‘에릭 햅번’, 20세기 최초의 2인조 위조전문단인 영국의 ‘존 드류’와 ‘존 마이어트’, 도둑이자 승려였으며 위조화의 대가였던 중국의 ‘창 디아 치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물 ‘윌리엄 블런딜’, 로댕 조각 위조 전문가였던 프랑스의 ‘기하인’, 현대미술품 위조의 천재라 불렸던 헝가리의 ‘엘미르 드 호리’등, 전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말년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위작에 손을 떼고 본연의 창작자로 돌아갔지만 인기를 얻지 못하거나 궁핍하게 살다가 감옥에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기도 했다. 실제로 ‘바스티아니니’는 38세에 단명했으며 자신이 속였다고 생각한 평론가가 알고 보니 갤러리와의 비밀계약에 따른 수수료를 받으려는 마음에 일부러 속아주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알체오 도세나’는 나폴리와 베를린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다가 궁핍한 생활 끝에 자선병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했고 ‘반 메헤렌’ 역시 결국 감옥에서 임종을 맞았다. 사기에 관한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존 드류’도 여자 친구의 신고로 말년을 옥살이로 보내야 했으며 ‘고흐’의 해바라기를 위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화가 ‘슈페네케르’마저도 끝내 고흐가 누렸던 명성은 얻지 못한 채 은퇴한 미술학교 교사이자 불운한 화가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잭슨폴록의 그림마저 위작을 할 수 있었던  ‘엘미르 드 호리’는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가짜를 만들 때의 감각과 명성이 자신의 창작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의 위작문제는 거의 돈과 관련되어 있을 뿐 외국의 예에서처럼 자신의 그림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나 콧대 높은 평론가들을 한방 먹여주려는 마음에 위작을 그리거나 뻔뻔하게 판정해달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타인의 명예와 공신력을 이용해 한 푼이라도 벌어보자는 속셈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선 그다지 낭만적이지는 않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추가하자면 스스로 위작을 만들지 못하는 가짜미술품 전문가들은 아시아(중국, 대만, 인도, 동남아 등)를 위작 공급지로 활용하고 있으며 갈수록 한국이나 일본을 위작 유통의 거점으로 확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대만, 인도를 공급선으로 하는 까닭은 전통적인 붓질을 가르치는 학교가 서구에 비해 많고 실력도 탁월하기 때문이며 한국이나 일본을 유통의 핵으로 삼는 이유는 진품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감정 시스템의 부재와 그것을 공론화하길 꺼려하는 허술한 시장구조가 상존함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보다는 지나치게 보증서를 중시 여기는 민족성을 잘 알고 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계약서, 권리증, 보증서 등 합당하다 인식되는 서류만 있으면 작품이야 어떻든 진품으로 인정해버리고 마는, 전통적으로 서류에 목을 매는 우리의 정서를 매우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작계의 거물이었던 ‘빌라스 리카이트’와 ‘엘리 사카이’ 등이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작품을 팔려 했고 실제로 팔았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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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작자 에릭헵번이 자서전을 통해 '어느쪽이 진짜일까 맞춰보라'며 제시한 코로의 소묘(왼쪽)와 흉내내 그린 자신의 소묘, 사진은 한길아트 제공.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인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가 소년을 그린 진짜 소묘는 어느 쪽일까."
전설적인 위작자 중 한 명인 영국의 에릭 헵번(1934-1996)은 1991년 펴낸 자서전 '곤경에 빠져서'에서 미술품 감정가 등을 조롱하듯이 코로의 소묘와 자신의 소묘를 나란히 제시하며 이런 퀴즈를 냈다.

헵번은 1963년부터 1978년까지 루벤스, 반다이크 등을 흉내 낸 회화 작품과 조각품 500여점을 만들어 유명 경매사와 미술관 등에 유통시킨 위작자로, 자신의 대규모 위작 사실이 들통난뒤 "위작 유통의 책임은 감정 전문가들과 화상에게 있다"며 도발적인 논리를 제기했다.

"가짜 작품은 없다. 가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술품에 붙은 라벨일 뿐이고 정작 필요한 일은 올바른 라벨을 붙일 수 있도록 전문가들을 교육하는 일이다"라는 주장이다.

국내에서 최근 박수근이나 이중섭을 둘러싼 위작 논란이 수차례 제기됐듯이 위작 문제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엄연한 역사다.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은 위작 전시실을 마련해놓고 있는데 이곳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조반니 바스티아니니(1830-1868)의 위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위작의 역사를 보면 소송 등에 휘말린 위작자가 자신의 위조품에 대해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감정가 등 미술 전문가들을 상대로 자신의 위작 능력을 증명하려고 소동을 벌인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네덜란드의 위작자 판 메이헤런(1889-1948)이 그런 예다.

2차 세계대전후 연합군은 독일 나치 정권이 보관하고 있던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발견했는데 네덜란드는 그림의 첫 출처가 메이헤런인 것을 확인하고 1945년 그를 나치 협력죄로 체포했다.
메이헤런은 발뺌을 하다가 결국 자신이 베르메르를 흉내내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사법 당국은 그가 나치 협력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 한다고 의심했고 미술관도 그의 위작에 대해 진품이라는 주장을 펴 메이헤런은 '누명아닌 누명'을 벗기 위해 옥중에서 2개월만에 대형 위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10만달러에 팔린 조각 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위작자 알체오 도세나(1878-1937)는 유통업자들에게 화가 나 위작 사실을 고백했으나 전문가들이 믿지 않자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하기도 해다.

위작자들이 영화 소재가 된 일은 또 있다.

위작 규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엘미르 드 호리, 페르낭 르그로, 레알 르사르 등 3명의 동업자와 관련된 얘기로, 오손 웰스에 의해 '거짓과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이들은 1961-1967년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 위작 판매로 6천만달러를 벌었을 정도로 위작 규모가 컸다.
드가, 모딜리아니, 렘브란트 등 121명을 흉내 낸 가짜 작품 2천점을 만든 영국인 톰 키팅(1917-1984)의 경우는 돈만 따지는 화상 등 미술계에 복수한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인 위작에 나섰지만 물감을 칠하기 전 자신의 위작 밑바탕에 아예 '가짜'라고 써놓는 등 '양심범(?)'으로 통하는 위작자다.
그는 1976년 꼬리가 잡히자 기자회견까지 하고 '커밍아웃'해 방송 프로그램의 그림 해설사로 나설만큼 유명세를 탔고 양지의 화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밖에 반 고흐의 위작을 유통시킨 오토바커(1898-1970) 등 위작의 사례는 부지기수다.

위작과 함께 미술사를 장식하는 음지의 역사는 도난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걸려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1911년 도둑맞았다가 2년뒤 돌아오게 되는 과정에서 세계적으로 더욱 주목받는 그림이 됐다고 하며 뭉크의 '절규' 등 도난의 흔적이 남은 유명 작품은 한둘이 아니다.

국내의 경우도 오지호 화백의 그림 '항구'가 모교인 전남의 한 초등학교에 걸려있다가 1986년 도난돼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며, 1990년에는 힐튼호텔 로비에 걸린 김흥수의 '나부좌상'을 훔친 범인이 화랑에 작품을 팔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이연식이 쓴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는 미술사의 음지 영역이라 할수 있는 위작과 도난에 대해 이처럼 풍성한 얘깃거리를 담고있는 책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경매가 미술의 신화적인 권위를 만방에 과시하고 그런 권위를 공고히 하는 기제라면 위작과 도난은 권위를 뒤흔드는 장치"라며 "불운에 대한 기록이지만 미술품과 미술계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한다"고 저술 동기를 설명했다.

한길아트. 344쪽. 1만5천원. (서울=연합뉴스) 경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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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타고난 운명 짝퉁시비

 

  판 메이헤런의 페르메이르 위작 <엠마오의 식사>, 1937, 유화, 117x129㎝, 보이만스 미술관

 

르네상스 이전 ‘베끼기’는 배움의 방편 “노략질” 저주속 관대한 시각도 있지만

큰돈 오가는 시장에선 어림도 없는 일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져온다.

 

“(19세기 프랑스 풍경화의 대가) 코로는 평생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 가운데 5천여 점이 미국에 있다.”

 

코로의 경우 진품보다 위작이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나온 것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보아야 한다는 충고다. 꼭 코로뿐이랴, 피카소, 달리, 샤갈, 미로, 반 고흐 등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미술가치고 위작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을 지낸 토머스 호빙은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미술품의 40% 가까이가 위작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야스다 화재가 1987년 4천만달러에 구입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

출처 추적 결과 위작으로 의심받고 있다.

 

 위작은 생각 밖으로 많이 제작되고 거래된다. 그리고 위작의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됐다. 우리에게는 위작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시장을 꿈꿀 권리가 있지만, 미술시장이 형성된 이래 그런 ‘태평성대’가 온 적은 아직 없다.

 

위작이 따라붙는 것은 어쩌면 미술이라는 예술의 타고난 운명인지 모른다. 모든 미술은 모방에서 출발했다. 세계를 모방하는 것, 곧 베끼기가 미술의 한 본령이다 보니 위작이라는 모방이 그 본령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원작의 개념이 없었던 옛날에는 이런 베끼기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방작(倣作)이라 하여 옛 대가의 그림을 임모하는 게 존경의 표시이자 창작의 한 방식이었다. 서양에서도 거장과 선생의 그림을 모사하는 게 중요한 배움이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조각을 수도 없이 베꼈다. 오늘날 실제 그리스 조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그리스 조각의 성격과 특징을 깊고 광범위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상당 부분 이 모작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조각가로 하여금 이를 베끼게 해 그걸로 자신들의 빌라를 꾸몄다. 동일한 작품이 워낙 많이 베껴지다 보니 원작이 망실되고 모작이 다수 파괴되어도 끝내 살아남은 게 있어 그리스 조각의 특징을 오늘날까지 전하게 된 것이다.


 앨마 태디마의 <행운을!>, 유화, 25.4x12.7㎝, 왕립 컬렉션.

그림 하단에 사인과 함께 위작 방지를 위한 전작번호(CCCXXII)를 써 넣었다..

 

네상스 시대에는 화가가 도제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 자신의 그림을 베껴 스타일과 기법을 익히도록 했다. 잘 베낀 그림은 스승이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가르침의 대가, 그러니까 수업료로 갈음됐다.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이런 모작들이 화가의 진작으로 전승되어 본의 아니게 위작이 되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스승의 그림을 베끼는 전통이 뿌리내린 한편으로, 진품에 대한 존중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 또한 르네상스 무렵이다. 르네상스 들어 고전 부흥의 바람을 타고 로마시대의 조각이 열정적으로 발굴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진품의 가치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미켈란젤로가 몰래 가짜 로마 조각(<잠자는 큐피드>)을 만들어 팔았다는 일화는 당시 시장에 위작이 얼마나 많이 떠돌았는가 하는 사실과, 그에 반해 애호가들이 얼마나 진품에 목말라 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특히 예술가를 공방의 장인이 아니라 천재로 보는 관념이 생겨남에 따라 작품의 고유성과 원작성은 갈수록 중요해졌다.

 

후에 작가 사인의 원조가 되는 표지가 이때부터 나오게 되는데, 이름의 이니셜 A와 D를 이용해 모노그램을 만든 알브레히트 뒤러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자신의 작품을 베낀 위작이 시장에 워낙 많이 떠돌자 뒤러는 성모를 그린 한 판화에 “남의 작품과 재능을 노략질하고 모방하는 자들이여, 저주를 받으라”라는 명문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표지와 사인마저 모방의 대상이 되자 미술가들 가운데는 나름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17세기의 거장 클로드 로랭은 유화를 하나 완성하면 이를 그대로 스케치해 따로 보관했다.

 

위작임에도 진품 행세를 하는 작품이 나올 경우 자신의 스케치 모음과 대조해 시시비비를 가렸다. 영국 화가 앨마 태디마는 1871년부터 작품에 전작번호(Opus)를 도입해 위작의 유통을 막았다. 물론 이 이전에 만들어 판 작품에는 번호를 써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1851년에 제작된 <누이의 초상>을 1번으로 해서 그동안 만든 작품 전체에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뒤 1871년부터는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사인 아래에 반드시 로마숫자로 전작번호를 써 넣었다. 1912년, 죽기 두 달 전에 제작한 유작의 전작번호는 ‘CCCCVIII(408)’이었다.

 

러나 화가에 따라서는 이렇게 애써 작품의 진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인이나 괴짜가 많은 미술 분야의 특성상 위작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피카소는 “훌륭한 위작이라면 거기에 얼마든지 내 사인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코로는 자신의 작품이 많이 모사되는 것은 그만큼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가짜에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태도를 결코 용인하기 어렵다. 시장에서는 미술작품도 하나의 상품인 이상 ‘짝퉁’이 횡행할 경우 커다란 신뢰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고, 신뢰의 위기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양미술사를 돌아보면 워낙 다양하고 다채로운 위작 사건들이 발생해 그 사례를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다. 그에 비해 미술시장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아직 그처럼 다사다난한 위작 시도는 겪어보지 않은 상태다. 다만 우리 미술시장이 최근 급성장하고 있어 더 커진 보상에 대한 기대로 앞으로 일층 정교하고 교묘한 위작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서양미술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위작 미술가 몇몇을 언급해 보면, 오슨 웰스의 영화 <진실과 거짓>의 소재가 된 엘미르 드 호리(전세계의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 평생 1천 점이 넘는 위작을 팔아넘겼으며,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자 그것 또한 속임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위조자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위작임에도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위작 사건의 주인공인 한 판 메이헤런(페르메이르의 국보급 그림을 나치에 판 죄로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그 작품과 보이만스 미술관 소장품 등이 자신의 위작이라고 밝히고 이를 믿지 못하는 전문가들에게 감옥에서 직접 위작을 제작해 보여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인기 작가 카렐 아펠을 전문적으로 위조한 헤이르트 얀 얀선(위조 솜씨가 워낙 탁월해 경매회사 등에서 아펠에게 진위 여부를 물었을 때 아펠이 두 차례나 진품 판정을 내렸다), 도나텔로, 베로키오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위작을 제작해 루브르, 빅토리아 앤 앨버트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판 조반니 바스티아니니(중개상과의 불화가 없었다면 위작이라는 사실이 끝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등이 있다.

 

최근 탁월한 진위 판별력을 갖춘 디지털시스템이 개발되는 등 위작에 대한 미술계의 대응 노력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예술을 오로지 돈으로만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이 모든 수고는 언제라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

 

 
                 
   
    
            


[정보]책 (미술품 속) 모작과 위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