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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과 게르만족의 공포가 된 수수께끼의 민족]훈족[Hun]

Bawoo 2016. 3. 28. 20:13

훈족[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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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을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목민 지도자를 꼽으라면 단연 아틸라가 꼽힐 것이다. 그가 이끈 훈족(Hun)의 위세는 한때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을 두렵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훈족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계통의 집단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흉노족과 훈족은 같은 집단인가?

훈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논란거리는 단연 ‘훈족이 과연 흉노족의 후손인가?’ 하는 것이다. 100년 넘게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아직 확실한 해답은 나오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훈족과 흉노가 같은 집단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 이 책도 그 설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잠시 흉노족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들은 몽골-투르크 계통의 유목 민족으로 원래는 현재의 몽골 초원에 살면서 한때는 중국 한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맹렬한 공격에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어, 북흉노는 멀리 중앙아시아로 달아났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복속했다.

‘흉노’는 흉노족 스스로가 아니라, 그들의 적인 중국인들이 붙인 명칭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흉악한 노비(凶奴)’라는 극도로 모욕적인 뜻을 담고 있다. 당연히 ‘흉노’족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리 없다. 흉노족과 오랫동안 싸워 온 중국인들이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담아 부른 명칭일 것이다.

그렇다면 흉노족은 자신들을 뭐라고 지칭했을까? 그들이 역사 기록을 남기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흉노’의 원래 발음이 ‘훈누’나 ‘훈’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흉노족의 먼 후손에 해당되는 지금의 몽골인들은 사람을 ‘훈’이라고 부른다. 가령 한국인을 몽골어로 부르면 ‘솔롱고스(한국) 훈(사람)’이라고 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훈족은 흉노족과 같은 집단이었을까? 이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 중국 북위의 황제인 탁발준(拓跋浚, 452~465)에게 보내진 소그드어 문서에서는 서기 310년, 중국의 수도인 낙양을 함락시킨 흉노족 군대를 ‘훈족’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스트라보(BC 63~AD 23)는 훈족의 위치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위치가 바로 흉노족의 주요 활동 지역이다. 그리고 서기 355~365년 훈족은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의 유목민인 알란족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중국 사서 《위서(魏書)》에는 흉노족이 엄채(알란족)를 공격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아울러 로마 학자인 마르셀리누스는 이 사건을 훈족이 저질렀다고 기록했다. 즉, 당시 동서양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과 로마는 흉노족과 훈족을 같은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터키사》, 이희수)

374년, 유럽에 등장한 낯선 집단

훈족, 즉 흉노족은 대체 어떤 이유로 몽골 초원에서 멀리 유럽까지 오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으나, 그들이 원래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에 살다가 중국 및 다른 유목 민족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설이 신빙성이 높다.

기원전 60년을 시작으로 흉노족 내부에서는 5명의 선우(單于, 흉노족의 군주)가 나타날 정도로 극도의 혼란과 내분이 계속되었다. 그중 호한야선우는 경쟁자인 질지선우와의 싸움에서 불리해지자 중국 한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복속하여 신하가 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미녀 왕소군과 결혼하여 고사를 남기기도 했다.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와 연합하여 질지선우를 공격했는데, 세력 다툼에서 불리해진 질지선우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현재의 중국 서부 신강 위구르 자치구 지역으로 달아났다. 이때가 기원전 51년인데, 이로써 흉노는 호한야를 비롯하여 중국에 복속한 남흉노와, 질지를 따라 서쪽으로 이주한 북흉노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서쪽으로 이주한 질지선우는 카자흐스탄 남부의 원주민인 ‘강거’와 신강 서북부의 키르기즈족, 오손족 등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넓혀 나갔으며, 기원전 41년 무렵에는 탈라스와 추강 사이에 도읍이 될 성을 건설했다.

하지만 한나라는 적대 세력인 흉노족이 다시 힘을 회복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기원전 36년, 한나라의 장군 진탕은 7만의 군사를 이끌고 질지선우의 근거지인 선우성을 공격했다. 이때 성을 지키고 있던 흉노군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나라 군대보다 훨씬 적었다. 선우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질지를 포함한 흉노의 권력자 1518명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흉노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질지가 죽고 남은 잔당들은 한나라의 손이 닿지 않는 더 먼 서쪽으로 달아나 카스피 해와 아랄 해에 근거지를 틀었다. 그들은 주위의 유목민들을 끌어들이고 동방에서 새로이 이주해 오는 다른 흉노족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런 과정은 20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서기 4세기 중엽 동방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온 에프탈족이 흉노족을 압박하자, 북흉노는 이들을 피해 더욱 먼 곳인 서쪽, 즉 유럽으로 대규모 이주를 단행했다.

훈족의 기병대를 상상한 그림

훈족은 로마에서 페르시아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주파하는 놀라운 기동성을 보였다.

그리고 서기 374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고 있던 동고트족은 동쪽에서 몰려오는 이방인들과 마주쳤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불렀던 것처럼 그들을 ‘훈족’이라고 불렀다. 훈족이 374년을 기점으로 유럽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들이 바로 한나라를 피해 서쪽으로 도망친 북흉노의 후손들이었다.

이때 훈족을 이끈 지도자는 발라미르였다. 그의 지휘하에 훈족은 현재의 러시아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던 유목민 알란족을 굴복시켰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동고트족이 세운 동고트 왕국을 맹렬히 공격하여 국왕 아르마나리크를 자살하게 만들고, 후임자인 후리문트를 동고트 왕으로 세워 지배하에 두었다. 이때부터 동고트족은 80년 동안 훈족에 복종하고 살았다.

훈족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던 고트족의 다른 일파 서고트족을 이끈 국왕 아타나리크는 드네프르 강에서 훈족에 맞서 싸웠으나 참패하고 375년 로마제국 영토 내로 도망쳐 들어갔다. 서고트족의 이동이 바로 훗날 세계사에서 부르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초래한 사건의 시작이었다.

393년, 훈족은 남쪽으로 원정을 단행했다. 훈족을 지휘한 사령관은 바시크와 쿠르시크라는 두 장군이었는데, 현재 터키 동부 도시인 에르주룸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유프라테스 지역과 말라티아, 추쿠로바 등지를 잇달아 휩쓸었다. 그리고 시리아 동부인 에데사, 안티옥, 타르수스를 점령한 훈족은 계속 서남쪽으로 진격하여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부근까지 도달했다.

395년, 훈족은 다시 중동 원정에 나서 소아시아 반도의 중앙부인 카이세리, 카파도키아, 갈라티아를 공격하다가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고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북쪽의 우크라이나로 철수했다.

노예도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이쯤에서 훈족의 일상생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훈족이라고 항상 전쟁만 하며 산 것은 아니었다.

훈족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었을까?

훈족이 흉노의 후손이라면, 그들의 외모는 지금의 몽골인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훈족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꺼리지 않았다. 따라서 훈족 내부에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함께 공존하며 살아 갔을 것이다.

훈족은 편두를 하는 특이한 풍습도 가지고 있었다. 편두는 갓난아이일 때, 머리를 무거운 돌로 짓눌러 전체적으로 길고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훈족의 지배를 받았던 동고트족과 게피다이족 등 게르만 부족들도 편두를 따라 했다.

훈족은 원래 유목민이라, 가축이 끄는 수레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판노니아(헝가리 지역) 초원에 정착한 이후로는 통나무로 만든 집을 짓고 살았다.

전쟁이 없을 때 훈족은 뛰어난 가죽 세공인이자 목동, 가축 상인이었다. 또한 통나무를 파서 만든 단순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뱃사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훈족에게 파견된 동로마 역사학자 프리스쿠스는 자신을 포함한 동로마인 사절들이 훈족 뱃사공이 모는 통나무배를 타고 도나우 강을 건넜다고 기록했다.

기본적으로 유목민이다 보니 훈족의 음식은 주로 고기와 유제품이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를 직접 만나 그가 베푼 연회에 참가했는데, 왕임에도 불구하고 아틸라는 나무 접시에 담긴 삶은 고기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훈족이 생선도 좋아했을까? 프리스쿠스를 대접할 때, 황소 고기와 함께 생선을 음식으로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생선도 먹었을 테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목민이 가축을 잡는 것에 비해 물고기를 낚시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에서 발견된 훈족의 무쇠솥

서기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훈족의 옷은 주로 소나 양의 가죽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물론 개중에는 로마인들과 교역을 하면서 얻은 비단 같은 좀 더 고급스러운 옷감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왕족이나 부자들이 입었고, 대부분의 훈족들은 가죽옷을 입었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믿었는지는 자세한 자료가 없어 알기 힘들다. 다만 동로마제국의 마르쿠스 주교가 훈족 왕들의 무덤을 도굴하자, 아틸라가 매우 분노하여 동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훈족은 조상 숭배 신앙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선조인 흉노족처럼, 하늘과 땅과 해와 달 등 자연을 신격화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훈족 사회는 지배층인 왕족과 귀족, 그리고 피지배층인 평민과 노예 등으로 구분되었다. 왕족은 왕을 선출하는 특별한 가문 출신으로 한정되었으며, 귀족들은 왕의 신하이면서 각자 자신에게 복종하는 백성들을 따로 거느리고 있었다. 평민은 왕족과 귀족에 복종해야 했으며,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는 지역의 귀족을 주인으로 섬겼다. 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귀족을 찾아가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평민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마음대로 결혼할 권리도 있었다.

노예들은 주로 전쟁터에서 잡아온 외국인들이었는데, 운이 좋거나 주인의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자유를 얻어 평민이 되거나 심지어 귀족으로 승격될 수도 있었다. 프리스쿠스와 만난 어느 훈족 귀족은 자신이 본래 훈족에게 잡혀 온 로마인 포로였는데, 한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워 훈족 주인을 구해 준 대가로 자유를 얻었으며, 훈족 여성과 결혼하고 많은 돈을 벌어, 로마에 살았을 때보다 더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자랑을 하기도 했다.

뛰어난 기마 궁술과 공성술

로마와 게르만족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의 군대와 전술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

훈족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가볍게 무장하고 말을 탄 채로 활을 쏘는 기마 궁수로 구성되었다. 한 명의 훈족 기병은 세 마리의 말들을 거느렸는데, 말을 타다가 지치면 다른 말로 갈아타서, 뛰어난 기동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훈족 병사의 주요 무기는 단연 활이었다. 훈족의 활은 위가 아래보다 조금 더 긴 비대칭 형태이며 전체 길이는 130~140cm이고, 화살촉은 쇠나 동물의 뼈를 날카롭게 갈아 만들었다. 화살의 유효 사정거리는 약 60m 정도였다.

로마의 역사가 조시무스는 훈족이 멀리서 구름처럼 적을 에워싸고 화살을 퍼붓는 전술을 구사한다고 기록했다. 그들의 조상인 흉노족이 그랬던 것처럼 훈족 기병들도 기마 궁술에 뛰어났던 것이다.

훈족은 활을 매우 소중히 여겼는데, 사람이 죽으면 진짜 활이 아닌 모형으로 만든 활을 무덤에 넣었다. 활은 훈족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동로마 황제는 아틸라가 죽고 난 뒤에 활이 부러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훈족이 키운 말은 어땠을까? 5세기의 로마인 학자 베게티우스는 훈족의 말은 키가 작고 머리가 크며 털이 많지만, 추위에 견디는 능력과 발굽으로 눈을 파헤치고 풀을 찾아내는 능력, 주인에 대한 복종심 및 체력에서 로마의 말보다 더 뛰어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훈족이 항상 기병으로만 싸웠던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 초원에 정착한 이후에는 대규모의 말들을 먹일 목초지가 부족했던지, 가난한 훈족들은 말을 타지 않고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보병으로 싸웠다. 훈족이 서로마군과 크게 싸웠던 샬롱 전투에서는 창과 방패를 든 많은 수의 훈족 보병들도 참가했다.

대부분의 훈족들은 털가죽 외투와 모자, 그리고 긴 장화를 신어 날렵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물론 훈족 군대에 경무장 부대만 있지는 않았다. 모든 훈족 병사는 무기나 장비들을 자신이 직접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왕족이나 귀족같이 부유한 계층은 신체를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금속 갑옷과 방패, 투구도 착용했다.

하지만 훈족 군대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경무장 기병이었다. 물론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들도 훈족 군대에 포함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훈족에 복속된 다른 유목 민족인 사르마티아나 알란족 출신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중무장 기병들은 군대의 양 측면에 배치되어 대기하고 있다가, 경무장 기병들이 적진에 화살을 퍼부어 피해를 입히고 적진이 느슨해지면, 그때 양옆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며 충격을 가하는 용도로 투입되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훈족은 유럽에 정착하면서 요새나 성벽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 기술도 터득했다. 그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성탑이나, 성문을 부수는 파성추, 성벽을 타고 넘는 사다리도 만들어 실전에 배치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싸우던 모든 야만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훈족만이 요새 공격이 가능하다고 기록했다.

유럽 침공과 영웅 아틸라의 등장

서기 400년 무렵 훈족은 하나의 지도자 밑에 통일된 단일 조직체가 아니라, 여러 명의 왕들이 각자를 따르는 부족들을 거느리고 활동하던 상태였다. 제일 유력한 지도자는 울딘이었으며, 그 밖에도 훗날 등장하는 아틸라와 블레다 형제의 아버지인 문주크를 비롯해 문주크의 형제인 루아 및 옥타르, 아이바르스 등 많은 왕들이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루마니아 동부까지 이르는 영토를 나누어 지배했다.

5세기 초, 훈족은 동로마제국을 상대로는 침공 위협을 내세우며 황금을 받아 냈고, 서로마제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훈족이 두 로마제국을 상대로 서로 다른 정책을 구사한 이유는 로마인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서 그들이 하나로 뭉쳐 자신들을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서로마보다는 동로마가 더 부유한 지역이어서 얻어 낼 수 있는 재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훈족은 본격적으로 로마제국에 맞서지 못하고 로마에 고용된 용병으로 활동했다. 406년, 동고트족 출신 지도자인 라다가이수스가 부르군트와 콰디, 수에비, 반달 등 게르만족들을 모아 서로마에 반란을 일으키자, 서로마의 총사령관 스틸리코는 훈족 용병들이 포함된 군대로 파에술레에서 라다가이수스를 오랫동안 포위한 끝에 결국 그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훈족 용병의 지도자는 울딘이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수에비족과 반달족을 포함한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은 훈족을 피해 라인 강 너머의 서로마 영토로 집단 이주했다.

울딘은 자신의 세력에 무척이나 자부심을 드러냈는데, 409년 동로마의 트라키아 총독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원한다면 나는 태양이 비치는 모든 땅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울딘의 호언장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로마제국이 울딘의 부하들을 뇌물과 이권으로 회유하자, 그들은 울딘에 반기를 들고 이탈하여 동로마로 대거 투항했고, 부하들의 반란에 당황한 울딘은 멀리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410년에 죽었다.

울딘이 죽자 대부분의 훈족들은 다른 왕족인 카라톤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카라톤은 412년부터 422년까지 10년 동안 훈족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422년이 되자 네 명의 왕족인 문주크, 옥타르, 아이바르스, 루아가 권력을 놓고 다투었는데, 결국은 루아가 지도자들의 대표로 올라섰다. 그 후에 문주크는 곧 죽었고, 그의 두 아들인 블레다와 아틸라는 숙부인 루아의 집안에서 자랐다.

루아는 울딘보다 역량이 더 뛰어났다. 422년 동로마가 훈족의 분열을 노리고, 복속되어 있던 여러 부족들의 반란을 선동해 훈족을 공격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 루아는 침착하게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동로마의 침공을 격퇴시켰다. 그리하여 루아는 동로마로부터 매년 158kg의 황금을 공물로 받아 내는 협상을 맺었다.

또한 루아는 서로마와 인질 교환 조약도 맺었는데, 유력한 젊은 귀족을 각자 서로의 왕궁으로 보내 자라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서로마에서는 명문 귀족인 아에티우스가 훈족 왕실로 보내졌고, 반대로 훈족에서는 아틸라가 서로마 황실로 보내졌다. 이런 이유로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아틸라는 서로마를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젊은 시절의 경험을 훗날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423년,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보낸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하자 서로마는 루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루아는 즉각 응답하여 6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로 달려갔다. 훈족이 서로마를 돕고 나서자 동로마 군대는 훈족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주고는,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하고 재빨리 철수했다.

이때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인질에서 풀려나 35세의 나이로 서로마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로마의 권력 다툼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루아에게로 달아나 그가 보내 준 훈족 군사들의 힘을 빌려 권력을 장악했다.

434년, 루아가 죽고 그의 후계자로 두 조카인 블레다와 아틸라 형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옥타르와 아이바르스는 서부와 동부의 변경 지역을 다스렸다. 블레다와 아틸라는 약 11년 동안 훈족의 최고 지도자로 공동 통치권을 행사했다. 같은 해, 아틸라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보낸 사절단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 네 가지의 요구 사항을 말했다. 첫째는 훈족에 복속되어 있는 다른 부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부추기지 말고, 둘째는 훈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동로마로 달아난 망명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며, 셋째는 훈족과 동로마의 무역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하고, 넷째는 동로마가 매년 훈족에게 공물로 보내는 황금을 315kg으로 늘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동로마 측은 아틸라가 내건 요구 조건을 모두 승인했으며, 훈족 지역에서 동로마로 피신한 망명자들을 모두 넘겨주었다. 아틸라는 트라키아로 그들을 끌고 가, 동로마 사신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처형해 버렸다.

435년 무렵, 훈족의 영토와 위세는 최고 절정에 달했다. 북으로는 발트 해, 남으로는 흑해, 서로는 알프스 산맥, 동으로는 우랄 산맥까지 실로 광대한 영역이 훈족의 지배를 받았다. 동고트, 알란, 사르마티아, 게피다이, 루기, 헤룰리족 등 훈족에 복속된 부족들도 45개나 되었다. 훈족은 로마제국처럼 피정복민들을 자신들이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도자가 훈족 왕에게 신하임을 인정하고 세금을 바치는 정도에서 만족하는 간접 지배에 그쳤다.

한편, 서로마제국은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영내로 마구 들어와 약탈과 파괴를 저지르는 바람에 큰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부르군트족의 침략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서로마 군대의 총사령관 아에티우스는 이번에도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급기야 437년 아틸라가 보낸 훈족 군대는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연합 작전을 벌여, 보름스에서 부르군트족과 치열한 대격전에 돌입했다.

전투의 승패는 훈족과 서로마군의 대승리로 끝났고, 부르군트족의 군디카르 왕과 2만 명의 전사들은 모두 전멸했다. 이 사건은 그로부터 약 800년 후인 1200년, 중세 독일의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서쪽에서 활동한 훈족은 이제 다시 동쪽으로 창끝을 돌렸고, 440년부터 아틸라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와 전쟁에 돌입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훈족으로부터 도망쳐 온 동고트족 아르네기실후스를 트라키아 주둔 군사령관에 앉혀, 434년 아틸라와 맺었던 협정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동로마의 마르쿠스 주교가 콘스탄티아 외곽에 있는 훈족 왕들의 무덤을 도굴하자, 이를 훈족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 아틸라는 크게 분노하여 동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441년, 아틸라는 훈족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의 영토인 라타아리아와 비미나키움, 싱기두놈(베오그라드), 마르구스를 잇달아 점령했다. 때마침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아틸라가 나이수스를 점령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서둘러 성벽을 수리했고, 아틸라는 도시 외곽에 이르렀을 때에도 차마 성벽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은 그 두께가 6m나 될 만큼 두껍고 튼튼해서 훈족이 가진 공성 장비로는 도저히 부술 수 없었다.

대신 아틸라는 필리포폴리스와 아르카디오폴리스, 아티라스 등을 잇달아 손에 넣었다. 페르시아에 파견된 동로마 주력 부대가 뒤늦게 돌아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군대와 트라키아에서 전면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주력 부대가 패배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과 친분이 두터운 아에티우스를 중재자로 내세워 아틸라와 평화 협상을 했다. 내용은 동로마가 훈족에게 해마다 바치는 금의 양을 1050kg으로 늘리고, 거기에 3t의 금을 더 주기로 한 것이었다.

동로마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훈족 내부는 평화롭지 못했다. 지금까지 공동 통치권을 행사해왔던 블레다와 아틸라 사이에 불화가 싹텄다. 두 형제는 물밑으로 서로를 억누르고 최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암투를 벌였다. 결국 444년 블레다가 사망하고 최후의 승자는 아틸라가 되었다.

훈족의 전성기를 이끈 왕 아틸라(1843~1847, 유진 들라크루아)

서쪽으로 향하는 아틸라의 칼

448년, 동로마의 학자인 프리스쿠스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헝가리 판노니아에 있던 아틸라의 궁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훈족 내부의 실상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프리스쿠스는 훈족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쇠고기와 생선 등 음식을 풍족하게 대접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만난 아틸라는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깨끗하게 빤 새 옷을 입었으며, 그의 친위대 병사들은 호화로운 옷을 입고 금잔과 은잔에 술을 마시고 은접시에 온갖 산해진미를 담아 게걸스럽게 먹었으나, 정작 아틸라 본인은 옷차림과 음식에서 신하들에 비해 훨씬 소박했다고 한다.

이 밖에 아틸라는 동로마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사절단에 암살범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나, 그 암살자를 죽이지 않고 암살에 성공했을 시 그가 받기로 했던 것만큼의 금을 자루에 넣어 돌려보내는 등 아량을 베풀었다고 한다.

프리스쿠스가 동로마로 귀환하자 아틸라는 다시 동로마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동로마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군대는 트라키아와 일리리아, 테르모필라이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순식간에 진격했다. 하지만 450년, 동로마의 새 황제로 즉위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맺은 모든 협상을 무효화시키며 강경 자세를 일관했다.

아틸라가 죽기 직전인 450년, 훈족의 최대 영토를 나타낸 지도

그런데 아틸라는 동로마를 응징하지 않고, 대신 지금까지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던 서로마를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선 야전에서는 동로마 군대를 계속 격파해도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삼중 성벽을 뚫지 못하는 한, 동로마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또한 잇따른 공격으로 동로마 영토가 황폐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동안 건드리지 않은 서로마를 공격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고, 동로마보다 서로마가 더 허약하다고 본 탓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하려면 명분이 중요한데, 마침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의 여동생인 호노리아가 시종과 불륜을 저질렀다 임신을 하여 감금된 일이 발생했다. 호노리아는 다급한 나머지 아틸라에게 남편으로 맞을 테니 자신을 구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아틸라는 이 편지를 내세워 자신이 호노리아와 결혼하는 대가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을 지참금으로 달라고 발렌티아누스 3세에게 요청했다.

물론 발렌티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아틸라는 호노리아와 갈리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마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451년, 아틸라는 훈족과 게르만족으로 이루어진 대군을 이끌고 3월에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서로마군의 총사령관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족과 프랑크족 등 게르만 부족들의 동맹군을 규합하여 아틸라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그가 쳐들어오는 갈리아 동북쪽으로 진군했다. 4월 7일, 아틸라는 메스를 점령하고 6월 14일에는 오를레앙으로 진격했으나, 서로마군이 먼저 점령한 것을 확인하고는 한발 물러서 지금의 파리 동남쪽인 샬롱으로 이동했다. 서로마군 역시 아틸라를 쫓아 샬롱으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451년 6월 20일, 샬롱에서 서유럽의 운명을 건 대격전이 벌어졌다. 카탈라우눔 전투라고도 불리는 이 싸움에서 아틸라와 아에티우스 모두 필사의 각오로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서로마군 편에 섰던 서고트족은 국왕인 테오도리크가 전사했으며, 훈족 편에 선 동고트족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훈족 진영은 기병뿐 아니라 보병들도 앞세워 투입했다.

그 밖에 훈족과 서로마군에 소속된 게르만족들도 저마다의 전술로 창으로 찌르고 긴 칼을 휘두르며, 화살을 쏘거나 창을 던지며 싸웠다. 얼마나 전투가 격렬했던지, 죽은 병사들의 영혼마저 계속 싸웠다는 전설이 나돌기도 했다.

사원을 약탈하는 훈족을 상상한 그림(조르주 앙투안 로슈그로스, 19세기)

막판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아틸라는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그는 마차로 주변을 둘러싸고 그 안에 나무 안장들을 쌓은 뒤, 혹시 서로마군이 들어오면 스스로 불에 타 죽을 준비까지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승세를 잡았음에도 훈족을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아틸라는 서둘러 마차 방벽 안에서 나와 남은 병력을 수습하고, 20일 후에 본거지인 판노니아로 무사히 철수했다. 서로마군 역시 피해가 너무나 커서 차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샬롱 전투는 훈족이 유럽에 나타난 이래 벌인 가장 큰 전투였다. 애초에 아틸라가 계획한 갈리아 정복은 실패했으니, 결과적으로 본다면 훈족의 패배라고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 원정과 아틸라의 최후

하지만 아틸라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샬롱 전투로부터 1년 후인 452년, 아틸라는 다시 대군을 일으켜 원정에 나섰다. 이번 목적지는 서로마의 중심부인 이탈리아 반도였다. 훈족 군대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샬롱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듯,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군대는 이탈리아 곳곳에서 파괴와 살육을 일삼았다. 현재 베네치아 근처의 도시인 아퀼레이아가 함락된 것을 시작으로 티키눔(파비아)과 메디오라눔(밀라노)이 훈족에게 굴복했다. 일설에 의하면 아퀼레이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훈족이 쫓아올 수 없는 늪지대로 피신해서 새로운 도시를 세웠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의 베네치아라고 한다.

훈족의 맹렬한 기세에 겁을 먹은 서로마 황실은 튼튼한 성벽과 늪지대로 에워싸인 대도시 라벤나로 피신했다. 그리고 로마의 교황 레오1세가 아틸라를 방문해 평화 교섭을 시도했다. 레오 1세와의 협상에서 아틸라는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침 한여름이어서 이탈리아 내에는 더위와 전염병이 감돌아 훈족 병사들도 많이 죽거나 병에 걸려 있었다.

아틸라는 이탈리아에서 귀환한 이후, 453년 게르만족 여성인 일디코를 아내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 원인 불명의 죽음을 맞았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우선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아틸라의 아들들인 엘락과 뎅기지크, 에르낙이 내분을 벌였다. 여기에 훈족에 복종해 왔던 게피다이 부족장 아르다리크는 454년, 동고트족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판노니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엘락을 죽이고 훈족을 격파했다.

큰 타격을 입은 훈족은 뎅기지크와 에르낙의 인도하에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468년, 뎅기지크는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제국을 공격했으나 전사했다. 남은 훈족의 잔당들은 동로마제국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했다. 6세기 동로마제국의 명장인 벨리사리우스는 훈족 근위병을 두었고, 동고트 왕국과 반달 왕국을 공격한 원정에서 훈족으로 구성된 외인부대를 거느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559년, 훈족의 일파인 코트리구르족은 콘스탄티노플 근교에까지 진격했다가, 동로마군에게 격퇴당하고 우크라이나로 철수했다. 얼마 후, 훈족의 잔여 세력은 유럽에 새로 등장한 유목민인 아바르족에게 흡수되어 소멸했다.

공포와 매혹의 이미지

훈족은 약 70년 동안 유럽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외부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흔적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한때나마 로마와 게르만족을 두렵게 했던 탓에, ‘훈족’과 ‘아틸라’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공포와 매혹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훈족과 아틸라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들은 훈족이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쏟아져 나왔다. 중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아틸라가 등장하는 서사시인 〈아틀리의 노래(Lay of Atli)〉가 나왔으며, 1200년, 독일에서는 역시 아틸라가 등장하는 고전 문학인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가 발표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아틸라는 다시 유럽인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로 쓰였다. 특히 노래로 배우들의 대사를 표현하는 오페라에서 아틸라가 자주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극작가인 베르디는 1846년, 침략자 훈족에 맞서 조국 로마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오페라 〈아틸라〉를 발표하여 큰 호평을 받었다.

이 밖에도 20세기 들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들은 그들의 적인 영국으로부터 ‘훈족’이라고 불렸다. 그 옛날 유럽을 위협했던 훈족처럼 독일인들이 잔인한 야만인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 훈족 [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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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엽 이후 볼가 강 동쪽에서 모습을 나타내,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평원지대를 지배하던 알라니족을 무너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돈 강과 드네스트르 강 사이에 있던 동고트 제국을 정복했다.

376년경에는 대략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에 살고 있던 서고트족을 정복했으며 이로써 로마 제국의 도나우 강 국경지역에까지 세력을 뻗게 되었다.

 

훈족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은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395년경에 쓴 기록들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농경(農耕) 방법조차 몰랐던 원시적인 유목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집도 없었으며 왕도 없었는데, 이들 내부의 각 소집단들은, 암미아누스의 표현대로라면, 영장(靈長 primate)들의 지도를 받았다.

 

4세기에 훈족 전체를 통괄해 지배하던 지도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훈족은 전사(戰士)로서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마상(馬上) 사수(射手)들이었으며, 완벽한 승마술, 잔인한 공격과 예측을 불허하는 반격 능력, 그리고 전략적인 기동성 등으로 어떤 싸움에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서고트족이 멸망한 후 반세기 동안 이들은 중앙 유럽의 수많은 게르만족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로마 제국과도 맞서 싸웠다.

 

432년에 이르러 훈족 내부의 여러 소집단들의 지도력은 한 명의 왕 루아(또는 루길라)에게 집중되었다. 434년 루아 왕이 죽자 두 조카 블레다와 아틸라가 왕권을 계승했다. 두 지도자는 마르구스에서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의 결과 로마는 기존에 훈족에게 바쳤던 공물의 2배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아마도 로마 제국이 협정에 조인된 액수를 다 채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441년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도나우 강 국경 지역을 공략해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445년경 아틸라는 블레다를 살해했으며, 447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발칸 지역을 정벌하고 그리스의 테르모필라이까지 남진(南進)했다. 암미아누스가 살던 당시 이래로 훈족은 로마 제국과의 협정과, 로마 제국에 대한 약탈, 그리고 로마 제국에 포로를 팔아 넘기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막대한 양의 금(金)을 모으게 되었다.

 

이러한 부(富)의 유입 결과 훈족 사회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군사적 지배권은 아틸라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했고, 아틸라 자신은 전쟁시에나 평화시에나 절대적인 독재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차출된 사람들'(logades)을 이용해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는데, 이들은 정부에서 일하는 동시에 아틸라에게 굴복한 종속 민족들에게서 음식과 공물을 거두어 들이는 역할을 했다.

451년 아틸라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으나 카탈라우니아 평야 전투(또는 마우리카 전투)에서 로마-서고트족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 싸움에서의 패배는 아틸라의 최초이자 유일한 패배였다.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략해 여러 도시들을 차지했으나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여러 명의 아들이 제국을 분할해 갑자기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종속왕국들과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였으며, 결국 455년 판노니아의 네다오 강 대전투에서 게피다이, 동고트, 헤룰리, 기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동로마 제국 정부는 이후 훈족들과의 접경지역인 국경지대들을 폐쇄했으며, 훈족들은 역사속에서 아무런 주요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점차로 사회적·정치적인 통일성마저도 상실해갔다. 5, 6세기에 인도와 이란을 침략한 헤프탈족과 일찍이 중국인에게 알려진 흉노족이 훈족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들과 훈족과의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다음백과- 훈족 [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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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