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작자 에릭헵번이 자서전을 통해 '어느쪽이 진짜일까 맞춰보라'며 제시한 코로의 소묘(왼쪽)와 흉내내 그린 자신의 소묘, 사진은 한길아트 제공. |
역사에 남을 위작생산자들, 그들은 누구인가?
글|홍경한, 월간[퍼블릭아트] 편집장
세계적인 위작전문가였던 '반 메헤렌'은 네덜란드 화가인 베르메르의 작품을 다수 위조했고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조차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그곳에서 운명했다.(법정에서 메헤렌의 위작을 감정 중인 전문가들)
우리가 위작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대게 금전적인 이득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미술가인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 씨가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위작 공모에 가담하게 된 배경도 결국 돈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며 모 매체에서 진위 의혹을 제기한 박수근의 45억원짜리 경매낙찰품 <빨래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 역시 국내 최고가라는 금전적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진위여부로 논란이 일고 있는 반 고흐의 템페라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에 대해 대중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고흐의 작품이 한국인의 손에 있다는 흥미로운 소스와 함께 그것이 진품일 경우 1000~3000억 원이라는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을 호가할 것이라는 언론보도 탓이 크다.
위작자들의 세 가지 공통점
역사적으로 위작자들이 가짜 작품을 생산하는 이유가 대체로 '돈'때문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경제적 이윤만을 목적으로 그러한 행위들을 자초해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의 그림을 똑같이 모방해 내다 파는 생계형 위작범들이 많았음은 사실이지만 반면 미술평론가들이나 미술관, 전문 화상들을 속여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부러 위작을 만들어 파는, 비교적 ‘낭만적인’ 가짜 미술품 생산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창작한 그림이나 조각품으로는 인정받기 어렵지만 진짜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역대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위조해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만족하려 했던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상 뛰어났던 가짜 미술품 생산자들을 보면 특이한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음에도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자신들이 그린 그림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에 비통해 했으며 진짜보다 더욱 진짜같이 만들기 위해 상당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였음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반 메헤렌’처럼 미술평론가들의 거만함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것이 증오심이 되어 보란 듯이 위작을 만들어냈던 자가 있었는가하면 화가를 착취하는 미술상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위작을 본업으로 삼았던 ‘톰 키팅’이나 20세기 초 최고의 위작전문가라 불렸던 ‘알체오 도세나’ ‘에릭 헵번’처럼 위작 사실을 하나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길 원한 사람도 실재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교합점은 그들이 아무리 기가 막힌 위작을 생산해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원작자들이 지닌 위상을 결코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과 말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공통분모로는 이들의 직업이 작가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예로 ‘엘미르 드 호리’는 영화감독이었으며 ‘케네스 월튼’은 소프웨어 제작자이자 변호사였고, ‘빌라스 리카이트’는 하버드 의대 교수, ‘로다 말스캇’은 미술품 보존 수리 전문가, ‘오토 와커’는 전문 화상이었다. 재주가 너무 많아도 박복하다는 옛 어른들의 격언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세계 최고의 위작 전문가들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위작을 만들어 팔았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이다. 유명한 비평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잠자는 큐피드>라는 작품을 만들어 땅에 묻어두었다가 꺼낸 후 고대 유물이라며 로마의 ‘산 조르조’ 추기경에게 팔았다. 따라서 위작은 이미 15세기 르네상스시대부터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가짜미술품이 본격적으로 감정사들과의 한판 대결을 시작하게 된 시점은 위작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19세기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엔 실로 ‘대단한’ 위작자들이 출현하게 되는 데, 위작전문가들에겐 매우 달콤한 ‘유혹의 시기’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유럽과 미국에는 런던 국립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뉴욕 메트로미술관 등 대형 국립미술관들이 속속 들어섰고 이들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수집하려고 열띤 경쟁을 벌였다. 이는 곧 귀한 작품들을 컬렉션하려는 미술관들의 움직임은 곧 위작 전문가들에겐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
해당 시대에 득세한 위작자들 중에는 ‘조반니 바스티아니니’라는 인물이 있다. 이탈리아 출생인 그는 잘난척하는 미술전문가들과 권위적인 행동을 보이던 미술관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가짜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못내 궁금해 하던 끝에 그는 한 가지 실험을 계획했고 그것은 가짜 유물들을 만들어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후 고대 유물이 발견된 것처럼 속이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바스티아니니가 감춰둔 조각들을 찾아내곤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며 흥분했으며 당대의 내로라하는 미술사가들도 그의 가짜 작품을 진품이라 감정하곤 했다.
한 예로 그가 가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 부인의 흉상을 만들자 한 유명한 미술사가는 15세기 피렌체 조각의 걸작이라고 상찬해 마지않았으며 루브르박물관은 위조된 작품을 진품으로 판정, 거금을 들여 구입하고 말았다. 이는 바스티아니니의 인생에 있어 기리 남을 속임수의 백미였다.
바스티아니니가 사망한 후 10년 뒤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될 가짜 미술품 제작자가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Cremona)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알체오 도세나’. 도세나가 만든 가짜 중세 조각상들은 워낙 완벽해서 클리블랜드 미술관, 세인트루이스 시립미술관, 뉴욕 프렉 컬렉션 등 수많은 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물론 누구도 위작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의 가짜들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진품’으로 둔갑한 채 팔려나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이유로 그의 행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도세나 스스로 판사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였다. 도세나는 죽은 아내를 위해 장례식을 화려하게 해주고 싶었으나 화상들이 매우 적은 금액만을 지급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홧김에 지금까지 가짜 미술품을 만들어 팔았다는 사실을 고백해버렸다. 가짜를 거금에 구입했던 미술관들은 난리가 났지만 고백의 대가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위작범들의 주요 대상이다. 위작을 만드는 사람들은 국경과 시대, 장르를 넘나들며 르네상스 이후 베르메르, 렘브란트는 물론 르누아르, 고흐, 샤갈, 피카소, 달리와 같은 작가들의 그림을 위작했다. 현재에도 다수의 위작이 시장에 나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Crucifixion>
속이고 또 속이고…반전의 극치 ‘반 메헤렌’
누군가 위작의 역사를 기술한다고 할 때 ‘반 메헤렌’을 빼놓는다면 그것은 쭉정이에 불과할 것이다. 멀쩡하게 화가생활을 하며 개인전도 두 번이나 열었던 반 메헤렌이 위작의 길로 들어서도록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베르메르(네덜란드의 국보급 화가) 전문가이자 평론가였던 ‘아브라함 브레디우스’ 박사였다. 지금도 많은 화가들이 평론가에 대해 심드렁한 입장인 건 사실이지만 메헤렌은 유독 그의 거만하고 권위적인 행동에 환멸을 느꼈고 환멸은 증오심이 되어 그를 궁지에 빠트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브레디우스의 전문분야인 ‘베르메르’의 그림을 만들어 감정을 받아 보는 것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30여 작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베르메르’의 그림 대부분이 일상 소품들을 이용한 실내화이지만 이전에는 종교를 주제로 여러 편의 그림을 완성했을 거라고 믿고 다양한 방법으로 베르메르의 그림을 찾았다. 브레디우스 박사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확인된 것은 1901년 자신이 진품이라고 인정한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있는 그리스>가 유일해 적잖이 실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메헤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새롭게 발견된 작품이라며 자신이 그린 가짜 베르메르의 그림 <에마우스의 제자들>을 공개했고, 83세의 노 평론가 브레디우스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즉각 진품으로 인정해버렸다. 메헤렌이 속으로 쾌재를 부른 것은 당연했다. 가짜를 팔아 부자가 된 것 보다 꼴 보기 싫던 브레디우스를 속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메헤렌의 인생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베르메르’의 작품 6점 중 하나를 히틀러의 후계자라 불리던 ‘헤르만 괴링’에게 팔아치웠는데 이게 그만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이 패전하자 네덜란드는 자국의 국보급에 해당하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나치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그를 국가반역죄로 체포했다. 당황한 메헤렌은 부득이 이 혐의를 벗기 위해 자신이 그린 그림이 위작이었음을 법정에서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국가반역죄보다는 가짜 미술품을 만든 죄가 더 가볍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사형당할 위기를 넘기자 메헤렌은 갑자기 ‘괴링을 속인 남자’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정작 속은 사람은 메헤렌 자신이었음을 머잖아 깨달아야 했다. 그림을 살 때 괴링이 지불한 돈이 위조화폐였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재능, 그러나 불우했던 위작전문가들
이밖에도 근현대를 아울러 뛰어난 감각의 위작자들은 꽤나 많았다. 이탈리아의 ‘바스티아니니’처럼 미술상들이 화가를 착취하는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가짜 그림을 만들어 마구 뿌렸던 영국의 ‘톰 키팅’, 누구보다 위작법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영국의 ‘에릭 햅번’, 20세기 최초의 2인조 위조전문단인 영국의 ‘존 드류’와 ‘존 마이어트’, 도둑이자 승려였으며 위조화의 대가였던 중국의 ‘창 디아 치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물 ‘윌리엄 블런딜’, 로댕 조각 위조 전문가였던 프랑스의 ‘기하인’, 현대미술품 위조의 천재라 불렸던 헝가리의 ‘엘미르 드 호리’등, 전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말년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위작에 손을 떼고 본연의 창작자로 돌아갔지만 인기를 얻지 못하거나 궁핍하게 살다가 감옥에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기도 했다. 실제로 ‘바스티아니니’는 38세에 단명했으며 자신이 속였다고 생각한 평론가가 알고 보니 갤러리와의 비밀계약에 따른 수수료를 받으려는 마음에 일부러 속아주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알체오 도세나’는 나폴리와 베를린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다가 궁핍한 생활 끝에 자선병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했고 ‘반 메헤렌’ 역시 결국 감옥에서 임종을 맞았다. 사기에 관한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존 드류’도 여자 친구의 신고로 말년을 옥살이로 보내야 했으며 ‘고흐’의 해바라기를 위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화가 ‘슈페네케르’마저도 끝내 고흐가 누렸던 명성은 얻지 못한 채 은퇴한 미술학교 교사이자 불운한 화가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잭슨폴록의 그림마저 위작을 할 수 있었던 ‘엘미르 드 호리’는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가짜를 만들 때의 감각과 명성이 자신의 창작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의 위작문제는 거의 돈과 관련되어 있을 뿐 외국의 예에서처럼 자신의 그림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나 콧대 높은 평론가들을 한방 먹여주려는 마음에 위작을 그리거나 뻔뻔하게 판정해달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타인의 명예와 공신력을 이용해 한 푼이라도 벌어보자는 속셈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선 그다지 낭만적이지는 않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추가하자면 스스로 위작을 만들지 못하는 가짜미술품 전문가들은 아시아(중국, 대만, 인도, 동남아 등)를 위작 공급지로 활용하고 있으며 갈수록 한국이나 일본을 위작 유통의 거점으로 확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대만, 인도를 공급선으로 하는 까닭은 전통적인 붓질을 가르치는 학교가 서구에 비해 많고 실력도 탁월하기 때문이며 한국이나 일본을 유통의 핵으로 삼는 이유는 진품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감정 시스템의 부재와 그것을 공론화하길 꺼려하는 허술한 시장구조가 상존함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보다는 지나치게 보증서를 중시 여기는 민족성을 잘 알고 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계약서, 권리증, 보증서 등 합당하다 인식되는 서류만 있으면 작품이야 어떻든 진품으로 인정해버리고 마는, 전통적으로 서류에 목을 매는 우리의 정서를 매우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작계의 거물이었던 ‘빌라스 리카이트’와 ‘엘리 사카이’ 등이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작품을 팔려 했고 실제로 팔았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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