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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중기 권신 양기와 그의 부인 손수(孫壽)

Bawoo 2016. 12. 11. 23:00


   

양기(梁冀, ? ~ 159년)는 후한 중기의 관료로, 백탁(伯卓)[1]이며 안정군(安定郡) 오지현(烏枝縣)[2] 사람이다.[1]

생애

외모는 어깨가 솔개와 같이 넓고 눈매가 승냥이와 같았으며 주변을 위압하고 성품이 오만하였다. 또한 말을 더듬었으며 학문을 멀리하였고, 소소한 계산에 능하였다. 젊을 때부터 황실의 외척이었으며 술을 좋아하였고, 탄기(彈棋) · 격오(格五) · 축국(蹴鞠) 등의 유희를 잘 하였으며 경마 · 매 사냥 등을 굉장히 좋아하였다.[1]


양가 원년(132년), 누이동생 양날(梁妠, 106~150)이 황후가 되었다. 이때 양기는 양읍후(襄邑侯)에 봉해졌는데, 그의 부친 양상(梁商)은 좌웅(左雄)의 간언을 듣고 이를 고사하였다. 처음에는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고 그 후에는 시중(侍中),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월기교위(越騎校尉) · 보병교위(步兵校尉), 집금오 등을 역임한 후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영화(永和) 6년(141년), 양상이 죽었다. 양기는 양상으로부터 대장군 작위를 물려받았다.

순제가 붕어하고, 나이가 두 살에 불과한 충제가 즉위하였다. 이에 양날이 태후로써 섭정을 펼쳤는데, 충제 또한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태위 이고(李固)는 외척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장자를 즉위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양기 일파는 여덟 살인 질제를 즉위시켰다. 이후 정치는 양기 일파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질제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곧 양기는 질제를 독살하였다. 이고는 차기 황제로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강력히 추천하였으나, 양기는 환제를 추대하는 한편 이고를 해임시키고 곧 그를 죽였다.


환제 대에 이르러 양기의 세도는 한층 심해졌고, 심지어는 그의 아내 손수(孫壽)의 일족까지도 권세를 휘둘렀으며 양기가 대저택을 짓자 그의 처가도 지지 않기 위해 저택을 지을 정도가 되었다.

화평 원년(150년), 양태후(梁太后)는 정치를 환제에게 맡기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양기는 여전히 권세를 휘둘렀다. 그러나 연희 2년(159년), 양황후(梁皇后)가 죽는 한편 양씨로 위장하여 환제의 총애를 받던 등맹(鄧猛)이 양씨가 아님이 발각되었다. 이에 환제는 선초(單超) 등 5명의 환관들과 모의하여, 양기의 편을 들은 환관 장운(張惲)을 체포하고 군사를 일으켜 양기의 저택을 포위하였다. 양기는 처자식과 함께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일족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몰수한 양기의 재산은 국가의 세금의 절반에 달하였으며, 양기와 연루되어 죽은 고관이 수십 명, 파직된 관리가 300여 명에 이르러 한때 조정이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각주

  1. 이동: 범엽, 《후한서》권34 양통열전(梁統列傳)
  2. 이동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오씨(烏氏)라고 하나, 이는 오지의 다른 표기인 오지(烏氐)를 잘못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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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백탁. 안정 오씨 사람이다. 대장군 양상의 아들로 두 누이동생이 각각 순제(順帝)와 환제의 황후였다. 관직은 대장군·녹상서사에 이르렀다. 혼자 충제·질제·환제 등 세 황제를 옹립하고 20년간 조정을 장악했다.

질제는 그가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것을 빗대어 '발호장군'이라고 했다가 독살당했다. 일족이 모두 요직을 차지했고 일당이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다.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여 토원 하나의 너비가 1㎞나 되었다. 또한 양민을 약취하여 노비로 삼았다.

159년 환제가 단초 등 5명과 함께 양기를 죽이기로 뜻을 모으고 군사들로 그의 막부를 에워싸자, 그는 자살했다. 가산을 몰수하여 환산한 돈은 조정 세수입의 반이나 되는 액수였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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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속 정치이야기] 발호장군(跋扈將軍)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동한의 외척이자 권신이었던 양기(梁冀)는 파락호였는데 누이가 순제의 황후가 되면서 최고의 권력자인 대장군으로 부상했다. 양쪽 어깨가 매의 날개처럼 솟았고, 눈동자는 승냥이와 같았으며, 지독한 말더듬이로 학문이라고는 겨우 장부를 기장할 정도였다. 하남윤으로 임명되자 온갖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그것을 부친 양상(梁商)에게 일러바친 낙양현령 여방(呂放)은 노상에서 양기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됐다. 항의하던 여방의 일족 100여명까지 피살됐다. 순제가 죽고 2살에 불과한 충제(沖帝)가 즉위하자 양기의 누이인 태후가 집정했다. 강보에 싸여 제위에 오른 충제가 죽자 양기가 질제(質帝)를 옹립했다. 어렸지만 총명했던 질제는 어느 날 신하들과 조회할 때 양기를 노려보면서 ‘발호장군’이라고 비꼬았다. 원한을 품은 양기는 질제를 독살했다. 환제(桓帝)를 옹립한 양기는 질제를 독살한 사실을 알고 있던 이고(李固)를 음해했다. 견제세력이 사라지자 양기와 일족의 권세와 영화는 극에 달했다. 그의 아내 손수(孫壽)까지 군호(君號)를 받았고 매년 수입이 5천만이나 되어 장공주와 같은 복을 누렸다. 손수는 대단한 미모와 교태를 갖춘 여자로 가늘고 긴 눈썹을 자랑했다. 일부러 눈살을 찌푸리며 금방 울고 난 것처럼 표정으로 미혹시켰다. 

양기는 심복을 시켜 부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가 나중에 죄를 덮어씌워 돈을 받아 내거나 죽이기도 했다. 사손비(士孫備)는 부자였지만 매우 인색했다. 양기가 말 4필을 보내고 5천만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사손비가 3천만만 보내자 대노한 양기는 사손비의 모친이 관의 재물을 훔쳤다고 고발했다. 양기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화려한 저택과 거대한 원림을 조성했다. 손수까지 나서서 부부가 더 화려한 저택을 짓는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19세인 낭중 원저(袁著)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나섰다.

“공자는 봉황이 내려오지 않고 황하에 신도가 나오지 않는다고 탄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위치와 조건을 구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서기(瑞氣)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현덕(賢德)과 어리석음의 순서가 뒤집혀 권신이 권세를 분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장군의 위치는 극점에 이르렀으니 자기를 경계해야 할 때입니다. 물러나는 것이 예절에 맞습니다. 권세를 억제할 기회를 잃으면 자기를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노한 양기가 잡으려고 하자 원저는 성명을 바꾸고 일부러 병사한 것으로 속여 장례까지 지냈다. 양기는 끝내 그를 찾아내어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그 사실을 숨겼다. 태학생 유상(劉常)은 당세의 명유로 원저와 친했다. 양기는 그를 하위직에 임명해 모욕을 주었다. 학비(郝薭)와 호무(胡武)는 정직한 언론과 높은 식견을 자랑했다. 그들도 원저와 친했다. 학비 등은 연명으로 삼공(三公)에게 천하의 고결한 인재를 추천했지만, 대장군에게는 추천하지 않았다. 대노한 양기는 학기와 호무가 원저와 동당이라는 이유로 죽이라고 명했다. 호무의 일가 60여명이 피살됐다. 학비는 도망쳤지만 화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수레에 관을 싣고 양기의 집을 찾아가 자살해 일가를 지킬 수 있었다. 나중에 양기가 처형된 후 조정은 원저 등을 충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올렸다. 남군태수 마융(馬融)과 강하태수 전명(田明)은 부임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발형을 받고 변방에 충군됐다.  

양기는 20년 이상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고 궁정의 내외를 횡행했지만 누구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태사령 진수(陳授)가 일식이 일어난 것은 대장군의 허물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양기가 진수를 체포해 고문했다. 진수가 옥사하자 마침내 환제가 대노했다. 중상시 단초(單超), 구원(具瑗), 당형(唐衡), 좌관(左悺), 서황(徐璜) 등에게 양기를 죽일 계획을 세우게 했다. 양기는 황문 장운(張惲)을 궁으로 보내 정변을 막으려고 했다. 구원이 장운을 체포하고 사례교위 장표(張彪)와 함께 양기의 집을 포위했다. 양기와 손수는 당일에 자살했다. 양가와 손가의 내외종족은 모두 기시형을 받았다. 공을 세운 내시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십상시’라는 세력을 형성했다. 동한은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무너졌다. 측근정치의 위험을 경고하는 역사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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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孫壽, ?~159년)는 후한 환제(桓帝) 때 권력을 잡은 대장군 양기(梁冀)의 아내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드센 성격을 가졌기에 양기는 손수를 두려워하였다.

생애

150년 조정에서는 손수를 양성군(襄城君)으로 봉했으며, 양책(陽翟)에서 거두는 조세를 손수가 받게 했다. 또 장공주(長公主)와 비슷한 예우를 받았다. 양기와 손수 부부는 사치부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각각 소유한 집을 마주보게 지었으며, 서로 자신의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몰두하였다. 또 부부가 수레를 타고 거리에 나가서 멋대로 흥겹게 놀았다.


손수는 양기를 움직여 손씨 집안의 사람 십여 명에게 시중(侍中), 교위(校尉) 등의 각종 벼슬을 내리게 했다. 양기의 아버지 양상(梁商)이 순제(順帝)에게 바쳤던 미녀 우통기(友通期)가 잘못을 저질러 궐에서 쫓겨난 후 양기와 간통하자, 손수는 양기가 없는 틈을 타 우통기의 머리를 깎고 얼굴에 상처를 입힌 다음 마구 때렸다. 놀란 양기가 손수의 어머니에게 통사정하여 겨우 그쳤으나, 자신이 낳은 아들 양윤(梁胤)에게 우통기를 죽이게 하고 우(友)씨 집안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손수의 외삼촌 양기(梁紀)는 아내가 전 남편에게서 낳은 딸 등맹(鄧猛)을 키우고 있었는데, 159년 등맹의 미모를 눈여겨본 손수는 등맹의 성을 양(梁)씨로 바꾸게 하고 환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남편 양기로 하여금 등맹의 생모 선(宣)을 죽이게 했는데, 암살에 실패하여 선이 궁중으로 달려가 환제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다. 화가 난 환제는 환관들과 모의하여 군사들을 동원해 양기의 집을 포위했다. 절망에 빠진 손수는 남편과 함께 자살했다.

손수가 창안한 유행들

손수는 몸치장에 관심이 많아 자신만의 독특한 치장 방법과 호화로운 도구들을 개발했다. 이것들은 한나라의 상류층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어 시대를 대표하는 유행이 되었다. 그 종류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유행

1. 수미(愁眉): 근심에 잠긴 것처럼 보이게 위해 눈썹을 가늘게 그리는 화장법

2. 제장(啼粧): 눈 밑을 하얗게 칠해 울고 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화장법

3. 타마계(墯馬髻): 머리를 살짝 기울게 하여 여자의 몸가짐이 다소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

4. 절요보(切要步): 허리를 꺾고 흔들면서 걷는 방법

5. 우치소(齲歯笑): 이가 아픈 것처럼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방법

치장 도구

1. 평상병차(平上輧車)

2. 비책(埤幘)

3. 협관(狹冠)

4. 절상건(折上巾)

5. 옹신선(擁身扇)

6. 호미단의(狐尾單衣)



[출처: 정보-책'자치통감을 읽다/ 수집-위키백과,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