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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시 요숭과 함께 재상직에 있었으나 제가를 잘해서 자손이 번성케 한 인물]노회신(盧懷愼)

Bawoo 2016. 12. 10. 22:00

노회신(盧懷愼) ?-716. 당나라 활주(滑州) 영창(靈昌) 사람. 조적(祖籍)은 유주(幽州) 범양(范陽)이다. 어릴 때부터 맑고 부지런했으며, 진사 시험에 급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중종(中宗) 경룡(景龍) 연간에 우어사대중승(右御史臺中丞)으로 옮기고,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이르렀다. 현종(玄宗) 선천(先天) 연간에 동도(東都)에서 위지고(魏知古)와 함께 업무를 분장했다. 개원(開元) 원년(713)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승진했다. 얼마 뒤 황문감(黃門監)으로 옮겼다. 자미령(紫微令) 요숭(姚崇)과 함께 추밀(樞密)을 맡았는데, 스스로 요숭만 못하다고 여겨 일마다 그에게 양보해 사람들이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 불렀다. 4년(716) 이부상서를 겸했다. 청렴하고 영리를 좇지 않았으며, 복식이나 기물에 금옥 장식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받은 봉록도 그때마다 나눠주어 집안에 남겨 두지 않아 처자들마저 궁핍하게 살았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반식재상(伴食宰相): 함께 자리하여 밥만 먹는 재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을 비꼬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시대로 꼽히는 것은 당(唐)나라 때이고, 당나라 시대의 최고 전성기는 현종(玄宗)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개원(開元) 연간부터 천보(天寶) 연간 초까지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인구는 900만 호, 5천 3백만 명에 달했으며, 수도 장안에는 아시아 각국은 물론 멀리 페르시아, 사라센 등지에서 온 외교 사절과 상인들로 북적댔다. 현종의 치세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요숭(姚崇), 송경(宋璟)과 같은 훌륭한 재상들의 충실한 보좌 덕분이었다.

당시 노회신(盧懷愼)도 재상으로 있었는데, 청렴결백하고 근면검소한 사람이었으나 업무 능력은 좀 부족했다. 어느 날 요숭이 아들이 죽어 열흘간의 휴가를 받았는데, 이때 노회신이 요숭의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정무가 정체되고 말았고, 결국 요숭이 돌아와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노회신은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매사를 요숭에게 미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노회신을 ‘반식재상’이라고 했다.(懷愼知才不及, 每事皆推讓之, 時人謂之伴食宰相.)」

이 이야기는 《구당서(舊唐書) 〈노회신전(盧懷愼傳)〉》에 나오는데, 당시 사람들이 노회신을 평한 말에서 ‘반식재상’이 유래했다.


[참고]책"자치통감을 읽다"289쪽 덕의 대물림편에는 '자치통감 권21'을 인용하여 노회신이 제가를 잘한 인물로 나온다.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는 요숭에 비해 능력이 뒤졌으나 인격과 픔성를 다른 사람들이 본받게 하기 위하여 현종이 기용했다고 한다.  두 아들 모두 노회신의 가풍을 게승하여 청렴했다고 한다. 큰아들 노환은 남해태수로 부임하여 탐관오리를 다 없이했도 둘째 아들 노혁은 안사의 난 때 순국했다고 한다. 노혁의 아들-노회신의 손자-노기는 덕종 때 재상을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