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袁術, ? ~ 199년 6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이자 중(仲)나라의 황제로, 자는 공로(公路)이며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생애
생애 초반
사세삼공(四世三公, 4대가 모두 삼공에 임명된 집안)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소(袁紹)의 사촌동생이라곤 하나, 실제로는 이복형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조(曹操)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는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난폭하여 협객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이후 태도를 고쳤다고 한다. 효렴으로 천거된 뒤 지방과 중앙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시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원소가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원술 또한 호걸이라는 평판이 드높아 끓임없이 원소와 명성을 다투었다고 한다.
대장군 하진(何進)이 권력을 잡자 하진의 심복이 되어 호분중랑장으로 있었다. 당시 원소는 단아하고 학식이 빼어난 선비로 이름이 높았으며, 원술 역시 당대의 호걸이라는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을 중용했던 하진은 그들을 따르던 많은 맹장과 현사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진이 십상시에게 참살(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당한 직후, 원술은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며 불을 질렀다.(십상시의 난) 동탁(童卓)이 낙양(落陽)에 입성하여 정권을 잡았을 때 원술을 후장군(後將軍)에 임명했지만 원술은 이를 피해 달아난다. 남쪽으로 달아났던 원술은 강남의 유력한 무인인 손견(孫堅)을 객장으로 삼으며 완 땅을 근거하여 세력을 일으켰다.
원소와의 대립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한다. 맹주인 원소는 동탁을 황제를 시해한 역적이라 규탄하고 당시 황실 역시 동탁에 의해 세워진 괴뢰 정부로 규정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높은 호응을 받아 각지의 호족과 지방관들은 원소의 선동에 이끌려 황실을 괴뢰로 간주하여 무시하고 거병하여 원소를 따랐다. 또한 원소는 높은 명망이 있던 황족인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다. 이는 유우를 구심점으로 하여 원소의 선동에 호응한 각지의 세력들을 결집하고자 함이었으나, 원술은 장차 신하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고 또한 현명한 유우가 옹립되면 자신의 야망에 방해가 될 것으로 여겼으므로 겉으로는 공의를 핑계되어 유우의 옹립에 반대하고, 당시 황실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장안(長安)까지 역적 동탁에게서 구출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원소에 대해서는 역심을 품고 있다고 규탄하며 대립했다. 또한 정실 출생이었던 원술은 평소 노비에게서 태어난 원소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내던 것을 시기했기 때문에 항상 경멸하여 공공연하게 원소를 '가노(家奴)'라고 일컬었는데, 당시 여론의 지지가 자신이 아니라 원소에게 쏠리게 되자 크게 분노하여 심지어 원소가 원씨의 자식이 아닌 사생아라는 말까지 퍼뜨리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유우 본인이 이를 굳게 거절했으므로 원소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으로는 유우의 추대에 실패하고, 안으로는 원술을 중심으로 뭉친 반대파의 비난을 받았으므로 결국 연합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또한 원소가 유우의 옹립으로 결집하고자 했던 추종세력들 역시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 각지에서 할거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이것이 군웅할거의 시작이다.
한편 원술은 손견 등을 선봉으로 삼아 동탁군을 격파하고 낙양까지 진군하며 잠시간 승승장구했으며 손견은 동탁이 야기한 화재를 진압했다. 《삼국지》 주석 《산양공재기》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손견은 옥새를 발견했는데 원술은 손견의 아내를 납치하여 손견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인 후 손견의 아내와 옥새를 맞교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원소 역시 이를 좌시하지 않아 평소 원술과 사이가 나쁘던 주씨 형제를 이용해 원술을 방해했다.
주앙(周昂)을 예주자사로 삼아 파견하며 예주와 사예 사이의 중간지점이며 원술군의 전진기지인 양성(陽城)을 점령했는데, 이로 인해 원술과 손견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고 이후 원술과 손씨 일가는 예주와 회남 일대에서 주씨 형제와 수 년간의 접전을 벌인다. 또한 원소는 형주의 유표(劉表)와 연합하며 원술이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도 견제했다. 원술 역시 북방의 공손찬(公孫瓚), 도겸(陶謙), 어부라(於夫羅) 등을 움직여 원소를 견제하며 형주로 진군하고 유표를 몰아붙였지만 손견이 전사한 뒤 전세가 불리해져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또한 원술은 사치스럽고 음란하며 영지를 다스림에 있어 세금을 마음대로 걷었으므로 점차 신망을 잃어갔다.
결국 형주 진출에 실패한 원술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공손찬 등과 함께 연합해 원소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이들은 모두 원소에게 격파되었으며, 원술은 원소에게 도달하기는커녕 당시 원소 진영에 속해 있던 조조에게 참패하여 근거지인 완을 잃고 도주한다.
재기
원술은 회남으로 도망쳤는데 그 곳에서 양주자사 진온(陳溫)과 진우(陳瑀) 등을 격파해 죽이고, 일대 중소 군벌들을 병합해 수춘을 근거지로 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무렵 원술은 마침내 숙적이었던 주씨 형제들을 모두 격파하여 내쫓는 데 성공한다.
양주 북부에 자리를 잡은 원술은 서주백(徐州白)을 자칭하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주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는 연합관계에 있던 도겸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병이 들어 위독해진 도겸과 서주의 호족들은 유비(劉備)를 서주목으로 추대하며 조조와 원술에게 맞서게 했고 서주에서는 유비와 원술의 전투가 벌어진다. 조조는 이 무렵 장막(張邈), 여포(呂布)의 침입을 받아 더 이상 서주를 공격할 수 없었다.
한편 손견의 장남 손책(孫策) 역시 원술을 따르고 있었는데, 자립할 야심을 품고 있던 손책은 도망간 양주자사 유요(劉繇)를 공격하게 해달라며 병사를 요청했다. 손책의 재능을 견제하고 있던 원술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아직 어린 손책에게 유요를 격파한 뒤 세력을 형성해 독립할만한 역량은 없다고 판단해 마침내 손책의 출정을 허용한다. 손책은 유요를 격파한 뒤 양주 남부를 장악했지만 아직 원술이 강성했으므로 여전히 원술에게 순종했다.
이때 이각(李傕)은 원술과 손을 잡으려는 생각에서 좌장군에 임명하고 양책후(陽翟侯)로 봉하며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를 칙사로 보내 매수하려고 했지만, 원술은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태부의 권한을 이용해)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도록 협박한다. 원술에게 억류된 채 이용당하던 마일제는 수치심과 노여움으로 인해 죽고 만다.
또한 이 무렵 장막은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했다. 장막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원술에게로 향하던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여포는 장막의 남은 막료들과 함께 유비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유비가 원술과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거한다. 원술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여포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원술은 여포를 이용해 유비를 죽이고 조조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여포의 사람됨이 워낙 단순하고 변덕이 극심했던 데다가 서주의 유력한 호족인 진규(陳珪) 역시 원술의 야망을 경계해 여포를 부추기며 원술과의 연합을 제지했으므로 결국 원술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유비를 죽이기 위해 수하 장수인 기령(紀靈)을 보냈으나 여포가 유비와 기령을 강제로 화해시키는 바람에 이 역시 무산되었다.
195년.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하나 조양(曹陽)에서 이각, 곽사(郭汜) 등에게 크게 패하고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이를 지켜본 원술은 한 황실은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 마침내 충신의 역할을 그만두고 참칭할 마음을 품지만, 막료 염상(閻象)이 반대하자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또한 이 무렵 원술은 황제를 맞이하려는 조조를 강력히 저지했다. 여러 차례의 전투 중 조조는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놓이기도 하나 결국 원술은 조조의 천자 봉대를 막지 못했다.
197년 봄. 마침내 민간에 떠도는 참언을 이용하여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1] 그러나 이로 인하여 원술은 민심을 잃었고,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했다. 이때 원술은 자신의 아들과 여포의 딸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를 승낙한 여포는 딸을 원술에게 보냈지만, 진규가 이를 말리자 이미 원술에게 딸을 보내 놓고서도 추격병을 보내 다시 빼앗아왔으며 원술의 사자인 한윤(韓胤)을 조조에게로 압송한다. 한윤은 허도의 저자에서 처형당했다.
대노한 원술은 장훈(張勳)을 대장으로 삼아 일곱 갈래로 대군을 보내 여포를 공격하지만 이 또한 진규의 활약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 9월, 원술은 진국(陳國)을 쳐서 진왕 유총(劉寵) 등을 죽이고 세력을 만회하려고 했으나 조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만년
한편 여포는 뒤늦게야 원술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저항했다. 여포가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당하자 원술은 직접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여포를 구원했지만 오히려 조조의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만다. 원술은 겨우 성을 지켜내며, 이후 다시는 여포를 구하기 위해 출전하지 못했다고 하니 원술이 얼마나 몰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여포는 붙잡혀 처형되었고 모든 낙관적 가능성을 상실한 원술은 사치와 포악함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원술은 첩 수백 명을 모두 비단으로 치장시키고 창고엔 쌀과 고기가 썩을 정도로 남아돌았으나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달아났고 남은 백성들은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백성이 남아나질 않으니 세금을 걷을 수가 없었고 결국 물자가 바닥나자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그토록 의지하던 군사력조차 차츰 약해져갔다.
양곡이 바닥나 더 이상 휘하의 관료와 사졸들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궐을 불사른 뒤 남은 무리를 이끌고 첨산에 주둔하고 있던 부장 뇌박(雷薄), 진란(陳蘭)에게 의지하려고 했으나 진란과 뇌박은 병력을 동원해 성을 지키며 원술에게 저항했다.(삼국지연의에서는 뇌박과 진란이 원술을 떠나 도적이 되었기 때문에 아예 뇌박과 진란이 원술을 습격해서 금품을 갈취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술은 하릴없이 성 밖에서 진을 치고 3일을 주둔했으나 양곡이 없어 이 배신행위를 징벌할 엄두도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뇌박과 진란이 원술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부하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원술이 사실상 맹주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된 것을 뜻한다. 원술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원술은 결국 원소에게 편지를 보내 제호를 바치며 말했다.
“한나라가 천하를 잃은지 오래되어, 천자는 손에 끌려 다니며, 정사(政事)는 권신들의 집안에 있고, 호걸 영웅들은 각축하며 강토를 나눠 찢으니, 이것은 주나라 말기에 전국 칠웅(戰國七雄)이 세력을 나눴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끝내는 강한 자가 겸병하게 될 뿐입니다. 더하여 원씨는 천명에 의해 왕이 된다는 상서로운 조짐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군(=원소)께서는 (하북)4주를 옹유하며 백성들의 호구는 백만이요, 강한 것으로는 이보다 더 큰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으며, 덕을 논하자면 이보다 더 높은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조조는 쇠퇴하고 미약한 한실을 붙잡고 돕고 있다지만, 어찌 끊어진 천명을 잇고 이미 멸망한 것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원소는 여기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원술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2] 청주자사로 있던 원술의 조카 원담(袁譚)이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 하자 원술은 원담을 의지하려고 청주로 향했으나 조조가 파견한 유비에 의해 저지당했다. 수춘에서 80리(32 km) 떨어진 강정(江亭)에 이르렀는데 식량은 겨우 보리 30곡이 남아있었을 뿐이었고 꿀물을 찾았지만 그조차도 구할 수가 없었다. 원술은 책상에 걸터앉아 말하길,
"나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라고 하며 몇 번이나 크게 탄식하다가 마침내 피를 한 말 가량 토하고 죽었다.
사후
원술 사후, 원술의 일족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했으나, 손책이 유훈의 거성인 환성을 함락하면서 모두 손책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로는 손책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원술의 딸은 손권(孫權)의 측실이 되었으며, 원술의 아들 원요(袁燿)는 손책에게서 낭중에 임명되었다. 원술의 딸 1명은 손권의 후궁인 원부인(袁夫人)이 되었다. 또한 원요의 딸 1인은 손권의 오남인 손분(孫奮)의 부인이 된다.
원술을 섬긴 사람들
원술의 친족관계
각주
- 이동 ↑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 이동 ↑ 공손찬의 세력을 흡수한 직후, 원소는 한때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경포 참조.
- 이동 ↑ 이는 《삼국지》오서 손분전의 기록으로, 《후한서》원술전에서는 자가 중응(仲應)이라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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