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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이션과 친하게 살기

Bawoo 2016. 2. 4. 19:12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물가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요즘 물가 하락을 걱정하는 소리가 부쩍 커졌다. 이른바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한국에도 상륙한 것이다.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본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디플레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물가가 계속 떨어지면 사람들은 소비를 가급적 늦추게 된다. 늦게 살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제품이 잘 안 팔리니 기업들은 생산과 투자를 줄이게 되고, 고용 축소로 가계 소득도 감소한다. 경제는 장기 침체에 빠지고 물가는 더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격이 떨어지는 건 그래도 좋은 일이 아닐까. 더구나 우리는 이미 디플레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평판TV나 휴대전화 등 전자제품의 가격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지만 소비를 늦추진 않는다. 오히려 신형 제품이 나올라치면 앞다퉈 써본다. 물가가 떨어지면 나의 실질소득은 늘어난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 기분 좋아 소비를 늘리고 기업 매출은 확대된다.

최근의 유가 하락을 봐도 그렇다. ‘저유가의 저주’라는 말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다. 저유가는 그렇게 우리 경제에 해로운 것일까. L당 2000원을 오르내리던 휘발유 값이 1200원대로 내린 ‘감세효과’를 전 국민이 누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중동 산유국 왕족의 금고가 가벼워졌지만, 덕분에 내 통장의 잔액은 늘어났다. 실제 국내 석유류 소비가 늘고 고연비의 자동차도 잘 팔리고 있다. 해외건설과 조선업계 등이 타격을 받고 있지만 전체적으론 얻는 게 잃는 것보다 많다는 분석이 나온다.

디플레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국제결제은행(BIS)이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얼마 전 내놓았다. ‘디플레이션의 비용에 대한 역사적 조망(The costs of deflations: historical perspective)’이 그것이다. BIS는 지난 140년 동안 주요 38개국에서 있었던 663회의 물가하락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수 조사했다. 디플레는 재화·서비스 등 제품 가격의 하락과 부동산·주식 등 자산 가격의 하락을 구분해 파장을 살폈다. 그 결과 제품 가격의 하락과 경제성장 사이에는 이렇다 할 상관관계가 없었다. 제품 가격이 떨어져도 경제가 잘 굴러갔던 사례가 많았다는 얘기다.

반면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의 하락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민간부문의 부채가 클 때는 자산 디플레에 따른 경제 침체가 증폭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빚으로 샀던 부동산 가격이 4분의 1 토막으로 폭락하자 소비는 실종됐고 물가 하락과 불황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주택시장에 불안한 구석이 있지만, 자산 디플레를 야기하는 상황은 아니다. 전반적인 저물가는 석유류와 공산품 가격의 하락에 힘입은 바 크다. 아직은 좋은 디플레로 봐도 괜찮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국제 유가가 10% 떨어지면 소비가 0.68% 늘고 국내총생산(GDP)도 0.27% 증가한다는 게 현대경제연구원의 실증 분석이다. 게다가 한국은 낙후한 유통구조와 독과점적 담합 때문에 세계적으로 물가가 높은 나라로 꼽힌다. 제품 가격의 거품을 계속 빼야 한다.

물론 자산 가격 하락에 따른 디플레는 계속 경계해야 한다. 집값이 급락하면 1200조원 가계 부채의 뇌관을 때리고, 일본식의 악성 디플레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주택담보대출의 심사를 강화하고 원리금 분할상환을 유도한 것은 잘한 일이다. 나름의 안전장치를 갖춘 만큼 한국은행의 운신 폭이 넓어졌다. 한은은 자산 디플레의 조짐이 보이면 기준금리 인하 카드를 신속하게 꺼내 들 필요가 있다.

디플레가 무조건 나쁘다는 건 일종의 소음이다.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주택시장이 버텨주고 소득만 줄지 않는다면 디플레는 축복이다. 저유가 상황 등을 거꾸로 활용해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내수를 키우는 지혜가 요구된다. [김광기 경제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디플레이션과 친하게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