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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부석〉은 고3 때 쓴 국민 애송시 〈즐거운 편지〉와 시적 분위기 닮아
⊙ 당시 심사는 청록파 조지훈 선생… “서정시는 스물 안팎에 절정 못 끌어올리면 가망 없어”
서대문중 3 황동규가 쓴 시 〈망부석〉. 학생잡지 《학원》의 1953년 7월호 표지.
시인의 대표작은 아마도 1956년, 그러니까 열아홉(고3) 무렵 쓴 〈즐거운 편지〉이다.
이 시는 정확히 60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국민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다.
《월간조선》은 〈즐거운 편지〉보다 3년 앞서 쓴 〈망부석〉을 발굴했다.
〈망부석〉은 시인이 서울 서대문중 3학년 때 쓴 시로 학생잡지 《학원》(1953년 7월호)에 실렸다. 《학원》은 6·25 당시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잡지였고, 전후(戰後) 한국 잡지문화를 처음 여는 고리였다.
황동규 시인은 소설가 황순원(黃順元·1915~2000)의 장남이다.
체험을 공유하는 한 집안에서 2대가 모두 문학가로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황순원·황동규 부자만은 예외다. 그런 가족 배경 탓인지 시인은 일찍부터 문학적 열망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학원》지에 실린 시 〈망부석〉은 ‘까까머리’ 중3답지 않게 감성이 풍부하고 어조가 단아하다.
고3 때 쓴 〈즐거운 편지〉와 시적 분위기가 닮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의 ‘선자(選者)’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 선생이란 사실이다.
황순원과 조지훈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6·25 당시 결성된 공군문인단인 ‘창공구락부’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군과 같은 나이의 풍요한 감성의 시절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늙어 버리게 할 까닭이 있을 것인가?”
시가 중3답지 않다는 뜻이다.
너무 조숙하다는 뜻일까. 선생은 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서정시란 원래 스물 안팎에 일생의 절정을 끌어올리지 못하면 가망이 없는 것이다.
좀 더 노래하라. 꾀꼬리는 한철밖에는 울지 않는 법이다.”
나이 여든을 앞둔 황동규 시인은 아직도 자신의 시가 발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꾀꼬리는 한철밖에 울지 않는다’는 조지훈의 시론(詩論)과 정반대다. 1953년 《학원》 7월호에 실린 시 원문과 ‘선자의 말’을 함께 소개한다.
‘선자(選者)’인 조지훈 선생은 황동규 시 〈망부석〉을 우수작으로 뽑았다.
선생은 열여섯 예비시인에게 ‘좀 더 노래하라’고 평한다.
망부석
- 석굴암 가는 길에 -
서대문 중학교 3년 황동규
내 볼에 그리고 당신 볼에 잠뿍 피어진 그 노을 말입니다.
보입니까 보입니까 저 출렁대는 동해 바닷물이.
네, 무엇이라고요. 천여 년 비바람 무릅쓰고 그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 왔다고요.
성낸 바닷물이 크게 울고, 천둥 번개가 머리 위에서 마냥 우릉댈 때에도
그리고 우람찬 서라벌의 성문이 제 힘에 지쳐 쓰러질 때에도,
오직 검은 목을 느리우고, 한치 한치 애타게 느리우고,
하얀 돛 높이 달고 오실 님을 기다렸나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노을입니까.
내 볼에 그리고 당신 볼에 잠뿍 피어진 노을 말입니다.
황동규 군.
〈무화과〉와 〈은행잎〉도 좋기는 하였으나 나이를 먹고 시가 틀이 잡히면 절로 이렇게 되는 법인데
군과 같은 나이의 풍요한 감성의 시절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늙어 버리게 할 까닭이 있을 것인가?
서정시란 원래 스물 안팎에 일생의 절정을 끌어올리지 못하면 가망이 없는 것이다. 좀 더 노래하라. 꾀꼬리는 한철밖에는 울지 않는 법이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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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195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더 조그만 사랑노래 / 황동규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 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얼은 두 볼로 불 없이 누워 있는
너의 마음 가에 바람소리 바람소리.
내 너를 부르거든
어두운 뒤꼍으로 나가
한겨울의 꽁꽝한 얼음장을 보여다오.
보라, 내 얼굴에서 네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네 말없이 고개를 쳐들 때
하나의 미소가 너의 얼굴에, 하나의 겨울이 너의 얼굴에.
아는가
그 얼은 얼굴의 미소를 지울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가.
목 위에 타오르는
얼굴을 달고
막막히 한겨울을
바라보는 자여,
무모한 사랑이 섞여 있는
그런 노래를 우린 부르자.
언젠가 오 우리 여기 있다, 대답하고
얻은 우리의 일생에 우린 올라서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그 속에 서 있는 우리는
손잡고 조용히 취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되어 있으리.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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