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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이리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양팔이 잘리고 끝내 죽임을 당한 독립운동가]문용기[文鏞祺]

Bawoo 2017. 2. 5. 17:05

 

 

문용기(1878-1919)

1878(고종 15)-1919. 독립운동가.

내용

전라북도 익산 출신.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3월 26일 이래 격렬히 전개되어온 만세시위운동을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약속된 장날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그의 지휘에 의하여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군중이 1,000여명으로 늘어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쿠리를 휘두르며 무차별 진압을 강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일본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그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 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헌병은 그를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니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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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보-책 "역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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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익산 4•4만세운동의 주역 관재 문용기 선생

훈훈-터[온라인기자단]/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2016.07.12 18:56

 

 

 

<일제가 수탈을 위해 지었던 쌀 창고의 담장> 

 

 

<대교 농장 일본 집 관사> 

 

-전북 익산 남부시장 곳곳에서는 전북지역 농업수탈의 현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익산은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지가 많아 일제의 토지수탈과 쌀 수탈의 표적이었습니다. 그 중 주현동 남부시장 근처에는 호남 최대 규모의 쌀 창고와 대규모 농장 중 하나인 오하시(대교) 농장의 사무실과 관저 등이 쌀 수탈을 위해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일제의 무자비한 수탈로 인해 농민들은 신음하고 있었고, 시민들의 분노는 커졌습니다.

 
 

 

<남부시장의 모습>

 

1919년 4월 4일, 장날을 맞아 300여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군중들은 한 남자의 지휘 아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행진했습니다. 만세 소리가 횟수를 더해갈 때마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났고 그 수는 어느덧 1천 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 기세가 오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만세 소리는 더 커졌고, 헌병대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들까지 동원하여 각종 흉기로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지휘를 하던 남자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남자의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쓰러지지 않고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였습니다. 이에 일본 헌병이 왼팔마저 베어 버리자,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격분한 헌병은 쫓아가 그의 몸을 난자하였고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남자는 외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新)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의 독립된 국민이 되게 하겠소.” 결국 남자는 순국하고,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무자비한 총격에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문용기 선생 사진>

 

이 이야기는 올해로 97주년을 맞는 익산 4.4 만세운동의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한의 독립을 외쳤던 남자는 익산지역의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입니다.

 

피 묻은 옷의 주인 문용기 선생

 

문용기 선생은 익산시 오산면 관음마을 출신으로, 계몽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군산 영명 학교(현 군산 제일 중고)에서 학생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비밀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피 묻은 선생의 옷 출처 : 독립 기념관>

 

고인의 피 묻은 저고리는 가족들이 가지고 있다가 정부에 기증하였습니다. 현재 보존을 위해 천안 독립기념관 4 전시관에 보관되어있고, 군산 구암 교회에 가면 그 복제본을 볼 수 있습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남전교회의 장로였던 문용기 선생은 최대진 목사와 교회 성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문용기 선생은 이전 만세운동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여 익산 4•4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하였습니다. 

 

익산 시내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문용기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남부시장 근처 3•1운동 기념공원에 가면, ‘순국 열사비’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념공원은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표지판을 따라서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문용기 선생 동상>

-문용기 선생이 순국한 자리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순국열사비>

이곳의 기념비는 1949년, 문용기 선생과 순국열사들을 기리기 위해 익산시에서 세웠고, 기념비의 휘호와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습니다. 

 

 

 

4월 4일을 맞아 공원에서는 익산 만세운동 기념행사가 진행 되었습니다.

 

 

<4.4 만세운동 재현모습>

 

 

<헌화사진>

 

 

<만세 삼창>

 

대학생들의 4•4 만세운동 재현으로 시작한 이번 기념행사에는 여러 기관장 및 시민들이 참석하였고, 결의문 낭독 및 헌시낭송, 헌화, 만세삼창을 하며 4•4만세 운동의 거룩한 정신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렸습니다.

 

4.4. 만세운동의 중심 남전 교회

 

 

<남전교회>

-이곳은 현재 한국기독교사적지 18호로 지정이 되어있습니다.-

 

익산시 외곽에 위치한 남전리 정류장에서 초등학교가 보이는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문용기 선생이 장로로 신앙생활을 했던 남전교회가 있습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여러 애국지사와 함께 4•4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충혼비>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오산우체국 정류장에 내리면 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충혼비를 찾을 수 있습니다. 4•4 만세운동에서 순국한 문용기 선생,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남전교회 청년 장경춘을 기리기 위한 비로 2010년에 새로 정비했다고 합니다.

 

 

<문용기 선생 생가>

 

그리고 이곳에서 좀 더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관음마을이 나오고 이곳에는 문용기 선생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로 알려지지 않아 찾기가 힘들었지만, 오산면사무소 직원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즈넉한 집의 모습이 선생의 성품을 닮은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의 벚꽃>

 

2016년 4월 4일, 따뜻한 햇볕과 흩날리는 벚꽃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아이들은 뛰어 놀고, 젊은 커플은 손을 꼭 잡은 채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문용기 선생이 순국하는 순간 말했던 것처럼 이들은 모두 대한의 독립된 국민입니다.

이런 대한의 독립을 맘에 품고 감사함을 가져야 하는 것이 국민들의 도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