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도서관 ♣/- 경제, 사회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Bawoo 2016. 11. 22. 22:28

책벌레와 메모광

[한양대학교 국문과 정민교수가 쓴 고전 관련 이야기를 모아 논 책.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 빌려왔다. 필자 이름을 한시 관련 책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가 궁금해서였다. 결과는 필자의 해박한 전문지식에 놀라면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는 소감이 나왔다. 한 분야에 천착 [穿鑿]하면 일반 독자가 보기에 경이스러운 내용도 이리 쉽게(?) 쓸 수 있게 되는가 싶어 무척 부러운 마음으로 읽었다. 더불어 고마움도 느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을 이렇게 꾸준이 책으로 내어 일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데 대해서...(전문 지식은 있으면서 여러 이유로 안 쓰는 학자들도 많지 않은가^^)]


[덧붙임: 책에 실린 한시 중에 이서우(李瑞雨)의 도망실(悼亡室)(194쪽)이 마음에 들어 베끼는 과정에서

             1구의 4번째 글자가 稀가 맞는 것 같은데 舊로 인쇄되어 있었다. 출판사에 일단 알려는 줬는데 정교수가 해외 체류중이라 직접 확인은 불능. 아마 책 교정 중에 실수가 아닐까 싶다.]



[아래는 출판사의 이 책 소개글]


고서를 통해 본 책벌레의 문화사

1부에는 옛 책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묶었다. 먼저 장서인을 다룬 글이 눈에 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장서인 찍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한국의 옛 책은 장서인이 지워진 경우가 많다. 혹시라도 책에 남은 장서인이 훗날 가문에 누가 될까봐살림이 궁해 책을 내다 팔 때면 책을 훼손하면서까지 장서인의 흔적을 지웠다. 조상의 책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팔아먹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본의 고서 가운데는 간혹 ‘소消’ 자 인장이 찍힌 책이 있다. 책을 입수하면 전 소유주의 장서인 위에 말소 도장을 찍고 그 옆에 새 주인인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던 것이다. 깔끔한 것이 일본인답지만 매몰찬 구석도 있다. 중국은 어떨까? 중국인들은 호방하게도 전 소유주들의 장서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넓은 천하에 네 책 내 책이 어디 있냐는 듯이. 중국 고서에는 책의 유전流轉을 보여주는 장서인이 가득하다. 한자문화권 안에서도 책을 간수하는 태도는 나라마다 이렇듯 달랐다.

책벌레를 막기 위해 책장 사이에 끼워두었던 은행잎이나 운초芸草 이야기를 읽다보면 책을 사랑한 옛사람들의 그윽한 정취가 떠오른다. 100년도 더 된 책의 갈피에 압사당한 채 붙어 있던 모기 이야기는 [모기를 증오함憎蚊]이란 시를 남긴 다산의 사례와 더불어 웃음을 자아낸다. 판각을 마친 뒤 몇 부만 인쇄하여 저자에게 교정용으로 제공한 홍인본紅印本, 파란색으로 인쇄한 재교용 남인본藍印本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빨갛고 파란 책들은 요즘도 수집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레어템’이라고 한다. 쓸 때는 선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오징어 먹물 이야기도 재미있다. 오징어 먹물은 주로 사기꾼들이 계약문서에 많이 썼다고 한다. 다산도 애용했는데 그가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가 일부 박락된 채 남아 있다.

돈을 받고 남 대신 책을 베껴 써주는 일을 ‘용서傭書’라고 한다. 이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용서인들의 이야기는 애처롭다. 출판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용서로 생계를 꾸린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제일의 책벌레 이덕무도 그중 한 명이었던 듯 그의 편지에는 책을 베껴 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필수로 교육했다는 초서?書, 즉 베껴 쓰기에 대한 글과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덕무의 구서재九書齋 이야기에서는 옛사람들이 어떤 체계로 책을 읽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천재는 없다, 부지런한 기록자가 있을 뿐

2부에는 옛사람의 기록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았다. 일기, 편지, 비망록, 책의 여백에 써놓은 단상 같은 것들이다. 밭일을 하다가도 항아리 속에 넣어둔 감잎에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어두었다는 중국 선비의 고사를 본떠 이덕무는 자신의 메모집에 [앙엽기 葉記]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가 실려 있다. 그 바쁜 연행 길에서도 나비 날개만한 종이쪽에 파리 대가리만한 글자로 보고 들은 것을 정신없이 메모해둔 글이다. 박지원의 [앙엽기]는 당연히 이덕무의 [앙엽기]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연암은 [대용록貸用錄]이라는 빚장부도 남겼다. 남한테 외상으로 산 놋그릇, 심지어 요강 값까지 상세히 적어놓았다. 돈 문제에 깔끔했던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눈이 어두워져 나중에 책으로 묶으려고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메모를 쓸모없어졌다며 모조리 세초해버렸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진한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메모의 왕은 역시 다산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다산의 메모는 하나하나가 소논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학문적 깊이를 갖추고 있으며 그 필치는 예술작품에 가깝다. 다산의 드넓은 학문 세계는 모두 치열한 독서와 끊임없는 메모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동잎을 둘러싼 옛사람들의 시와 그림과 인장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다. 그 밖에 책의 출전을 메모하는 법,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법,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재빨리 적어두는 질서법疾書法 등 선인들의 기록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옛 선비들이 일 없는 여가에 문을 닫아걸고 낡은 책을 수선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 저자도 자신의 오래된 취미 생활인 ‘풀칠 제본’ 이야기를 실제 사진을 곁들여 상세히 들려준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집필한 저자의 독서와 메모 노하우가 이 풀칠 제본 이야기에 다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 실린 글 한 편 한 편이 모두 옛사람들의 독서문화와 기록문화를 살펴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독서는 주변 분위기나 유행을 좇아 하는 일이 아니라 밥을 먹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생각을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메모만큼 강력한 도구가 없다. 디지털 시대에도 메모의 위력은 변하지 않는다. 책벌레나 메모광 선인들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단 재미만이 아니다. 옛사람들의 책을 향한 사랑과 기록에 대한 열정은 그 자체로 삶의 지혜요 든든한 문화적 유산이다. 이 책이 오늘날 독서 문화의 근본을 되짚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목차

서문

제1부 책벌레

책 주인이 바뀔 때의 표정
장서인을 찍는 태도
포쇄曝?하던 날의 풍경
책벌레 이야기, 두어와 맥망
고서 속의 은행잎과 운초
옛 책 속에서 죽은 모기
투인본, 채색 인쇄된 고서
빨간 책 이야기
오징어 먹물
자네 부친의 편지일세
용서인, 남 대신 책을 베껴주는 사람
초서법, 베껴 쓰기의 위력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

제2부 메모광

고서 속의 메모
책 속 메모와의 대화
책상 옆의 상자들
항아리에 담긴 감잎
말 잔등 위의 메모
냇물에 씻겨 사라진 아까운 책
다산의 책 속 메모
다산 필첩 퍼즐 맞추기
오동잎 이야기
오동잎은 그리움이다
출전을 메모하라
동시다발 독서법
재빨리 적는 질서법
사설, 구석에 숨어 있는 의미
비 오는 날의 책 수선
나의 취미 생활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