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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재춘이 엄마」

Bawoo 2016. 1. 21. 11:39

윤제림

 

「재춘이 엄마」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 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시_ 윤제림 - 충북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자랐다. 198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미미의 집』 『황천반점』『삼천리호 자전거』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 등과 『젊음은 아이디어 택시다』『카피는 거시기다』 등의 카피라이트 관련 저서를 냈다.

낭송_ 정인겸 - 배우. 영화 '암살' 등에 출연.


배달하며

살짝 맛이 간 비름나물 같은 청산옥 여자가 염천(炎天)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볼 줄 아는 시인! 한국시에 드물게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시인이다. 음률을 속으로 삼키며 산문시 형태로 이끌어 가다가 끝 행에서 목울대를 건드린다. 그래 재춘아. 공부 잘해라!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재춘이, 갑수, 병섭이, 상규, 병호는 말 그대로 미래와 희망의 동의어가 아니고 무엇이랴.
새해 새 달력 앞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 어머니들의 기왓장에 딸의 이름은 없었다는 것! 이 땅의 차별의 한가운데에는 어쩌면 어머니라는 전통 관습의 이름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모성(母性)의 신성성과 그 정체에 대해 새로이 질문을 가한 이론서들이 이 시를 주목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출전_『그는 걸어서 왔다』(문학동네)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