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봄 노래」
낮잠 좀 자려는데
동네 아이 쉬지 않고
대문을 두드리네.
"공좀 꺼내주세요!"
낮잠 좀 자려는데
어쩌자구 자꾸만
공을 넘기는지.
톡톡톡 누가
창문을 두드리네.
"하루해 좀 꺼내주세요!"
아아함, 낮잠 좀 자려는데.
마음껏 꺼내가렴!
대문을 활짝 열고
건들건들 거리로 나섰네.
아아함, 아아함
낮잠 좀 자렸더니.
시·낭송_ 황인숙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자명한 산책』, 『리스본行 야간열차』 등과 산문집으로 『나는 고독하다』, 『인숙만필』, 『해방촌 고양이』 등이 있음.
* 배달하며
이렇게 비권위적인 시도 있습니다. 요 바로 전의 '시배달' 집배원이신 황인숙 선생님의 시입니다. 본인 시는 배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제가 맡고 나서 맨 처음으로 해야지 마음먹었었는데 그만 까먹고는 이제야 찾아 배달합니다(그렇다고 요 다음에 맡을 분이 제 시를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시든지 '시'라고 하는 어떤 '어깨'가 있긴 있는 건데 그 어깨의 '뽕'을 완전히 빼고설랑 허랑허랑 시를, 시가 아니라고들 하면 어때 하는 배짱으로 쓰는 분입니다......만, 이른바 서양말로 리얼리티가 시쳇말로 쌩얼입니다.
'봄 노래'니 모질고 긴 겨울을 이겨낸 뭐 그런 거, '봄 노래'니 꽃도 좀 나오고 희망도 좀 나오는 뭐 그런 거, '봄 노래'니 근면함도 좀 권하고 제때 씨도 뿌려야 한다는 둥 뭐 그런 것 중에 하나라도 몰래 숨겨서 넣어야 할 텐데 당췌 그런 건 없고 낮잠 좀 자렸더니 여러가지가 귀찮게 한다고 투덜대기만 합니다.
암요. 봄이니 낮잠이 좀 옵니까? 맞죠. 헌데 실은 그게 길고 모진 겨울을 이긴 생명이라는 뜻 아니겠어요? 애들 뛰어노니 그게 희망 아니겠어요? '하루해 좀 꺼내달라'고 햇살은 보채니 그게 옛날로 치면 권농(勸農)의 말씀은 또 아닐까요?
봄이 건들건들 대문을 활짝 열고 우리에게로 온다는 말이 이렇게 어여쁠 수가 없습니다. 귀찮다는 듯이 오는 봄, 그렇지만 싫지는 않다는 봄의 얼굴 말입니다. 앗, 근데 벌써 여름 날씨니 앗! 봄은 짧아요.
문학집배원 장석남
출전_ 『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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