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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초기 로마를 7개월간 점령했던]켈트족[Celts]

Bawoo 2016. 3. 28. 20:55

켈트족[Celts]

 

프랑스 만화 《아스테릭스》 시리즈는 전 세계에서 1억 부가 팔린 유명한 만화이다. 이 만화는 고대 로마 시대를 무대로 로마군에 맞서 싸우는 갈리아인의 영웅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아스테릭스》에 언급되는 갈리아인이 바로 고대 유럽을 지배했던 용맹한 전사 켈트족(Celts)의 일파이다.

푸른 눈동자의 거인

켈트족은 인도 · 유럽어족에 속하며, 짧은 목과 높은 코, 움푹 들어간 눈과 큰 체격을 지닌 백인계 민족이다.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은 켈트족을 키가 크고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아주 드물게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거인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켈트족은 어디에서 유래한 집단일까?

일부에서는 그들의 원래 고향이 남부 독일이나 우크라이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인도 · 유럽어족(아리안족)의 일파에 속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고 유럽으로 이동해 왔다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역사에 켈트족의 이름이 처음 언급된 시기는 기원전 730년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온 ‘켈토이’라는 무역 상인들을 만났다는 그리스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인들이 기록한 ‘켈토이’가 바로 켈트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겨울이면 열리는 ‘저승의 문’

켈트족은 그들만의 문자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확히 어떤 형태의 종교를 믿었고, 어떻게 현세와 사후 세계를 인식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단, 아일랜드에 살던 켈트족들은 오검 문자를 만들기는 했다. 그러나 이 오검 문자는 주로 비문 같은 짧은 글을 남길 때만 이용할 수 있었고, 많은 양의 정보를 기록할 수는 없었다. 켈트족은 지식을 문자로 남기기보다 외워서 전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다만, 그들과 접촉했던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뿐이다.

켈트족의 신앙은 그들의 문화가 가장 오랫동안 보존된 아일랜드의 고전 문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일랜드의 켈트족들은 주로 바다의 신 리르, 힘과 시의 신 오그미우스, 태양의 신 루그, 지하 세계의 신 돈, 죽음의 신 케르눈노스, 대지의 신 수켈루스, 피와 전쟁의 신 테우타테스, 천둥의 신 타라니스 등을 섬겼다. 이 신들의 이름은 브리튼(britain, 지금의 영국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부르던 호칭)의 켈트족들이 숭배한 신들과 이름만 약간 다를 뿐 각각의 역할은 거의 동일하다.

켈트족은 순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승과, 죽어서 가게 될 저승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하나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형태만 달리할 뿐 그 자체는 불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저승에 갔다가 시간이 지나면 이승으로 돌아와 사람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켈트족은 죽음을 편안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따뜻한 햇빛과 풍성한 음식이 넘쳐나는 행복한 저승으로 가서 편히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켈트 문화의 가장 큰 흔적은 바로 할로윈(Halloween)이다. 이 할로윈은 켈트족이 벌이던 삼하인(Samhain) 축제가 변형된 것이다. 켈트족은 11월에서 3월까지 이어지는 겨울(삼하인) 기간에는 저승의 문이 열려 온갖 유령들이 이승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신들을 겁주어 쫓아 보내기 위해서 해골이나 순무를 사람 머리처럼 조각해서 그 안에 갈대 불을 밝혀 두는 풍습을 지켰는데, 켈트족의 후손인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순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호박을 해골처럼 조각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할로윈 축제의 상징인 ‘잭 오 랜턴’

고대 켈트족들이 삼하인 축제 때, 사람의 두개골 안에 촛불을 넣던 풍습이 변형된 것이다.

초기 로마 최대의 굴욕

기원전 500년 무렵, 켈트족은 그 세력이 최절정에 달했다. 현재의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북부,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 남부 등 유럽의 많은 지역에 켈트족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켈트족의 팽창을 나타낸 지도

이 과정에서 켈트족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오피둠’이라는 요새를 건설했다. 오피둠은 나무와 흙과 돌을 정교하게 쌓아서 만들었는데, 그 유적지들은 헝가리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기원전 400년에 들어서면서 켈트족은 무시무시한 전사가 되어 유럽과 지중해를 휩쓸기 시작했다. 갈리아에 살던 켈트족은 뛰어난 지도자 브렌누스의 지휘하에 풍요로운 땅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브렌누스는 먼저, 북부 이탈리아에 자리 잡고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을 공격했다.

396년, 브렌누스가 이끈 켈트족 전사들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멜품과 보노니아, 마르자보토, 펠시나 등을 연이어 점령했다. 계속되는 켈트족의 공세로 에트루리아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결국 남쪽의 로마인들에게 패배하여 그들에게 흡수당하고 말았다.

에트루리아인들을 쳐부순 켈트족은 더욱 세력을 뻗쳐 로마로 몰려갔다. 기원전 390년(혹은 387년), 알리아 강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켈트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군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켈트족보다 두 배나 많은 2만4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과는 켈트족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만 해도 무겁고 둔중한 그리스식 전술로 싸웠던 로마인들은, 크고 긴 검을 휘두르며 난폭하게 달려드는 켈트족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로마를 약탈하는 브렌누스(폴 자민, 1893년) 
로마를 약탈하는 브렌누스(폴 자민, 1893년)

 

로마군을 격파한 켈트족은 그대로 로마로 달려가 도시를 함락시키고 7개월 동안이나 로마에 머물면서 마음껏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켈트족 병사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노 사원으로 대피한 로마인들도 모조리 죽이려 했으나, 로마인들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만약 켈트족이 유노 사원으로 들어가 생존한 로마인들마저 학살했다면, 이후 로마의 찬란한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켈트족은 결국 로마에서 물러났다. 도시에 너무 오래 머무는 동안 전염병이 널리 퍼져 죽거나 병든 병사들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더는 로마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브렌누스는 로마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로마인들에게 황금 1000파운드를 요구했다. 로마인들은 있는 대로 금을 긁어모아 켈트족에게 주었다. 하지만 켈트족은 저울의 눈금을 조작해서 약속된 양보다 더 많은 금을 받아 냈다. 이 사실을 안 로마인들이 항의하자 브렌누스는 자신의 검마저 저울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비웃었다.

“정복당한 자에게는 재앙만이 있다(Vae victis)!”

금을 받은 브렌누스와 켈트족 전사들은 약속대로 로마에서 물러갔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과 수모를 결코 잊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군제를 방어보다 기동성에 주안을 둔 방식으로 대폭 개편했다. 장창을 쥐고 늘어선 그리스 방식의 밀집 창병 진형이 아니라, 창을 던지고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단검으로 적을 가까이에서 공격하는 레기온(군단병)의 형태로 바꾼 것이다.

한참 뒤인 서기 410년, 고트족이 로마를 함락시키기 전까지 약 800년 동안 로마를 함락시킨 민족은 켈트족 이외에 없었다. 그만큼 켈트족은 초기 로마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고대 서양 세계를 뒤흔든 켈트 용병들

한편 로마가 켈트족에게 함락되어 온갖 굴욕을 당한 지 약 55년 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낯선 이방인들과 만나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지금의 루마니아 등지에 살고 있던 켈트족이었다. 장차 그리스를 통합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는 불멸의 위업을 달성하게 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켈트족 지도자에게 “당신들은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라고 물었다. 이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켈트족 지도자는 “우리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해 대왕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좀 후대의 기록이지만, 켈트족 전사들은 자신들이 죽인 적의 목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 삼나무 기름을 발라 나무 통 속에 넣어 보관했으며,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이것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해골을 집 난간에 올려놓고, 그 안에 촛불을 꽂아 밤을 밝히는 전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해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인들의 눈에 켈트족이 얼마나 사납고 무서운 전사들로 비추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회담을 마친 지 약 50년 뒤인 기원전 279년, 수천 명의 켈트족 전사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때 켈트 전사들을 이끌던 지도자의 이름도 브렌누스였다.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침략했던 그 브렌누스와는 동명이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왕위를 놓고 여러 차례의 내전을 겪으며 국력이 약화된 마케도니아 왕국은 켈트족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켈트족은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들의 왕인 케라우노스를 죽였으며,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쪽인 그리스로 향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남하하던 켈트족은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그리스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고전을 했다. 그러다 인근의 그리스인 주민들이 협곡의 뒤로 돌아가는 샛길을 가르쳐 주어 상황을 급반전시킬 수 있었다. 샛길을 따라 그리스인들의 뒤를 공격한 켈트족은 당황하는 적을 압도했고, 놀란 그리스인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승리한 켈트족은 파르나소스 계곡을 따라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델포이 신전으로 진군했다. 신전을 지키던 사제와 그리스인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고, 켈트족은 신전에 보관된 금은보화들을 마음껏 약탈했다.

델포이 신전을 약탈한 켈트족은 동쪽인 마케도니아의 변경 지대로 향했다가, 마케도니아군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뜻하지 않은 패배를 겪은 켈트족 중 일부는 그들이 왔던 서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더 동쪽으로 가 바다 건너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로 향했다. 마케도니아군에게 퇴로가 막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켈트족은 소아시아의 중부 지역에 갈라티아라 불리는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다. 이 나라는 약 250년 동안 존속하며 뛰어난 기병대로 명성을 떨쳤다.

이 무렵 지중해 세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분열된 왕국들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중에서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간의 전쟁이 가장 치열했다. 두 나라 간의 전쟁 소식이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지자 이 정보를 접한 수많은 켈트족들은 용병이 되어 금화를 얻기 위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찾았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용병으로 복무한 켈트족들은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동족들끼리 죽고 죽이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전투 결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소속된 수천 명의 켈트족 기병들이 셀레우코스군을 유린하여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서로 싸우는 켈트족 전사들(H. R. 밀러, 1905)

 

공교롭게도 라피아 전투와 같은 무렵인 기원전 217년, 이탈리아 북부의 호수 트라메시노에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 포함된 켈트족 용병들이 로마군을 상대로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게 아깝게 패해 고배를 맛본 카르타고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고, 그 선두에 한니발이 나서서 로마를 상대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지금의 스페인 남부에서 8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한니발은 갈리아 남부를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게 되었는데, 기원전 225년의 텔라몬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있던 켈트족들이 카르타고군에 대거 가담했다. 그렇게 성립된 카르타고와 켈트족의 동맹은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에서 빛을 발한다. 이 격전에서 로마군은 치명적인 대패를 당했고, 이때 한니발이 거느리고 있던 켈트족 기병들은 로마군을 우회하여 후방을 찌르는 포위 공격에 한몫을 담당했다.

하지만 로마의 지구전과 보급로 차단으로 한니발은 끝내 이탈리아에서 철수했고, 기원전 202년 카르타고 남서부 자마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로마에게 참패하고 만다. 그리고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마침내 멸망했다. 서부 지중해에서 유일하게 로마를 견제할 수 있던 카르타고가 사라짐으로 인해 로마의 독주를 막을 세력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와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하는 켈트족

기원전 2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족은 로마군에게 패배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을 목표로 로마 군단을 이끌고 북상에 나섰다. 당황한 켈트족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엄격한 군기와 뛰어난 전술 체계를 갖춘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갈리아의 모든 켈트족들을 연합하여 카이사르와 맞서려 했던 용감한 지도자인 베르킨게토릭스도 기원전 52년, 마침내 알레시아에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라이오넬 로옐, 1899)

 

한때 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를 7개월 동안이나 점령했던 켈트족 전사들이 왜 로마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을까?

그동안 로마군의 전략 및 전술이 진보한 데 반해 켈트족의 전법은 그대로 정체된 상태였다. 전투 초반, 켈트족 전사들의 돌격에 당황했던 로마군은 켈트족을 향해 무거운 투창인 필룸을 던져 공세를 저지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필룸은 적의 방패에 꽂혀 방패를 못 쓰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지만, 사람이나 말에 꽂혀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귀족들로 구성된 기병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병이었던 켈트족 전사들은 변변한 갑옷도 걸치지 않은 맨몸 상태여서 초전부터 로마군의 투창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투창의 세례를 용케 벗어나 로마군의 대열과 맞닥뜨린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켈트족 전사들은 단순히 초반 돌격에만 의존했지만, 견고한 방패와 밀집 대형으로 맞서는 로마군의 방어진을 좀처럼 뚫지 못했다. 더구나 시간이 흘러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면 켈트 전사들이 휘두르는 장검은 좁은 공간에서 쓰기 불편했던 반면, 로마군이 가진 단검인 글라디우스는 찌르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갈리아가 로마에게 정복당하자 스페인의 켈트족도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원전 28년,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그 자신이 직접 참전하여 10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끝에, 스페인의 켈트족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에는 스위스에 살고 있던 켈트족과 소아시아의 켈트계 왕국인 갈라티아도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서기 43년, 로마제국은 지금의 영국 해협을 건너 브리튼의 켈트족까지 정복하려 나섰다. 41년 후인 84년에는 북부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 섬 전체가 로마군에게 정복당해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서기 2세기로 접어들자 중부 유럽의 켈트족도 무사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루마니아인 다키아에 살던 켈트족은 서기 106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이끈 로마군에게 대량 학살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북쪽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와 체코, 헝가리의 켈트족들은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하거나 흡수되어 사라졌다.

2세기 이후, 유럽에서 켈트족의 자취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웨일즈 서부 등 극소수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그리고 432년, 웨일즈 태생의 수도사 성 패트리키우스는 아일랜드에 선교를 와서 켈트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덕분에 지금까지 패트리키우스는 아일랜드의 수호 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성 패트릭 데이’도 바로 패트리키우스를 기념하는 축제일이다.

켈트족의 영웅 아서왕

서기 410년, 브리튼에 주둔하던 로마군이 본국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철수하자, 그 틈을 타 게르만족인 앵글족과 색슨족들이 브리튼에 쳐들어 왔다.(오늘날 영국 연방의 하나인 잉글랜드, 영국 국민의 중심을 이루는 민족인 앵글로색슨족도 브리튼에 정착하여 영어를 퍼뜨린 집단인 앵글족과 색슨족에서 유래했다.) 이때 앵글족과 색슨족을 맞아 켈트의 고향인 브리튼을 지키기 위해 가장 용감하게 싸운 인물이 바로 전설의 영웅 아서왕이다.

아서왕의 이름은 서기 7세기 브리튼의 연대기 작가이자 수도사인 네니우스의 기록에 처음 언급된다. 네니우스가 남긴 연대기에 따르면, 아서왕은 켈트족 기병들을 이끌고 브리튼에 끊임없이 상륙하는 앵글족과 색슨족의 침략을 격퇴했다고 한다.

아서왕은 493년, 바돈 언덕에서 색슨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네니우스는 아서왕이 바돈 언덕 전투에서 색슨족 960명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아서왕의 용맹으로 인해, 그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앵글족과 색슨족이 브리튼에 대한 침략을 한동안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서왕이 켈트족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으로 희생되자 다시 브리튼에 대한 앵글족과 색슨족의 침공이 개시되었고, 결국 켈트족은 브리튼을 침략자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패배한 영웅에 대한 아쉬움은 브리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켈트족의 가슴속에 깊숙이 각인되었고, 색슨족과 바이킹, 노르만 등 이민족 침입자들이 브리튼을 정복해도 켈트족은 자신들의 영웅인 아서왕이 언젠가 살아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켈트족의 후손인 브리튼인과 아일랜드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조차 잊어버리고 정복자인 앵글로-색슨족의 말인 영어를 쓰게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아서왕을 기억하고 추앙했다. 서기 13세기가 되자 완전히 브리튼, 즉 영국인이 된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들도 아서왕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숭상하면서, 아서왕은 모든 영국인들의 숭배를 받게 되었다.

아서왕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와 소설들은 가히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아서왕과 관련된 대중 예술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과 미국에서 나오는데, 다분히 아서왕의 후손인 켈트족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켈트족은 한때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했을 정도로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족 연합 수준에 머물렀으며,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로 통합되어 발전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켈트족은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의 공격을 받고 그들에게 정복당하거나 동화되어 유럽의 지배권을 잃고 소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켈트족의 흔적은 서양 문명 곳곳에 스며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할로윈 축제와 영국의 아서왕 전설은 모두 켈트족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술인 위스키 역시,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만든 증류주인 우이스게 비아타(uisge beatha)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많은 도시 이름은 켈트족의 언어에서 비롯되었다. 한 예로 런던은 켈트족의 태양신인 ‘루그’를 섬기던 도시란 뜻이었다.

도서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저자도현신 | 출판사서해문집 전체항목 도서 소개

거란족, 흉노족, 수메르인 등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사라진 세계의 역사들을 이야기한다. 침략으로 소멸되고, 강대국으로 흡수 되는 등 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세계사의 다양한 줄기와 가지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남긴 유산이 우리가 사는....펼쳐보기

집필자

도현신 | 직업작가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순천향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2004년 장편소설 《마지막 훈족》(전2권)을 출간했으며, 단편소설 ‘나는 주원장이다’로 2005년 제4회 전국신인문학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 《한국사 악인 열전》《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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