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아우구스트 베크 Ludwig August Theodor Beck | |
생애 | 1880년 6월 29일 ~ 1944년 7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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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독일 제국 비스바덴주 |
사망지 | 나치 독일 베를린 |
최종 계급 | 상급대장(Generaloberst) |
근무 | 독일 육군 총사령부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내역 | |
기타 이력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 |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테오도르 베크(독일어: Ludwig August Theodor Beck , 1880년 6월 29일 ~ 1944년 7월 21일)는 독일 장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나치 독일 치하 초기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Oberkommando des Heeres, OKH) 참모장을 지낸 독일군에서 정신적인 지주였다.
또한, 베크는 '반나치세력'의 중심인물로 1944년 7월 20일에 감행된 히틀러 암살 기도를 지도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히틀러 제거 이후 독일 대통령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했고, 베크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베크는 태어나서 많은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뒤에 폴란드 점령에서 SS의 참혹함을 목격해서 반나치주의자로 돌아서 버린다. 슈타우펜베르크 암살 작전 때 사령관역을 맡아서 슈타우펜베르크가 체포된 후 자살을 강요받았다.
Ludwig August Theodor Beck
루드비히 아우구스트 테어도어 베크
(1880.6.29~1944.7.21)
1. 개요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에서 복무한 군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이어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축소된 군에 남았으며, 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계속 복무, 상급대장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반나치 성향이었고, 히틀러를 불신했기 때문에,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에 예편했고, 2차대전 내내 야인으로 지내다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자로 히틀러 암살을 노리지만, 실패 후 체포된다. 그를 체포했던 군 후배였던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이 명예로운 자결을 권유, 권총자살한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프로이센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집안의 전통에 따라 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1차대전에서는 서부전선에서 활약했으며,독일군에서 주로 엘리트가 가는 참모장교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4천명으로 제한된 장교단의 일원으로 군에 남는 것을 허락받아서 군에 계속 복무하였다. 1932년 군사국 (Truppenamt) 총장에 부임하는데 이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금지된 참모본부 총장이었다. 그는 여러 군사저작을 발표하여 독일군 내에서 지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2.2. 나치 집권
그는 당시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나치를 혐오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군국주의적인 독일 장교단의 공통적 정서였다. 극우적인 면은 비슷했지만, 귀족적이며, 왕정복고적인 독일군 장교단이 무식하고 대중선동적인 나치를 경멸한 것은 당연지사. 그리하여 나치 집권전에는 군내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나치당에 가입한 장교들을 추방하는데 앞장섰다.
나치당 집권 이후에는 총참모장으로서 전쟁을 서두르는 히틀러의 모험주의가 다시한번 독일을 재앙에 빠뜨릴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국방군의 힘으로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고 하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베크는 평화주의자는 아니었고, 그저 나치 일당의 서두른 전쟁이 독일을 다시 망하게 한다는 신념으로 계속적으로 히틀러의 모험주의에 제동을 걸려고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영미의 방관으로 주테덴란트를 할양받은 히틀러가 외교적으로 승리를 거두자, 군의 주류는 히틀러의 모험주의에 점점 협조적으로 변했고, 베크는 군에서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안슐루스 때도 독일군을 출동시키는데 매우 주저했다.
결과적으로 베크는 1938년 총참모장 직을 사임하고, 후임은 프란츠 할더가 이어받는다. 할더는 초반에는 베크와 비슷한 입장이었다가 히틀러의 침략전쟁에서 점점 협조적으로 변해서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대성공에 큰 활약을 한다.
2.3. 히틀러 암살 음모
베크는 예비역이 된 후 여러 음모자들과 규합해 히틀러 암살 음모를 꾸몄으나 전쟁 초반에는 히틀러의 대성공으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전황이 악화되어 패색이 짙어지자, 베크를 중심으로 한 음모자들은 히틀러를 암살하여 정권을 잡고 연합국과 정전협상을 하기로 음모를 짰다. 거사가 성공하면 베크는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군을 수습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1944년 7월 21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은 실패로 돌아갔고 베크와 음모자들은 국내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에게 체포되었다. 어느정도 음모가들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프롬은 베크에게 가해질 심한 고문뿐만 아니라, 자신이 연루된 것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자살을 권유했고, 베크는 프롬이 준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3. 평가 및 기타
미치광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지금도 영웅시 되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처럼 평화주의자라기보다는 복고적 보수주의자였다. 베크를 중심으로 한 음모가들은 정권을 잡으면 서방과는 강화를 하고 소련과는 전쟁을 계속한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는데, 이들이 가진 현실인식의 한계였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나 프란츠 할더처럼 실전 부대 지휘 경험은 적고 오로지 참모로만 경력을 쌓은 장교들처럼, 베크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퇴역하면서 대규모 전역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선의 장교들에 비해 결단력은 서투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데리안은 자기 자서전 《한 군인의 회상》에서 자신에게도 음모가들이 접근했으나, 베크가 주동자인 것을 알고 "그렇게 결단력 없는 인물이 성공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데리안은 병무국 시절부터 베크를 낮게 평가했는데, 사실 베크 또한 육군의 기계화에 대해서 선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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