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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불구 화가]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Bawoo 2016. 3. 3. 21:41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
본명 앙리 마리 레몽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
출생 1864년 11월 24일(1864-11-24)
프랑스 프랑스 타른 주 알비
사망 1901년 9월 9일 (36세)
프랑스 프랑스 샤토말롬
국적 프랑스 프랑스
분야 회화, 판화
학력 리세 콩도르세
사조 후기 인상파, 아르누보
대표작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프랑스어: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년 11월 24일 ~ 1901년 9월 9일)는 프랑스화가이다. 남부 프랑스 알비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본래 허약한데다가 소년 시절에 다리를 다쳐서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림에 몰두하였으며, 파리로 나가 미술 학교에 다녔다.

 

작품 세계

물랭 루주 포스터

 

드가, 고흐와 친분을 맺어 그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 등을 미워하였다. 주로 서커스 · 놀이터 · 운동경기 · 무용장 · 초상화 등을 즐겨 그렸으며 포스터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그가 그린 물랭 루주 포스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인상파에 속하고 색채 취급, 성격 묘사에도 뛰어났다. 유화 외에 파스텔, 수채화, 석판에도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등이 있다.[위키백과]

 

The Marble Polisher, 1882-87,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probably painted while a student of Fernand Cormon, demonstrating his classical training.

개요

정식 이름은 Henri-Marie-Raymonde de Toulouse-Lautrec-Monfa.

뛰어난 심리적 통찰력으로 관찰한 1890년대 파리의 사람들과 밤 풍경 및 프랑스의 연예계를 그렸다.

종종 순수한 아라베스크풍의 느낌을 주기도 하는 유동적·표현적인 선을 주로 사용하여 매우 율동적인 구도의 작품 〈서커스단의 연기주임인 페르난도 In the Circus Fernando : The Ringmaster〉(1888)를 만들었다. 포스터 작품도 극히 단순화된 윤곽선과 운동감, 그리고 넓은 색면을 이용한 매우 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어린시절과 교육

툴루즈 로트레크 가문은 부유했으며 샤를마뉴 시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포츠와 미술을 애호하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알비 근처에 있는 영지인 샤토뒤보스크에서 소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할아버지·아버지·삼촌은 모두 그림에 소질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가 10세 때부터 스케치를 시작한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1878년 왼쪽 대퇴골이 부러지는 사고로 불구가 된 뒤로는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후 1년 남짓 후 불행한 사고로 오른쪽 대퇴골마저 골절상을 입었다.

 

오랜 회복기간과 고통스러운 치료들로 인해 다리는 퇴화되어 걷기 힘들게 되었다. 그결과 그는 외로운 시간을 잊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미술에 할애하게 되었다. 1872년 처음으로 파리에 갔고 이때 리세 퐁탄(지금의 리세 콩도르세)에 입학했다. 점차 가정교사에게 개인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1881년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회화를 가르쳐준 최초의 전문적 화가는 툴루즈 로트레크 가문의 친지인 르네 프랭스토였다.

프랭스토는 19세기 아카데미 전통에 따른 기마병 그림으로 나름대로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프랭스토와 친하게 지냈지만 1882년말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로 옮겼다. 아카데미의 원칙에서 벗어난 회화에 격렬하게 맞서 싸우며 인상파의 무모한 회화적 태도를 비난한 보나는 그의 드로잉을 '아주 형편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의 작품은 1883년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 들어가면서 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후기인상주의). 1880년대초 코르몽은 상당한 명성을 누렸으며 그의 화실에는 빈센트 반 고흐나 상징주의 화가인 에밀 베르나르와 같은 미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툴루즈 로트레크에게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많은 자유를 주었다. 그가 제자의 작품을 인정했다는 것은 빅토르 위고의 완성된 저작의 삽화를 그릴 때 툴루즈 로트레크를 조수로 선택했다는 데서 입증된다. 그러나 툴루즈 로트레크가 이 사업을 위해 제작한 드로잉은 끝내 채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코르몽의 화실 분위기의 한계를 느꼈다. 1883년 2월 18일 그는 삼촌인 샤를에게 "코르몽의 가르침은 보나에 비하면 훨씬 친절합니다. 그는 삼촌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을 보고 끊임없이 저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삼촌께서는 놀라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옛 스승의 채찍질은 저에게 힘을 북돋워주었고 저는 전력을 쏟았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 엄격한 모사 작업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한 친구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모델을 정확하게 모사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분 또한 전체의 특성조차 과장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모델을 왜곡시켰다.

얼마 후 그는 파리의 몽마르트르 지구에 화실을 차리고 주로 친구들의 초상화 제작에 몰두했다.

몽마르트르의 기록자

이로써 그의 일생에 걸친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아 생활이 18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카페와 카바레, 그리고 파리의 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연예인들과 미술가들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로서는 처음으로 대중의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리스티드 브뤼앙이나 잔 아브릴, 루아 퓔레, 메 벨포르, 메 밀통, 발랑탱 르 데조세, 루이즈 베베르(라 굴뤼라고도 함)와 같은 인기 있는 연예인들과 어릿광대인 샤우카오·쇼콜라를 묘사하는 데 열중했다. 1884년 미를리통이라는 카바레를 소유하고 있는 가수 겸 작곡가인 브뤼앙과 사귀게 되었다.

 

브뤼앙은 그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자기의 노래를 위해 삽화를 제작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대가로 툴루즈 로트레크가 미를리통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브뤼앙이 발행한 잡지인 〈미를리통 Mirliton〉에 그림을 소개함으로써 그는 몽마르트르에서 유명해졌으며 작품 제작도 의뢰받게 되었다.

그는 완전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인물 동작의 효과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동시대 화가인 에드가 드가(그의 작품은 일본의 판화와 더불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는 서로 밀착되어 있는 인물 군상의 해부학적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이런 방법으로 인물 하나하나의 연속적인 동작의 한순간을 나타내려 시도했다. 이와 달리 툴루즈 로트레크는 자유로운 선과 색 그 자체로서 움직임을 암시했다. 선은 더이상 정확한 해부학적 재현에 얽매이지 않았고, 병치된 강렬한 색채는 진동에 의한 리듬감을 나타내고, 인물은 원근법에 얽매이지 않고 주변과의 유동적이고 활기찬 관계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구도는 인물의 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런 점은 퇴화되어 거의 쓸모없어진 자신의 다리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움직임의 본질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특정한 움직임의 표현은 제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활력과 힘이 넘치는 미술을 낳았으며 여기에 나타난 추상적 형식과 전체 화면의 2차원성으로 20세기초 야수파와 입체파의 등장을 예고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독창성은 포스터에도 나타났다.

 

전통적인 재료인 유화를 사용하는 순수예술 개념을 거부하고 1891년 최초의 포스터인 〈물랭 루즈-라 굴뤼 Moulin Rouge-La Goulue>를 제작했다.

Moulin Rouge: La Goulue, a poster highlighting Louise Weber's work at the Moulin Rouge,

 by Henri de Toulouse-Lautrec, 1891

 


La Goulue 실제 모습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의 포스터는 오늘날 파리 곳곳의 벽에 붙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후 10년 동안 30점이 넘는 포스터를 제작했다. 포스터로 인해 그의 미술은 더 이상 이젤화의 제한에 구속받지 않고 폭넓은 가능성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전해에 브뤼셀에서 열린 전위파 단체 '20인회'의 전시회와 파리에서 열린 앵데팡당전에 작품이 전시됨으로써 그의 성공은 더욱 확고해졌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피상적인 현실 묘사를 넘어 깊은 심리학적 통찰을 가지고 주제를 다루는 데 성공한 점이다. 1892년 이후로 이러한 의도에 적합한 석판화 손대기 시작했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300여 점의 석판화를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11점의 판화가 실린 판화집 〈카페의 음악회 Le Café Concert〉(1893)와 연예인인 이베트 길베르에 관한 16점의 석판화(1894), 쥘 르나르의 〈박물지 Les Histoires naturelles〉를 위한 22점의 삽화(1899) 등이 있다.

A thin woman's back and hair are prominent. She faces away from the viewer and only has a towel and socks.

La Toilette (fr) (The Toilet), oil on board, 1896.

 

그러나 가장 높이 평가되는 작품은 매춘굴의 생활을 세세하게 그려낸 1896년의 판화 연작인 〈그 여자들 Elles〉이다. 그는 오랜 시간을 매춘부와 고객의 행동을 관찰하며 보냈다. 그결과 제작된 11점의 작품은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서 표현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힘을 지닌 것으로 나타냈지만 상당수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으로 나타냈다. 이러한 종류의 대표작으로는 〈물랭가의 살롱에서 Au salon de la rue des Moulins〉가 있다.

젊은시절에 툴루즈 로트레크 자신이 종종 겪어야만 했던 고립감·고독감을 이 여자들에게서도 발견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이것에 공감하게 된다. 〈물랭가의 살롱에서〉Henri de Toulouse-Lautrec - At the Moulin Rouge - Google Art Project.jpg는 '이상이 아니라 진실을 묘사하려는' 그의 야망을 잘 나타낸 것으로 여기에서는 부분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간결한 붓놀림으로 주제의 본질적인 속성을 포착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여자들〉은 그의 육체적·정신적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갈 즈음에 발표되었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대단히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다리는 유달리 짧았고 키가 155㎝도 채 안 되는 체구는 막심 데토마와 루이 앙귀에탱, 사촌이자 친한 친구인 가브리엘 타피에 드 셀레랑 등과 같이 유별나게 키가 큰 사람들과 어울림으로 해서 더욱 작아보였다. 풍자적인 말투를 자주 쓰면서도 자신의 육체적인 결함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의 편지에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경멸적인 어구와 매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언급이 점점 늘어갔다.

 

1890년대 후반 당시 칵테일을 대중화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까닭에, 1899년초에는 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졌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1월 3일 그의 어머니가 말도 없이 갑자기 파리를 떠나버린 사건이었다. 그는 항상 가족 특히 언제나 그의 야망을 지지해준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으며 그래서 어머니가 말 없이 떠난 것이 배신 행위로 여겨졌다.

 

그것은 이미 허약해진 신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그후 곧 뇌이쉬르센에 있는 요양소에 수용되었다. 이는 어머니가 친척들과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간의 물의를 피하려고 내린 결정이었다. 서류상 그는 1899년 3월 31일 요양소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5월 중순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요양기간 동안 서커스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을 제작함으로써 두뇌의 명석함과 뛰어난 기억력을 보여주었지만,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힘과 강렬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1900년 봄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37번째 생일을 3개월 앞두고 샤토 드 말로메에서 죽었다.

Toulouse-Lautrec's grave in Verdelais

평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고 부유한 사람의 본질을 포착하는 데 능숙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적 혁신을 이룩함으로써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 프랑스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형의 신체와 알코올 중독의 영향 및 말년의 정신적 쇠약, 36세라는 젊은 나이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술은 현대미술의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해박한 지식인은 아니었다. 타피에 드 셀레랑에 따르면 그는 밤에 불면증을 쫓기 위한 경우 이외에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허식과 민습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 "미술 낙제생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라고 새긴 독특한 명함을 가지고 다님으로써 초기에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에서 떨어진 사실을 흘려버렸다. 그의 인습타파적인 성향은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퓌비 드 샤반의 진지한 상징주의 작품인 〈신성한 숲 The Sacred Grove〉을 자신의 친구들이 가득한 떠들썩한 장면으로 변조시켜(1884, 뉴욕 시 헨리 펄먼 컬렉션) 익살맞게 개작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수영이나 뱃놀이를 즐겨 말년에는 화실에 노젓는 기계를 설치하기도 했다. 스포츠에 열광적인 그는 프랑스 자전거 팀을 따라 영국을 두루 여행한 적도 있었다. 두 논평자의 결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결함을 자각하고 있지만 유쾌함과 풍자의 가면을 쓴, 민감하고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는 19세기 후반 서유럽 미술의 주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생전의 위상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

사고로 불구가 된 뒤 아들에게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의 작품을 '조잡한 스케치'로 여겼으며, 귀족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미술가로 탈바꿈한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그러한 비난과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은 이후 수십 년 간의 미술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출처:우리말 자료 -다음백과: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그림 자료-영어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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