蕙園 申潤福의 風俗畵에 나타난 妓女의 이미지 텔링(image telling) *
嚴素姸**
目 次
1. 머리말
2. 朝鮮後期의 風俗畵
3. 蕙園 風俗畵의 特徵
4. 妓女의 이미지 텔링 - 『蕙園傳神帖』을 중심으로
5. 맺음말
1. 머리말
전통회화는 畵材?畵題?畵風??法?畵格 등이 어우러져 意味性과 藝術性을 갖는다. 이러한 그림 속의 妓女를 읽어내려면 먼저 작가[화가]가 妓女의 이미지에 투영한 視覺的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문화적 約定이나 코드로 구성된 소통방식이자 작가가 전하려는 妓女 이미지의 의미이다.
따라서 妓女 이미지는 妓女에 대한 작가의 視覺的 경험을 그대로 再生産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意圖에 따라 再現하고 再構成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朝鮮後期의 時代的 變動狀況이 반영된 風俗畵 가운데 특히, 市井風俗과 妓女의 표현이 두드러진 蕙園 申潤福(1758~?)의 都市 風俗畵에 주목했다. 여기에는 日常에 기반을 둔 妓女들이 蕙園의 관점에 따라 남성들과의 대응관계 속에서 또는 그 자체로 생생한 장면성 속에 살아난다. 당시 ‘方外人’으로 평가된 蕙園은 주류집단(京華世族 및 閭巷人)과 관계한 비주류집단(婦女子 및 妓女)에 근접함으로써 妓女의 이미지를 보다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蕙園이 再現한 風俗畵 속의 妓女 이미지를 통해 그들이 세상(story world)과 소통했던 樣相은 물론 그들의 삶에 공감(empathy)할 수 있는 이미지 텔링(image telling)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에 本稿는 蕙園의 風俗畵에 나타난 妓女의 이미지 텔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절차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먼저 朝鮮後期의 사회적 맥락으로 유행한 風俗畵를 신흥계층의 欲求 및 관념의 변화와 結付해 살펴본다. 작가 蕙園의 관점은 그의 생애사(life history)와 작품의 특징을 통해 고찰할 것이다.
本稿에서 중점을 두고자 하는 妓女의 이미지 텔링은 蕙園의 風俗畵 30面으로 구성된 『蕙園傳神帖』 가운데 妓女가 등장하는 17面을 장소로 분류한 후, 여기서 발생하는 行爲를 중심으로 分析한다. 그 결과 산출되는 妓女의 이미지 텔링을 妓女의 역할의 측면에서 解釋해 볼 것이다.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361-A00013)
** 한국외국어대학교 HK 세미오시스 연구센터 연구교수.
2. 朝鮮後期의 風俗畵
(1) 風俗畵의 流行과 ‘俗畵’
朝鮮時代의 風俗畵는 儒敎의 ‘無逸思想’ 1] 을 根幹으로 한 鑑戒的 效用物로 전개됐다. 즉, 백성들이 노동을 하는 괴로움을 君主가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궁중 歲畵인 耕織圖 계열의 ?無逸圖?와 ??風圖?2]가 주로 그려졌다. 이밖에 궁중 제반 행사를 담은 ?記錄畵?, 양반 관료층의 ?契會圖? 등이 이에 속한다.
1]『書經』, ?無逸篇?. 周成王이 처음 政事를 하게 되자 周公이 안일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 글을 지었다 하는데,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을 돌볼 것과 安逸에 빠지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2]『詩經』, ??風七月篇?. ?風은 周의 國風을 의미한다. 나이 어린 周成王이 즉위하자 武王의 동생인 周公이 攝政을 하게 되면서 그가 어린 조카 成王을 鑑戒하기 위해 지은 詩를 말한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風圖? 또는 ??風七月圖?이다.
[그림1] 樓璹耕織圖傳누숙경직도전, 김홍도, 18세기, 지본담채, 33.6×25.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2] ?風七月圖, 이방운, 18세기, 지본담채, 25.4×20.2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3] 蓮亭契會圖연경계회도 (보물 제871호), 작자미상, 견본담채, 94×59cm, 국립중앙박물관
朝鮮後期의 風俗畵는 英祖(1746~1776 在位)부터 純祖(1800~1834 在位) 초반까지 크게 流行했으며 그 位相 또한 변화한다. 당시의 風俗畵는 지배층의 賤視로 ‘俗畵’라 불렸는데 文氣가 결여된 양반의 風流, 市井의 雜事, 春意 등을 내용으로 했다. 3] 이들은 대개 都市風俗畵 계열의 그림들로 일상의 생활상과 世情을 여과 없이 포착한 것들이다. 당시의 朝鮮은 근대적 소비사회(consumer society)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이때 급속하게 발전한 都市風俗畵는 서울의 도시적 성장 및 광범위한 遊興?消費文化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4]
3]廣意는 일정한 시대의 世情과 風習을 나타낸 그림이며 狹意는 조선후기(1700~1850년경)의 화단에서 眞景山水畵와 더불어 유행했던 畵目으로, 당대에는 俗畵로 통했다.(이원복, ?조선시대 풍속화-그 흐름과 의의?, 국립중앙박물관 편저, 『朝鮮時代 風俗畵』, 6쪽, 삼화인쇄, 2002). 俗畵의 기원과 전개에 대해서는 같은 글 7쪽.
4]근대적 소비문화의 특징 중 주목할 만한 현상은 ‘여가문화의 상업화(the commer- cialization of leisure)’이다. (장진성, ?조선후기 士人風俗畵와 餘暇文化?, 『미술사논단』Vol.24, 한국미술연구소, 2007, 261∼262쪽).
(2) 士人風俗畵와 都市風俗畵의 變化樣相
文人士大夫의 생활상을 그린 士人風俗畵는 士大夫로서 經世濟民의 世情을 묘사하거나 文人으로서의 脫俗과 雅趣를 반영한 것으로, 대개 중국 典故의 餘暇와 交遊를 소재로 한 士人風情, 契會?雅集(士人들의 모임)을 주제로 삼았다. 5] 예컨대, 觀水(瀑/山/月/花)圖?圍碁圖?契會圖?雅集圖?雪中訪友圖?騎驢圖 등이 전형적 畵目이다.
그런데 朝鮮後期의 士人風俗畵는 일련의 變化相을 보여준다. 즉, 士人風情과 契會?雅集 주인공의 ‘朝鮮化’가 이루어지고 紀行寫景, 行旅風俗 등 動的 내용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變化의 배후에는 對內外的 思想?社會?經濟?政治?文化 등의 變動狀況이 자리 잡고 있었다.
5]이원복, 앞의 글, 115∼146쪽 참조.
[그림4] 雪中訪友圖(부분), 조영석, 18세기, 지본채색, 115×57cm, 개인소장
[그림5] 『松都紀行帖』 中 太宗臺, 강세황, 18세기, 지본담채, 32.8x54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6] 朝鮮後期의 變動狀況과 風俗畵
원래 文人士大夫의 日常은 學文과 六禮 6]를 기본으로 餘暇에는 燕居 7] 하며 閑居?獨樂하는 靜的?內的行爲가 일반적이나 朝鮮後期에는 직접 가서 대상을 관찰하고 經驗하는 紀行寫景, 行旅 등의 動的?外的行爲로 변화하게 된다. 그 趣事 또한 豪奢 習癖化되고 玩物 8]에 치중하는 樣相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당시 유행한 高價의 盆栽나 古董書畵 收集등이 당시 士人風俗畵에 반영돼 있다.
6]선비로서 갖춰야 할 교양으로 禮?樂?射?御?書?數를 뜻한다.
7]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안에 閑暇하게 있는 燕居는 주로 山水를 배경으로 주거 공간 내부에서 餘暇生活을 하고 있는 文人의 일상적인 모습을 가리킨다. 이때 인물의 燕居行爲는 觀景?伏案?讀書?玩賞?客談?作書(?)?飮酒(茶)?閑眠?呼童?彈琴?對棋 등 11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오혜진, ?조선후기 山水畵의 이미지?,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15, 국문초록).
8]朝鮮後期 文人官僚 徐直修(1735∼?)의 文集 『十友軒集抄』, ?十友軒記?에 그가 아낀 10가지 玩物에 대한 五行題詩가 있다. 여기서 十友는 澈瀯大師의 책?水鏡道人의 글?董其昌의 筆法?正宗의 칼?草?의 시?深周의 그림?平羽調 가락?거품 뜬 새 술?꽃 키우는 지침서?養生의 비결이다.
[그림7] 『京郊名勝帖』上卷 中 讀書餘暇圖, 정선, 견본채색, 1740-41년, 24×16.8cm, 간송미술관
[그림8] 士人肖像 김홍도, 지본담채, 18세기, 27.5×43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朝鮮後期의 漢陽은 政治?行政空間과 더불어 遊興과 行樂이 성행한 都市文化에 따른 商業?遊興空間의 성격을 더했다. 그 주체는 富와 權力이 집중된 京華世族과 新興階層인 閭巷人 즉, 市廛商人?中人階層의 譯官과 醫官?軍校무리?大殿別監?武藝別監?官署下隷의 의금부 羅將들이었다. 9] 이들에게 餘暇는 서민들처럼 生業과 직결된 휴식이라기보다 생업과 無關한 自由와 誇示의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都市風情, 市井風俗 10] 의 風俗畵 제작은 中人階層의 畵員이 주도했는데 檀園 金弘道(1745~?)와 蕙園 申潤福이 두드러진다. 특히, 蕙園의 都市風俗畵는 妓女를 주인공으로 한 女俗과 春意가 多分한 특징을 나타낸다. 이전 시기의 風俗畵에 등장하는 妓女가 畵面의 주인공인 兩班層의 주변부에 背景으로 묘사됐던 것과 달리, 蕙園은 畵面의 場面性에 기여하는 配役으로 兩班과 妓女의 照應構圖를 설정하거나 妓女를 주인공으로 하는 破格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兩班과 妓女의 관계는 물론 妓房과 妓女의 風俗, 妓女의 役割 등 그들의 삶에 近接할 수 있게 된다.
9]국사편찬위원회, 『거상, 전국을 장악하다』, 두산동아, 2005, 161∼164쪽.
10]18세기 商業의 번성으로 활기찬 漢陽의 모습과 도시의 번창에 따른 行樂과 遊興의 作態를 말한다.
[그림9] 慈母育兒(부분), 신한평, 18세기, 지본담채, 23.5x31cm, 간송미술관(그림의 우는 아이가 蕙園이다)
3. 蕙園 風俗畵의 特徵
(1) 蕙園의 生涯史
蕙園은 畵員 逸齋 申漢枰(1726~?) 11] 의 2남 1녀 중 長子로 본명은 申可權 12] 이며 潤福은 初名 또는 藝名이다.
사실 蕙園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傳存하지는 않는다. 『槿域書畵徵』13] 에 따르면 豹菴 姜世晃(1713~1791)의 『豹菴藏書』가운데 李九煥(1731~1784)이 엮은 『靑丘畵史』에 20대의 蕙園이 東家食西家宿한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方外人같았고 閭巷人과 가까웠던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14] 徐有渠(1764~1845)의 『林園十六志』에는 “申潤福과 金弘道 모두 狹斜 즉, 色酒家의 俚俗之事를 즐겨 그렸다.” 15] 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畵寫兩家譜錄』과 『槿域書畵徵』에는 “字, 笠父, 號, 蕙園, 高靈人 참사 申漢枰의 아들, 벼슬은 僉使 16] 다. 風俗畵를 잘 그렸다.”는 짧은 글이 있으며 ‘점잖지 못한 그림으로 圖畵署에서 쫓겨났다.’ 17] 가 口傳된다.
빈약한 기록이나마 우리는 20대의 蕙園이 畵員으로서 응당 遵守해야했을 畵格을 벗어난 ‘점잖지 못한’, ‘속된 그림[俗畵]’으로 그 지위를 박탈당한 후, 제도적 틀에 拘? 없는 ‘方外人’으로 떠돈 그의 삶을 어느 정도 再構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처네 쓴 여인?의 ‘笠父’ 18], ?美人圖?의 ‘時中’ 19], ?春色滿園?의 ‘一片雲’과 ‘片月’ 20]등으로 方印된 蕙園의 字는 放浪者나 異端兒 21]같은 그의 성향 및 정신을 드러낸다. 그가 狹斜를 내용으로 한 風俗畵를 즐겨 그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畵員집안의 一員인 蕙園이 圖畵署에서 쫓겨났고, 그 이유가 ‘俗畵’에 있었다는 소문은 ‘俗畵’의 對象이자 市井風俗의 주류 집단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退出’이란 汚點을 가진 蕙園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힘들었겠지만 그의 ‘俗畵’에 대한 흥미와 需要는 컸다고 짐작된다.
11]朝鮮後期 風俗畵의 주요 토대를 이룬 중요한 화가로 30년 이상 畵員職에 종사하였으며 御眞 제작에도 3차례나 참가한 差備待令?員이었다.
12]이원복은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의 朱文方印, ‘申可權印’과 ?아기 업은 여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別紙에 기록된 ‘蕙園申可權子德如’, 『高靈申氏世譜』 및 『高靈申氏譜帖』에서 11代孫의 돌림자가 ‘權’字임을 확인했다.(이원복, ?혜원 신윤복의 畵境?, 『미술사연구』No.11, 미술사연구회, 1997, 100쪽).
13]吳世昌(1864∼1953)이 1917년 한국미술사의 書畵를 총정리해 편찬한 책이다. 1928년 啓明俱樂部에서 발간했다.
14]이원복은 圖畵署에 소속되지 않은 직업화가를 뜻하는 方外畵師나 方外畵員이란 의미에서 신윤복을 ‘方外畵家’로 지칭하고 있다.(이원복, 위의 글, 99쪽).
15] 홍선표, 『조선시대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575∼576쪽.
16]僉節制使의 略稱으로 朝鮮時代 각 陣營에 속했던 從3品 西班 武官職에 해당한다.
17]史學者인 文一平(1888∼1939)이 『호암전집』(조선일보사, 1939)에서 언급했다고 한다.
18]오른쪽 하단에 ‘?夢赤奮若孟秋蕙園寫’라는 刊記가 있고 그 옆에 字인 ‘笠父’가 ‘笠’은 白文方印으로, ‘父’는 朱文方印으로 각각 찍혀있다.
19]題畵詩 아래 ‘蕙園’의 관지에 이어 그의 본명을 알려주는 朱文方印 ‘申可權印’과 또 다른 알려지지 않은 字로 사료되는 白文方印 ‘時中’이 있다.(이원복, 『회화-한국미의 재발견 6』, 솔, 2007, 227쪽.
20]落款으로 ‘蕙園’과 ‘一片雲’이 遊印에 ‘片月’의 句가 白文方印으로 찍혀있다.
21] 황효순, ?혜원 신윤복 연구?, 성신여대 박사학위논문, 2003, 186∼187쪽.
[그림10]『女俗圖帖』中 연못가의 여인, 18세기, 견본담채, 31.4×29.6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11]『女俗圖帖』中 전모를 쓴 여인, 18세기, 견본담채, 29.7x24.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12]『女俗圖帖』 中 거문고줄 고르는 여인, 18세기, 견본담채, 27.5x23cm, 국립중앙박물관
(2) 蕙園 風俗畵의 特徵
蕙園의 風俗畵는 국립중앙박물관이 所藏한 『申緯具狀畵帖』 중 小幅, 『女俗圖帖』, ?行旅風俗圖?를 비롯해 간송미술관이 所藏한 『蕙園傳神帖』 22] 등 50여점이 남아있다. 이들은 平民여성과 妓女와 같은 賤民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삶을 畵題로 삼은 蕙園의 破格的 작가정신을 보여준다.
가령 『女俗圖帖』의 ?연못가의 여인?은 長竹과 笙簧을 번갈아 물던 妓女가 妓房의 蓮塘에 활짝 핀 연꽃을 보며 想念에 잠긴 순간을 포착하고 있으며 ?전모를 쓴 여인?과 ?거문고줄 고르는 여인?은 과감히 배경을 생략해 주인공인 妓女의 姿態와 日常에 집중하도록 한 特徵을 나타낸다.
또한 蕙園의 風俗畵는 그림에 표현된 女俗?春意가 朝鮮王朝 5백년의 유례가 없는 女色의 肉感과 情趣를 그린 것 23]으로 檀園과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俗氣’어린 그림에도 불구하고 蕙園은 款識와 圖印을 치고 때때로 贊文을 덧붙여 자긍심과 자신감을 여실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느낌과 마음을 題畵詩로 표현했다. 예컨대, ?美人圖?는 주인공 ‘美人’에 대한 蕙園의 心境과 心格을 느끼게 해준다.
22]澗松 全鎣弼(1906∼1962)이 1930년 오사카의 고미술상으로부터 입수한 30점으로, 구입 후에 새로 표구하고 오세창이 標題와 跋文을 달았다. 1938년 전형필이 개관한 ?華閣(간송미술관의 前身)의 소장품으로서 국보 제135이다. 18세기, 지본채색, (각)28.2×35.6cm.
23]이동주, 『한국회화소사』, 범우사, 1996, 204∼205쪽.
[그림13] 美人圖, 신윤복, 18~19세기, 견본담채, 114.× 45.7cm, 간송미술관
가슴속에 서린 萬端의 女心이여! 盤?胸中萬化春
붓끝으로 얼른 萬物의 마음을 전하리라! 筆端能與物傳神 24]
蕙園은 放浪的 氣質로 方外人이란 ‘非主流’의 삶을 自處했으나 生計를 위해 主流집단의 酬應畵나 商品畵 25] 를 제작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乖離로 蕙園은 朝鮮後期 以後 强化된 家父長的 사회질서에 隸屬된 婦女子와 生業으로 歌?舞?樂의 技藝와 遊興을 제공해야했던 妓女의 處地를 共感하게 됐고, 이들의 삶과 마음을 畵幅에 담았을 것이다. 그는 기둥서방[妓夫]으로 추정 26] 될 만큼 朝鮮後期의 享樂文化에 近接했고 妓女의 삶과 密接했다.
24]정확한 풀이로 이끌어주신 국립안동대학교 한문학과 오수경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5]오주석은 『蕙園傳神帖』의 종이 재질, 제본 상태, 12점에 화제가 있는 점 등을 들어 이것이 상층귀인과 그 자제를 위한 상품이었고, 따라서 화가(신윤복)의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고 보았다.(오주석, ?단원 풍속첩과 혜원 전신첩-기로세련계도 및 미인도와 관련하여?, 『朝鮮時代 風俗畵』, 삼화인쇄, 2002, 264∼265쪽).
26]황효순, 앞의 글, 185∼186쪽.
4. 妓女의 이미지 텔링 - 『蕙園傳神帖』을 중심으로
(1) 『蕙園傳神帖』과 妓女의 이미지
朝鮮後期의 여느 風俗畵보다 市井의 俗態와 色態를 여과 없이 포착해 그린 『蕙園傳神帖』은 상업화된 都市의 餘暇文化를 享有하던 京華世族 및 閭巷人 27] 의 日常을 담고 있다. 이들의 誇示욕구와 豪奢취미에서 비롯한 遊興的?行樂的 作態는 蕙園의 作家的 策略 즉, 華奢한 彩色 28] 流麗하고 纖細한 筆線?力動的 構圖?畵面배경의 緻密한 설정?등장인물의 시선?표정?몸짓 등의 心理描寫를 통해 그림의 이야기와 現場感을 증폭시킨다. 方外人 蕙園은 세상과 ‘거리두기’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世俗的 作態를 客觀的으로 觀察해 표현하게 한 動因이었을 것이다.
妓女는 원래 歌?舞?樂으로 支配階層의 재미와 즐거움인 ‘興’을 돋우는 公的 技能을 수행한 官妓?藝妓였으나 京妓를 제외한 掌樂院 女妓 혁파정책으로 해산되면서 生計를 위해 妓房營業을 꾸려갔던 것이다.29] 『蕙園傳神帖』30面 중에서 兩班과 관련한 妓女의 이미지는 모두 17面으로 ?聽琴賞蓮?, ?雙劍對舞?, ?靑樓消日?, ?妓房無事?, ?紅樓待酒?, ?舟遊淸江?, ?賞春野興?, ?年少踏靑?, ?携妓踏楓?, ?雙六三昧?, ?林下投壺?, ?納凉漫興?, ?三秋佳緣?, ?夜禁冒行?, ?月夜密會?, ?月下情人?, ?遊廓爭雄?이다. 이들을 遊興行爲가 발생하는 장소에 따라 안[內]과 밖[外]으로 구분한 것이 <표 1>이다.
本稿에서는 蕙園이 再現해낸 <표 1>의 17面을 대상으로, 朝鮮後期 遊興的?行樂的?消費的 風流文化를 주도한 京華世族 및 閭巷人과 그들이 동반한 賤民 妓女와의 관계를 통해 妓女의 이미지 텔링으로 드러나는 妓女의 行爲와 役割이 가진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27]기술직 中人이나 衙前 胥吏輩들은 부의 축적과 함께 학식도 겸비해 높은 감식안을 지니고 있던 閭巷文人으로 감상물로서의 회화를 전개, 발전시키는데 있어 士大夫文人들에 버금가는 주요 세력이었다.(홍선표, 앞의 책, 570쪽).
28]신윤복은 우리나라 최고의 색채화가라는 칭송을 받는다.(진홍섭?강경숙 외, 『한국미술사』, 문예출판사, 2006, 657∼658쪽).
29]선조 31년(1598) 2월 18일에 내린 폐지 결정으로 기녀 선상제도가 법적 효력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강명관, ?조선후기 기녀제도의 변화와 京妓?, 『제 28차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학술발표회지』,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9, 18쪽).
<표 1> 『蕙園傳神帖』의 장소별 妓女 이미지
(2) 妓女의 이미지 텔링
1) 內
17面 중 5面이 해당하는데 2面은 京華世族의 집안에서 일어난 놀음 風俗을, 3面은 妓房에서 일어난 妓房風俗에 대한 것이다.
① 內-집안
?聽琴賞蓮?은 京華世族의 집안에서 벌어진 ‘後園놀이’를 보여준다. 畵面 왼쪽의 양반은 妓女 뒤에서 끌어안고 교합하는 자세를 聯想시킨다. 그들을 집주인으로 여겨지는 양반이 바라보며 서있다. 畵面 오른쪽의 양반은 妓女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있다. 그 옆에 遮額을 쓰고 長竹을 문 藥房妓生이 함께 앉아 있다. 아직 술상은 보이지 않는다.
?雙劍對舞?는 京華世族이 벌인 ‘劍舞놀음’을 내용으로 한다. 집안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이유는 대규모의 掌樂院樂工들과 劍舞妓를 불러왔음에도 이를 玩賞하는 사람들이 집주인과 그의 子弟郞官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蕙園은 관람자와 연주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 劍舞妓를 布置해, 우리를 畵面의 중심의 妓女로 이끈다.
[그림14] 聽琴賞蓮
[그림15] 雙劍對舞
② 內-妓房
?靑樓消日?, ?妓房無事?, ?紅樓待酒?는 妓房에서 일어나는 妓女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靑樓消日?과 ?妓房無事?는 ‘손님’을 둘러싼 妓女간의 경쟁을 보여준다. 妓房營業을 위해 자신을 商品化해야했던 賤民 妓女에게, 그 卑俗한 삶을 그나마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길은 양반의 妾이 되는 것이기에 다른 妓女와 긴장된 경쟁구도에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紅樓待酒?는 紅樓[妓房]의 賣上을 위해 犯法을 不辭했던 상황을 나타낸다. 흉년과 홍수로 英祖 31년(1755) 禁酒令을 내렸으나 士大夫들은 개의치 않고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30] 이들을 상대해야했던 妓房에서도 술의 판매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30]이이화, 『한국사 이야기』14권, 한길사, 2004, 280∼283쪽.
[그림16] 靑樓消日
[그림17] 妓房無事
[그림18] 紅樓待酒
2) 外
17面 중 12面이 野外에서 행해진 妓女의 이미지이다. 이중에서 ?賞春野興?, ?年少踏靑?, ?舟遊淸江?, ?納凉漫興?, ?携妓踏楓?, ?林下投壺?, ?雙六三昧?의 7面은 歲時風俗과 관련한 놀음風俗에 해당하며 ?三秋佳緣?, ?夜禁冒行?, ?遊廓爭雄?, ?月夜密會?, ?月下情人?의 5面은 양반의 性風俗에 대한 것이다.
① 外-歲時風俗 놀음
<표 2> 31]는 위 7面과 절기별 歲時風俗놀음의 연관성을 정리한 것이다.
31]홍석모 著, 이석호 譯, 『朝鮮歲時記-문예신서 49』, 동문선 1991 참조정리.
<표 > 節氣別 歲時風俗놀음과 『蕙園傳神帖』의 妓女 이미지
季節 |
月 |
歲時風俗놀음 |
내용 |
『蕙園傳神帖』 |
春 |
3 |
花煎[花柳遊] |
삼월 삼짇날 교외나 산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먹고 꽃을 보며 노는 꽃놀이 |
?賞春野興? |
踏靑[踏白草] |
음력 삼월 삼짇날이나 淸明日에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 먹고 마시며 봄의 경치를 즐기는 풍속 |
?年少踏靑? | ||
夏 |
6 |
船遊[舟遊; 뱃놀이] |
배를 타고 여러 가지 風流를 즐기는 놀이 |
?舟遊淸江? |
7~8 |
納凉 |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기운을 느낌 |
?納凉漫興? | |
秋 |
9 |
登高[楓菊; 단풍놀이;국화놀이; 重陽놀이; 重陽楓菜遊; 詩會] |
음력 9월 9일 重陽節에 높은 곳에 올라 단풍이 든 풍경을 보고 즐기며 시와 술을 함께 나누는 풍속 |
?携妓踏楓? |
冬 |
10~ 12 |
室內 風俗[賭博] |
投壺, 雙六, 投錢, 骨牌 등 |
?林下投壺?, ?雙六三昧? |
[그림19] 賞春野興
[그림20] 年少踏靑
[그림21] 舟遊淸江
[그림22] 納凉漫興
하지만 實狀은 妓女, 樂工, 술을 동반해 歌?舞?樂을 즐기는 양반들의 豪奢롭고 行樂的인 遊興行爲에 치중돼 있다. 예컨대 ?舟遊淸江?의 차일 아래 양반은 脫喪 축하 잔치로 船遊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그 경비는 하루에 약 1천냥에 달했다. 32]
32]장진성, 앞의 글, 276쪽.
[그림23] 携妓踏楓 휴기답풍
[그림24] 林下投壺 임하투호
[그림25] 雙六三昧 쌍육삼매
위의 그림 3面은 歲時風俗놀음을 憑藉한 誘惑과 違反의 현장이다. ?携妓踏楓?는 단풍놀이에서 마주친 세련된 옷차림의 양반과 가마[가맛바탕] 탄 妓女間 끈끈한 눈맞춤을 놓치지 않고 있다. 원래 投壺와 雙六은 지배계층 여성의 놀이였는데, 朝鮮後期에는 歲時風俗놀음으로 일반화됐으며 특히, 양반과 기녀의 遊興놀음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林下投壺?와 ?雙六三昧?의 양반은 衣冠整齊를 하지 않을 만큼 놀이에 몰두해 있다. 함께 논 妓女에게 돈을 줘야했기에 本錢생각이 났으리라. 33] 또는 다른 내기가 걸려있을지도 모른다.
北學派 李德懋(1741~1793)는 『靑莊館全書』에서 雙六(치기)이 ‘淫亂의 근본’이라며 그 폐해를 지적한 바 있다.34]
33]茶山 丁若鏞이 1799년 절도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 雙六에서 기생에게 3千錢을 주었던 내용이 나온다.(유승훈,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살림, 2006, 113∼114쪽).
34]이덕무, 민족문화추진회편, 『국역청장관전서』6, 솔, 1997, 159쪽.
② 外-性風俗
?三秋佳緣?, ?夜禁冒行?, ?遊廓爭雄?는 양반과 妓女間 性賣買에 대한 그림이다. 이 경우 양반과 妓女는 1:1의 관계이며 양쪽을 연결해주는 媒介者, 老軀 35]와 妓夫 36]가 등장한다. ?三秋佳緣?의 老軀는 어린 妓女의 初夜權을 산 양반에게 勸酒中이다. ?夜禁冒行?의 妓夫는 紅衣를 갖춘 大殿別監으로 夜禁 37]을 무릅쓰고 妓女를 원하는 양반에게 妓女를 연결해주거나 ?遊廓爭雄?처럼 妓女를 두고 벌어진 양반들의 싸움을 調停한다.
35]지방에서 양반 및 부유층 남성들에게 기생들의 성매매를 주관했던 뚜쟁이였다.(강명관,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156∼160쪽).
36] 내의원, 혜민서, 상의원 등에 소속돼 있는 기녀들을 불법적으로 빼내 첩으로 삼는 사람과 또한 의녀와 침선비가 한양에 거주하는 경우에 그 비용을 대신 내고 기생에게 영업을 시키는 이도 妓夫라고 한다.(강명관, 앞의 글, 25쪽).
37]二更(오후 10시)부터 五更(오전 4시)까지이다.
[그림26] 三秋佳緣 삼추가연
[그림27] 夜禁冒行 야금모행
[그림28] 遊廓爭雄 유곽쟁웅
[그림29] 月夜密會 월야밀회.
[그림29] 月夜密會 월야밀회. 부분도
[그림30] 月下情人
[그림30] 月下情人 . 부분도
媒介者 없이 犯夜 密會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非營業的’ 활동인 妓女의 개인적 연애일 수도 있다. ?月夜密會?와 ?月下情人? 속 妓女의 표정과 姿態는 다른 그림과 달리 여성스럽고 수줍기조차 하다. ?月夜密會?의 남녀는 營門將校와 妓女이다. 夜禁을 어기고, 巡邏의 임무를 저버리고, 게다가 다른 妓女가 망보도록 할 만큼 둘의 만남은 절실했나보다. <月下情人>의 妓女와 양반 한 쌍 또한 月蝕까지 일어난 깜깜한 三更에 犯夜 密會를 즐기고 있다.38]
지금까지 『蕙園傳神帖』의 17面을 통해 살펴본 妓女의 이미지 텔링은 주로 양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行爲에 따라 다음의 <표 3>과 같이 정리된다.
38] 2011년 이태형 한국우주환경과학연구소장은 ?月下情人?의 月蝕과 題畵詩의 ‘夜三更’을 통해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에 그려졌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조선일보, “[IF] 천문학은 알고 있다, 70년前 당신의 키스 타임”(2015.07.25.), http://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24/2015072402167.html
<표 > 『蕙園傳神帖』의 17面에 나타난 妓女의 이미지 텔링(숫자는 발생횟수)
전체적으로 妓女는 2가지 이상의 行爲(17面當 37件)를 수행하는데, 場所別로는 內部(9件)보다 外部(28件)에서 발생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內部의 경우, 歌?舞?樂 등 妓女 본연의 업무를 행하고 있으며, 妓房의 營業活動에 따른 妓女間 경쟁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편 外部의 경우는 生業을 기본으로 外部의 歲時風俗놀음에 동반하는 비율이 높은데, 이때 飮酒는 물론 내기와 淫亂으로 이어지는 賭博性 놀이로 風紀紊亂을 助長하고 있다. 또한 性賣買나 개인적 戀愛는 주로 남의 눈을 피한 夜深한 때 이루어져 犯夜가 잦았다.
5. 맺음말
이상에서 蕙園이 바라본 朝鮮後期의 세상과 妓女의 삶 그리고, 이것을 再現해 놓은 風俗畵가 聯動하며 發話하는 妓女의 이미지 텔링을 논의해보았다. 朝鮮後期 風俗畵의 유행과 市井風俗, 春意를 내용으로 한 俗畵의 형성은 당시의 變動狀況과 직결된 것이었다. 대개 都市風俗畵類인 俗畵는 漢陽의 遊興?消費?都市文化를 반영했는데, 本稿에서 다룬 蕙園의 風俗畵는 이를 여실히 담았다.
아울러 朝鮮後期 士人風俗畵의 變貌는 양반계층의 욕구와 관념의 변화를 보여줬고, 閭巷人을 통해 확대?재생산됐다. 文人士大夫에게 있어 餘暇는 燕居(閑居; 獨樂)의 內的?靜的行爲가 기본이었으나 朝鮮後期에는 紀行?行旅 등의 外的?動的行爲가 활발해져 趣事의 行樂化가 만연했다. 또한 富와 勸力이 집중되면서 豪奢 習癖, 玩物 등 유행에 민감한 자신의 日常을 외부에 드러내 誇示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朝鮮後期 商業的 餘暇文化의 蔓延으로 주류계층의 餘暇가 妓女를 동반한 行樂的 遊興에 치중됐던 것이다. 이런 世態를 蕙園이 여과 없이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生涯史를 통해 확인됐다.
즉, 蕙園은 ‘方外人’으로서 사회구조의 경계 밖에 있었고, 역시 경계 밖의 賤民이란 신분적 한계를 가졌던 妓女에 보다 밀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姿態와 日常에 주목해 그림의 주인공으로 또는,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女俗과 春意를 여실히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本稿에서는 朝鮮後期 妓女와 京華世族 및 閭巷人의 관계에서 일어난 場所別 行爲를 중심으로, 蕙園이 再現한 『蕙園傳神帖』(30面) 중 17面에 대한 妓女의 이미지 텔링을 분석해봤다.
그 결과, 朝鮮後期의 妓女들은 양반과 동반할 경우 평균 2가지 이상의 行爲(37件)를 수행했으며 場所別로는 內部(9件)보다 外部(28件)에서 발생했다.
內部의 경우, 歌?舞?樂 등 妓女 본연의 生業活動에 치중했고, 妓房內에서는 營業活動과 관련한 妓女間 경쟁을 나타냈다.
外部에서는 生業活動과 함께 遊興的?行樂的?消費的 歲時風俗놀음에 동반하는 비율이 높았고(16件), 性風俗과 관련한 행위도 있었다.(7件) 놀이에 동반하는 경우, 사회규범을 違反하고 風紀紊亂을 助長하는 飮酒, 賭博 등에 同參하는 樣相을 띄었고, 性賣買나 개인적 戀愛는 주로 남의 눈을 의식해 犯夜를 무릅쓴 夜深한 때 발생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 朝鮮後期의 妓女는 妓房을 중심으로 生計를 위한 경제적 활동을 지속해야했고, 京華世族 및 閭巷人과의 관계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즉, 그들의 妓女에게 주요 소비층이자 매개자인 妓夫였고, 때로는 密會의 情人이었다.
朝鮮後期의 京華世族 및 閭巷人은 富와 權力을 대외적으로 誇示하기 위해 動的?行樂的 遊興文化에 치중했고, 이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違法行爲를 隨伴할 만큼에서 五感的 欲求 充足에 몰두했다. 妓女는 이들에게 專門機能인 歌舞樂과 性的 接待를 함께 제공해 享樂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去來關係 속에서 妓女는 京華世族 및 閭巷人의 ‘奢侈奴隸’로 머물렀다기보다는, 그들에게 ‘遊興의 公共性’을 부여해주는 機制로 작동했던 사회적 실체(social being)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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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5.7.30 심사시작일 2015.8.6 심사완료일 2015.8.24
Abstrack
Image telling of Gisaeng on the Genre Paintings of Sin Yoon-bok
Eom, So-yeon
In this thesis, for reading gisaeng image, I would focus on visual message that the author (painter) reflects on it. It is not only the meaning of gisaeng image by the author but also the communication mode of socio-cultural agreement or code. The gisaeng image, therefore, is not just reproduction of the author's visual experiment about gisaeng but representation and reconstruction of gisaeng by author's intention.
With this background, I pointed out Sin, Yoon-bok (pen name, Hyewon; 1758?-after 1813)'s city-genre painting which was shown up strong expression of gisaeng and merrymaking city life on Hanyang in late Joseon period. Hyewon, who regarded as an 'outsider', could very closed to the minority (lower-classed women and gisaeng) which was related to the majority (main nobilities and middle class people of the capital), so he produced more rich gisaeng image. According to the gisaeng image of Hyewon, we are able to understand their communication mode of story world, and feel empathy their lives by image telling.
Therefore, I would research the image telling of gisaeng on Hyewon's genre paintings such as follows; First, I examine genre painting which is prevalent by the social context in late Joseon period with change of the majority's desire and idea. Second, I reveal Hyewon's viewpoint as an author through his life history and works' characteristic. Third, I classify seventeenth gisaeng images of Hyewon's genre paintings album, ≪Hyewonjeonshincheop≫ by place, then analysis them by action. Finally, I interpret the image telling of gisaeng with their socio-cultural role.
Keyword late Joseon period, Sin Yoon-bok, genre paintings, gisaeng, image t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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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 작자 미상, 종이에 담채, 114.2×56.5㎝, 1825년 무렵,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美人圖, 신윤복 부분도
美人圖, 신윤복 detail
가슴속에 서린 萬端의 女心이여! 盤?胸中萬化春
붓끝으로 얼른 萬物의 마음을 전하리라! 筆端能與物傳神
옷고름을 잡아매는 중인지, 이제 푸는 중인지 ??
解衣盤? : 송원군(宋元君)이 그림을 그리려고 여러 화사(畵史)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모두 붓을 빨고 먹을 찍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인사도 없이 사관(舍館)으로 가므로 송원군이 사람을 시켜 엿보니, 그는 옷을 벗고 자유롭게 앉았으므로, 송원군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림 그릴 사람이로다.” 하였다.
中國?術語。解衣,?袒胸露臂;盤?,?隨便席地盤坐。意欲全神貫注於繪?。
《莊子.田子方》載:「昔宋元君將?圖,?史皆至,受揖而立,?筆和墨,在外者半,有一史後至,??然不趨,受揖不立,因之舍,公使人視之,則解衣盤?,?(同裸)。君曰:『可矣,是??者也。』」?代?壽平亦說:「作?須有解衣盤?,旁若無人,然後化機在手,元氣狼籍。
傳神 [ 전신 ] : 중국(中國)에서 초상화(肖像?)를 일컫는 말. [명사] 1. 초상화에서, 그려진 사람의 얼과 마음을 느끼도록 그리는 일.
傳神:指好的文學藝術作品描繪的人物生動、逼?
傳神是什?意思 : (優美的文學、藝術作品)描繪人或物,給人生動逼?的印象:他?的馬非常~?這段對話把一個吝嗇鬼刻?得如見其人,可謂~之筆。
(盤?, ??) 亦作“盤薄”。
1.廣大, 雄偉。
唐 楊炯 《西陵峽》詩: “?壁聳萬?, 長波射千里, 盤薄 荊 之門, 滔滔南國紀。”
宋 文天祥 《建康》詩: “ 金陵 古會府, 南渡舊陪京, 山勢猶盤?, 江 流已變更。”
元 辛文房 《唐才子傳?戴思?》: “有詩名, 氣宇盤?, 每有過人。”
明 李東陽 《宿劉諫議祠用前韻》: “江山盤?堪輿氣, 精爽分明夢覺時。”
2.奮發貌。
宋 秦觀 《曾子固哀詞》: “辰來遲而去速兮, 固前修以跋?, 方盤?而上征兮, 遽相羊而補外。”
3.盤屈牢固貌。
南朝 梁 江淹 《草木頌?豫章》: “下貫金壤, 上籠赤?, 盤薄廣結, ?瑟曾喬。”
唐 白居易 《有木詩》之四: “有木名杜梨, 陰森覆丘壑。 心?已空朽, 根深?盤?。”
4.延伸;??。
明 徐弘祖《徐霞客游記??游日記四》: “二重層疊於村後, 蓋北自 觀音山 盤?而盡於此。”
? 顧炎武 《五臺山》詩: “東臨 ?定 北 雲中 , 盤薄 幽 ? 一氣通。”
5.徘徊;逗留。
宋 林逋 《秋日含山道中回寄歷陽希然山人》詩: “林落人家總入詩, 下驢盤薄立多時。”
金 王若虛 《林下四友贊》: “盤?兮岩阿, 容與兮煙蘿, 籍?草兮偃臥, ?長風兮浩歌。”
6.《莊子?田子方》: “ 宋元君 將?圖, ?史皆至, 受揖而立, ?筆和墨, 在外者半。 有一史後至者, ??然不趨, 受揖不立, 因之舍。 公使人視之, 則解衣般??。 君曰: ‘可矣, 是??者也。 ’”“般?”本謂箕坐, 後作“盤?”, 指恣意作?。
《苕溪漁隱叢話後集?東坡一》引 宋 黃庭堅 《題伯時天育驃騎圖》詩: “明?盤?萬物表, 寫出人間?乘黃。”
明 李東陽 《題計汝和墨菊》詩: “偶將盤?累高情, ?苑人人識姓名。”
? 錢謙益 《題宋徽宗杏村圖》詩: “至尊盤?自遊藝, 宛是前身?師製。”
7.箕踞。 伸開兩腿坐。
宋 蘇軾 《和<?酒>》序: “在 揚州 時, ?酒過午輒罷, 客去, 解衣盤?終日, 歡不足, 而適有餘。”
元 成廷珪 《夏日過萬蓬庵》詩: “愛汝東庵暑氣薄, 解衣盤?坐?苔。”
? 方苞 《送王?林南歸序》: “余每朝餐罷, 負手步階除, 則 ?林 推戶而入矣。 至則解衣盤薄, 諮經諏史, 旁若無人。”
8.引申?不拘形跡, 曠放自適。
宋 陸游 《與李運使?》: “至於盤?游?之翰墨, 嬉笑怒罵之文章, 過 黃初 而有餘, 嗟 正始 之復見。”
明 莫是龍 《筆?》: “不知此生, 身心俱曠, ?啄自適, 放恣形骸之外, 盤?溪山之間, 俯仰無累於情, 起居咸順其欲。”
? 周亮工 《書影》卷九: “早起, 雪覆身上如堆絮, 道人拂袖而起, 額上汗猶津津然;或投身海中, 盤薄游泳, 如弄潮兒。”
9.指大石。
《舊唐書?張廷珪傳》: “況此營建, 事殷木工, 或開發盤?, 峻築基階, 或塞穴洞, 通轉採斫, 輾壓蟲蟻, 動盈巨億。”
[자료 출처: 블로그- 마음의 정원:蕙園 申潤福의 風俗畵에 나타난 妓女의 이미지 텔링(image telling)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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