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Offenbach
[영문자료:Jacques Offenbach]
(20 June 1819 – 5 October 1880) was a German-born French composer, cellist and impresario of
the romantic period. He is remembered for his nearly 100 operettas of the 1850s–1870s and his
uncompleted opera The Tales of Hoffmann. He was a powerful influence on later composers of the operetta genre, particularly Johann Strauss, Jr. and Arthur Sullivan. His best-known works were continually revived during the 20th century, and many of his operettas continue to be staged in the 21st. The Tales of Hoffman remains part of the standard opera repertory.
[작품 모음]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가볍고 풍자적인 성격의 오페레타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이다. 그 자신이
첼리스트로 첼로 음악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 자크 오펜바흐는 1819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회당의 칸토르이자 카페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아들이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목표는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원장이던 케루비니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불허했다. 그러자 오펜바흐의 아버지는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케루비니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바로 이 오디션에서 당시 14살이던 오펜바흐는 놀라운 첼로 솜씨로 케루비니를 감동시켰다.
이렇게 어렵게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오펜바흐는 학교의 아카데믹한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다. 싫증을 느낀 그는 입학 일 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임시직을 전전하다가 1835년에 파리 오페라 코미크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 후 오펜바흐는 자비를 들여 노르블랭에게 첼로를, 알레비에게 작곡법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다. 이때 알레비는 오펜바흐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은 나중에 위대한 작곡가가 될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무렵에 그는 자신의 전공인 첼로를 위한 곡을 많이 작곡했다.
작곡가로서 오펜바흐의 최종 목표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학벌도 없는 외국인이 파리 오페라계에 진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첼리스트로서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졌다. 프랑스는 물론, 멀리 독일과 영국까지 진출했는데,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전까지 그는 작곡을 하는 첼리스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첼로를 연주하는 작곡가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1850년, 평소에 오펜바흐의 재능을 눈여겨본 코미디 프랑세스 극장의 감독이 그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위한 노래나 부수음악을 작곡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가 오페라를 작곡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펜바흐가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를 끌었고, 더불어 극장의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파리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인 오페라 코미크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지 않았다.
오페라 코미크로부터 위촉이 오기를 기다리던 오펜바흐는 결국 기대를 접었다.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살레 라카즈를 빌려 부프 파리지앵이라는 극장을 열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1855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박람회장 바로 옆에 극장이 있었다. 거리는 박람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덕분에 극장도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오펜바흐는 작곡, 감독, 지휘, 연출까지 일인다역을 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극장은 객석이 3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극장이었다. 이를 위해 오펜바흐는 작은 규모의 곡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나중에 부프 파리지앵은 슈아죌 가에 있는 보다 큰 극장으로 옮겨 갔다. 이 극장을 위해 오펜바흐는 24년 동안 21편의 오페라를 썼다.
오펜바흐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호화로운 의상과 무대 장치에 마음껏 돈을 썼으며, 관객들은 화려한 눈요기에 환호했다. 1858년 10월, 〈지옥의 오르페(Orphée aux enfers)〉가 무대에 올랐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의상, 2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 거대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공연이었다. 그런데 자냉이라는 평론가가 〈르 피가로〉 지에 이 작품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자 오펜바흐와 대본작가가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논쟁으로 〈지옥의 오르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극장은 연일 이 오페라를 보러온 사람들로 붐볐다.
1860년대는 오펜바흐 최고의 전성기였다. 1860년에 그는 나폴레옹 3세의 특별한 배려로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1862년, 오펜바흐는 부프 파리지앵의 음악감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864년부터는 부프 파리지앵보다 규모가 큰 극장을 위해 작품을 썼다. 1864년 〈아름다운 엘렌(La belle Hélène)〉, 1866년 〈파리의 삶〉, 1867년 〈제롤스탱 대공비(La Grande―Duchese de Gérolstein)〉, 1868년 〈페리콜〉 등 그의 대표작이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1870년 프로이센 전쟁이 터지자 오펜바흐는 가족들을 데리고 스페인 남부로 피란을 떠났다. 그전까지 오펜바흐는 나폴레옹 3세의 비호를 받던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제2 제정기의 앵무새'라는 조롱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프로이센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이 약해지자 오펜바흐의 인기도 땅에 떨어졌다. 프랑스 전역에 반독일 정서가 팽배해졌다. 오펜바흐는 프랑스 시민이 되고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지만,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이 공연 금지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그는 여전히 인기 있는 작곡가였다. 영국 런던 왕립 극장에서는 1870년부터 2년 동안 무려 15편의 오페라가 무대에 오를 정도였다.
1871년, 전쟁이 끝나자 오펜바흐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를 후원하던 나폴레옹 3세는 실각했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후에도 그는 오페라 작곡가이자 흥행사로 많은 작품을 작곡하고 무대에 올렸다.
1877년, 그전까지 가벼운 오페레타만 쓰던 오펜바흐가 진지한 오페라로 눈을 돌렸다. E. T. A. 호프만의 소설에 기초한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Les contes d'Hoffmann)〉가 그것이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결국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1880년 파리에서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역작인 〈호프만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오펜바흐는 자유로운 풍자 정신과 아름답고 풍부한 멜로디, 명쾌한 관현악법과 유쾌한 유머로 당대 사람들의 인기를 끈 작곡가이다. 이런 그를 로시니는 '샹젤리제의 모차르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오페레타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 중세의 전설 같은 것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 있는데, 이는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853년에 작곡한 2막짜리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에서 오펜바흐는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를 희화화했다. 신화에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이 오페라에서는 각각 다른 이성에 관심을 갖는 불성실한 부부로 나온다. 어느 날 유리디스가 저승사자에게 끌려 지옥으로 잡혀가는데, 오르페는 남편으로서의 체면상 이를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주피터에게 아내를 구해 달라고 한다. 오르페와 함께 저승으로 내려간 주피터는 오르페에게 아내를 데리고 가되 어떤 소리가 나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르페는 천둥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그 순간 유리디스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아내로부터 해방된 오르페는 기뻐하며 양 치는 여자들에게 돌아간다. 주피터는 유리디스를 술의 신 바커스의 시녀로 만든다. 유쾌하고 경쾌한 〈서곡〉과 1막에 나오는 유리디스의 〈사랑의 노래(La femme dont le coeur)〉, 4막에 바커스의 시녀로 변장한 유리디스가 부르는 〈술의 신을(J'ai yu le Dieu Bacchus)〉 등의 아리아가 있다.
평생 폭소를 유발하는 가벼운 오페레타만 작곡했던 오펜바흐는 1868년에 발표한 〈페리콜〉에서부터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보통 사람의 삶을 그린 로맨틱한 소재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보다 무거운 소재에 몰입하는데, 1881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무대에 오른 〈호프만의 이야기〉가 그런 경우이다. 독일의 환상문학 작가 E. T. A 호프만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오페라는 호프만이라는 시인의 여성 편력기를 그린 것이다. 호프만의 연인으로 1막에서는 올림피아, 2막에서는 줄리에타, 3막에서는 안토니아가 나온다. 1막에서 올림피아가 부르는 인형의 아리아 〈정원의 새들, 하늘의 별들이 모두 나에게 사랑을 얘기하네(Les oiseaux dans la charmille)〉, 2막에서 줄리에타와 호프만의 친구 니콜라우스가 부르는 뱃노래 〈아름다운 밤, 사랑의 밤이여(Belle nuit, o nuit d'amour)〉, 3막에서 안토니아가 부르는 〈사랑의 새는 날아가 버렸네(Elle a fui)〉가 유명하다.
오펜바흐의 작품목록 중에서 오페라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첼로곡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곡은 〈자클린의 눈물(Les Larmes du Jacqueline)〉이다. 이 곡은 베르너 토마스라는 독일 출신의 첼리스트가 악보를 발견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요절한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연상시키는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은 악보를 발견한 베르너 토마스가 붙인 것이다. 오펜바흐의 첼로 작품은 그 밖에도 〈첼로를 위한 군대 협주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 론도〉가 있다.
글:진회숙
이화여대 음대에서 서양음악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공부했다. 1988년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에 '한국 음악극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평론으로 수상, 음악평론가로 등단했고,..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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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20세기까지 작곡가와 연주가를 망라하여 인류의 음악사를 빛낸 음악가들을 만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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