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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후한 말 정치가]유대(劉岱)

Bawoo 2016. 10. 21. 19:35


유대(劉岱, ? ~ 192년 4월)는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공산(公山)이며 청주(靑州) 동래군(東萊郡) 모평현(牟平縣) 사람이다.


생애

후한 황실의 일족이며 유요(劉繇)의 형으로, 시중을 역임했다.


189년, 동탁(董卓)이 주비를 이부상서로 삼고 상서랑 허정(許靖)과 함께 인사를 맡기자, 주비와 허정이 유대를 연주자사로 임명했다. 190년 반(反)동탁군을 일으켜 원소(袁紹) 등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류태수 장막(張邈), 동군태수 교모(喬瑁), 산양태수 원유(袁遺)와 함께 진류군 산조현에 주둔하였으나, 동탁군이 강하여 나아가지 못했다. 군량미 차용을 거절한 것을 이유로 교모와 서로 미워하여, 끝내 교모를 죽이고 하내태수 왕광(王匡)으로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유대는 원소 · 공손찬(公孫瓚)과 화친하여 원소의 처자는 유대가 머물고 있는 곳에 있게 되었고, 공손찬의 종사 범방이 기병을 거느리고 유대를 도왔다. 나중에 공손찬과 원소 사이가 나빠지게 되자, 공손찬은 유대에게 원소의 처자를 자신에게 보내어 원소와 관계를 끊도록 겁박했다. 유대는 결단하지 못하다가 정욱(程昱)을 초빙하여 자문하였고, 정욱은 원소가 가까이 있으며 또 지금은 열세여도 결국은 공손찬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유대는 정욱의 조언을 따랐고, 과연 공손찬은 원소에게 패배했다.

192년 4월, 청주 황건적 백만이 연주로 쳐들어와 임성상 정수(鄭遂)를 죽이고 돌아와 동평으로 들어왔다. 유대는 포신(鮑信)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건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1]

또 다른 유대

조조(曹操)의 장수로, 위의 유대와 동명이인인 사람이 있다.

유비(劉備)가 헌제의 밀서에 따라 동승(董承)과 모의하여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조조에게서 자립하자 유대는 조조의 명을 받아 왕충(王忠)과 함께 유비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삼국지》주석에 인용된 《위무고사》에 따르면, 자(字)도 위의 유대의 자와 똑같은 공산(公山)이며, 예주 패국 사람으로, 사공장사로서 정벌을 좇아 공이 있으므로, 열후에 봉해졌다.

삼국지연의의 유대

《삼국지연의》에서는 한 인물로 등장한다.

제 5회에서 유대(劉岱)는 연주자사(兗州刺史)로서,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했다. 6회에서는 동군태수(東郡太守) 교모(橋瑁)에게 군량미를 빌려 달라고 했으나 교모는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유대가 군대를 이끌고 교모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교모가 거느린 군대를 흡수했다고 한다.

제 15회에서는 유대와 유요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유요(劉繇)는 자가 정례(正禮)이고 동래 모평(東萊牟平) 사람인데 그 역시 한 왕실의 종친으로 태위 유총(太尉劉寵)의 조카이고 연주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의 아우였다. 양주자사가 되어 수춘(壽春)에 둔치고 있었는데 원술이 쳐 들어오는 바람에 강동으로 쫓겨 가 곡아(曲阿)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 19회에서 유비는 조조와 연합하여 여포(呂布)를 공격하여 여포를 사로잡고 여포를 죽였으며, 20회에서는 조조와 함께 허창으로 개선 입성한 유비는 헌제(獻帝)를 대면하고, 유황숙(劉皇叔)이라는 별명도 얻는다. 이후 사슴 사냥에서 조조에게서 모욕을 받은 헌제는 동승에게 옥대(玉帶)속에 숨긴 밀조(衣帶詔)를 내려 조조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한다.


제 21회에서는, 동승의 음모에 참가한 마등(馬騰)의 추천으로 유비도 동승의 음모에 동참한다. 들키지 않기 위해 유비는 채소를 재배하고, 조조는 느닷없이 유비를 불러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사자가 와서 "공손찬은 원소에게 죽었고 원술은 원소에게 옥새를 바치기 위해 서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유비는 원술을 공격하겠다면서 조조의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떠난다. 서주에서 원술은 유비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유비는 원술이 죽자, 조조에게서 빌려온 군사의 지휘관인 주령(朱靈)과 노초(路招)에게 허창으로 되돌아가라고 하고, 자신은 조조 군사를 이끌고 서주에 눌러 앉는다. 조조는 서주자사 차주(車胄)에게 편지를 보내 유비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이 명령을 받은 차주는 진등(陳登)과 함께 유비 암살 문제를 논의한다. 진등은 이 이야기를 유비에게 알리고 유비는 선수를 쳐서 차주를 죽인다.


제22장에서는, 유비는 자신이 조조의 심복인 차주를 죽였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원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요청을 받은 원소는 진림(陳琳)에게 명하여 조조에 대한 선전포고문을 쓰게 하고, 조조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이에 조조는 자신은 직접 원소군을 향해 진군하고, 왕충(王忠)과 유대에게는 군사 5만을 주어, 유비가 있는 서주로 향하게 했다. 이때 삼국지연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래 유대는 지난날 연주자사(兗州刺史)였는데 조조가 연주를 빼앗자 유대는 조조에게 항복하였고 조조는 그를 편장(偏將)으로 삼았다. 그래서 지금 왕충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도록 보내는 것이다.

(역사서에 따르면, 연주자사 유대는 연주 전투에서 황건적과 싸우다가 전사해서, 조조가 유비를 공격할때 쯤이면 연주자사 유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왕충과 유대는 제비뽑기를 통해, 왕충이 먼저 서주를 공격하려 하나, 왕충은 관우에게 사로 잡힌다. 유대는 장비에게 사로 잡힌다.

유비는 이 둘을 풀어주며 말한다. "얼마 전 차주(車冑)가 저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나는 부득불 차주를 죽였던 것일 뿐, 조조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당신들은 되돌아 가서 조조를 만나면 조조에게 말해주시오".


왕충과 유대는 조조에게 되돌아가 유비의 말을 전하였다. 조조는 이 둘을 죽이려 들었다.

제23장에서는 그러나 공융(孔融)의 조언에 따라 조조는 이 둘을 죽이지 않는다.

이후로는 왕충과 유대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평

효제하고 인서하며 자신을 비워 남을 받아준다고 했다.[2]

각주

  1. 이동 후한서》 〈제9권〉 “三年[...]夏四月[...]青州黃巾擊殺兗州刺史劉岱於東平。”
  2. 이동 삼국지유요전《영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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