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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 4대 황제 한화제 유조(刘肇)의 황후]화희등황후(和熹邓皇后)

Bawoo 2016. 12. 11. 00:12



엄격한 수양으로 현명하고 근검했던 등황후(邓皇后)          

    

 

 동한 4대 황제 한화제 유조(刘肇)의 화희황후. 그녀의 이름은 수(绥)로 태부등씨(太傅邓禹)의 손녀이다.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등훈(邓训)으로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다. 어머니는 음(阴)씨로 황후의 외손녀이었다. 등수는 6살 때 역사서를 읽었으며, 12살 때 시경과 논어 등의 고전사서를 통달하여 오라버니들과 서로 학문을 나누었다.


그녀는 고전서를 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여자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집안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모친으로부터 자주 꾸지람을 들었다. 모친의 뜻을 계속 거역할 수 없었던 등수는 낮에는 집안일을 배웠고 밤 시간을 이용해 고전서를 읽었다. 부친은 딸의 재능에 탄복해 큰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녀와 상의했다.

 

■ 유명한 황후는 재능과 근검 절약을 겸비


그녀는 사람들이 매우 탄복할 정도로 얼굴뿐 아니라 외모가 매우 출중했다. 용원7년(기원95), 입궁하게 된 등수는 두 번째 되는 해 16살로 귀인(贵人)이 되고, 용원14년(102) 황후가 되어 화희등황후(和熹邓皇后)라는 칭호를 받았다.


원흥원년(105), 상제유륭(殇帝刘隆)이 즉위하면서 등수는 황태후가 되어 조정에 나와 정무를 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상제는 즉위한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한안제유우가 다음해인 107년에 즉위한다. 등수는 황태후의 신분으로 20년동안 조정의 정무를 보았다.


황태후는 궁에 입궁한 날부터 자신의 언행에 매우 주의하며,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그녀는 매우 소박하고 검소했는데, 평소 밥을 먹을 때도 고기 한 접시와 밥 한 그릇에 만족했다. 후궁들에게도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외국에서 조공으로 바친 보석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해 외국의 조공 부담이 반으로 줄었다.

 

■ 자신을 수련하고 친족에게 엄격


당시 한서(汉书)의 작가 반고(班固)의 동생인 반소(班昭)가 궁에 있었는데, 그녀는 박학다식하고 재능이 뛰어나 각 황후에게 배치된 후궁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등황후는 입궁 후 비록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역사서를 많이 읽어 재능이 뛰어났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반소에게  학문에 대해 여러 가지를 몸소 배웠다. 반소는 7편의 여계(女诫)라는 책을 썼는데, 여성이 가져야 하는 도덕적 규범에 관한 내용이었다.

 
등황후에 대해 가장 존경할만한 점은 그녀가 태후가 되어 조정의 정무를 보면서도 친족의 비리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고 그것을 매우 엄격하게 다스린 점이다. 그녀는 신하들에게 특별히 이르길 “나는 역사서를 즐겨 보는데, 역사에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는 등의 나쁜 짓을 한 인물들이 많다. 그것은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엄격하게 감독하고 법대로 처분할 것”을 늘 강조했다.


그녀의 오빠인 등즐(邓骘)에게도 거기장군(车骑将军), 호분중낭장(虎贲中郎将)과 같은 관직을 주었는데, 한 번은 등즐의 아들인 등봉(邓凤)이 암암리에 마필을 뇌물로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등줄은 매우 놀라 아들과 며느리에게 머리를 모두 밀게 한 후 죄인의 의복을 입혀 집에서 죅값을 치르게 하고 고모인 등태후의 처분을 기다리게 했다.


등줄의 이 같은 행동으로 등황후의 외척에 대한 관리와 요구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능히 알 수 있다. 그것은 결국 비리와 부패로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난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등황후의 간절한 바램의 체현이었다.  (<후한서·화희등화후기>,<후한서·등즐전>)

 

[정보 출처:책 421~441쪽/수집-ⓒ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