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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후한 말~ 조위의 정치가]가후(賈詡)

Bawoo 2016. 8. 9. 21:47


   

가후


가후(賈詡, 147년 ~ 223년)는 중국 후한 말 ~ 조위의 정치가로, 문화(文和)이며 양주(凉州)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사람이다.


생애

정사 《삼국지》에서는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평가되는 책사로, 많은 인물을 섬겼으나 가는 곳마다 재능을 인정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지만, 염충이라는 인물만 “장량진평(모두 한 고조의 모신)과 같은 기략이 있다”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효렴으로 추천되어 조정 관직에 취임했으나 병 탓에 귀향하는 도중, 저족 반란군에 생포된 때 자신을 저족들에게 큰 위세를 떨친 당시 태위(太尉) 단경(段熲)의 외손자라고 순간 거짓말을 하여 겁먹은 저족 반란군이 석방해서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 때 가후는 "나를 죽이고 내 시체를 계속 보관하면 우리 외할아버지인 단경 장군님이 거액의 돈을 주고 내 시체를 찾아갈 것이다. 날 죽일 거면 내 시체나 잘 보관해라."라 말했다. 저족들에게 단경은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었으므로 가후를 석방했다. 나머지 포로들은 몰살당했다.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에서 권세를 장악할 무렵, 동탁의 부하이자 사위인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자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를 위시한 동탁의 부하가 동요하여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가후는 그 사람들을 설득하고 단결시켜 장안을 습격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으므로 《삼국지》에 주석한 배송지에게 화를 재초래한 사람으로 미움을 사서 여러 군데에서 비판받으나 가후는 이 공적으로 높은 관직에 취임하려 하지 않고, 관리 선발 임무를 맡아 많은 유명인을 등용하여 조정의 정치 체제 개선에 애썼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이각에게는 거북한 상대로 간주돼 동향 출신인 단외(段煨) 밑에 몸을 의지하는데 단외가 자신을 두려워하자 그 사람의 곁을 떠나 장수 밑으로 들어간다. 이때 가족은 단외가 있는 곳에 남아 있었는데 가후는 “단외는 나를 경계하니 내가 떠나면 즐거워하겠고 밖에서 강력한 지원자와 결합하리라고 기대하고서 가족을 후대하리라”고 판단했는데 그 예상대로였다.


이 무렵 장수조조와 항전했는데 가후의 의견을 듣지 않았을 때는 패배하고 가후의 계략을 이용했을 때는 승리했다. 조조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는데 조조는 이 전투에서 장남 조앙(曹昻)을 잃고서 거짓으로 성곽 서북을 공격해 세력이 약해진 동남을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역으로 복병을 놓아 조조를 유인하여 체포하려는 등 허허실실 전략을 구사했다.


나중에 원소(袁紹)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두 사람은 장수와 가후를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각각 사람을 보내왔다. 이때 가후는 “원소는 형제 원술조차 신뢰하지 않고 세력도 강력해서 우리를 경시하고 중용하지 않겠는데 조조는 천자(天子)를 받들고 세력이 열세이므로 자기 편이 늘어나기를 원하므로 과거의 사원은 문제 삼지 않고 우리를 틀림없이 중용하리라.” 라고 장수에게 진언해 조조에게 투항하라고 권한다. 조조는 그 사람들의 귀순을 기뻐하고 가후의 손을 잡고 “내게 천하인들의 신뢰를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그대다” 라고 말하면서 가후를 집금오에 임명했다.


조조를 받들게 된 가후는 수많은 책략을 내놓았다. 관도 전투에서는 결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고 서량에서 마초한수가 반란했을 때는 그 사람들에게 이간책을 쓰고자 일부러 군데군데 자를 지운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 마초를 의심하게 하여 사이를 벌려놓고 통제되지 않는 곳을 습격해 토벌에 성공하며, 후계자 문제에 관해서도 조비조식(曹植) 사이에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됐는데 조비는 자기 처지를 확실히 하고자 가후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구했다. 가후는 누구를 대하든 겸허하게 행동하고 태자로서 성실히 임하라고 조언했으며, 조조도 은밀히 상담하자 가후는 즉답하지 않고 “원소유표(劉表)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하여, 장남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기에 멸망한 사례를 들어 태자의 지위를 확정시켰다.


타인들이 자신의 재능에 경계심을 품지 않게끔 조용히 생활하고 절대로 사사로운 교제하지 않고 자녀들의 혼인 상대도 명문대가 출신을 고르지 않았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태위(太尉)에 임명되고서 천수를 누려 나이 77살에 죽었고 시호 숙후(肅侯)가 내려졌다.[1]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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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들은 주자학이 흥성하기 전에는 “한 번도 실패한 계책을 내지 않았다”고 가후를 호평했으나 주자학이 성립하고서는 주군을 수차 바꾼 행위를 거론하면서 호평하지 않았다. 《삼국지》 연구로써 유명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자인 교수 이중톈은 가후를 제갈량(諸葛亮)보다 훌륭한 책략가였으며 처세술에 능해 난세를 살면서도 천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호평한다.

가후의 친족관계

후(詡)┳목(穆)━모(模)┳윤(胤)
   ┃       ┗감(龕)
   ┗방(訪)
          …━필(疋 : 증손자)

가목은 군수를 역임했다. 가목이 죽자 가모가 뒤를 이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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