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영변 전투(雲山-寧邊戰鬪)는 한국 전쟁 중기 북한 동부전선에서 진격을 계속하여 한만국경선을 눈앞에 둔 미군과 국군이 운산-영변 지역에서 중공군과 벌인 접전으로 중공군의 세력을 과소평가한 아군은 물자부족과 열악한 조건 속에 진격을 감행함으로써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하는 형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많은 손실과 함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산-영변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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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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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대한민국 미국 |
중화인민공화국 | ||||||
지휘관 | |||||||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최영희 제1사단장 준장 김동무 제11연대장 대령 김소 제1대대장 소령 차갑준 제2대대장 중령 정영홍 제3대대장 중령 김점곤 제12연대장 대령 한순화 제1대대장 중령 조성래 제2대대장 중령 김기용 제3대대장 중령 조재미 제15연대장 대령 유재성 제1대대장 중령 김진위 제2대대장 중령 안병건 제3대대장 중령 윌리엄 H. 헨닉 미 제10고사포단장 대령 존 S. 그로우든 미 제6전차대대장 중령 |
불명 | ||||||
병력 | |||||||
약 1만 명 | 제32사단 제117사단 제39사단 |
전투 과정
10월 26일
중공군이 개입한 지 이틀째가 되던 10월 26일 전선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조재미 대령이 이끄는 제15연대는 삼탄천 북쪽 고지의 중공군을 공격하였는데, 중공군의 역습을 받아 약간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존 S. 그로우든(John S. Growden) 중령이 이끄는 미 제6전차대대는 탄약과 연료 부족으로 이의 재보급을 위해 제15연대를 지원하던 중 D중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제12연대는 선전하여 운산의 서쪽 고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그 사이에 1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운산 북방 10 km 일대까지 남하하여 진지를 구축 중에 있었고, 그 일부는 남면천까지 진출함으로써 운산-용산동간의 사단 주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에 사단예비대로 운산 남쪽에 있던 제11연대가 일부 병력으로 이들 중공군을 공격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날 중공군은 서서히 운산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다음날 사단은 10대의 미 공군 수송기(C-119)에 의한 공수보급을 받음으로써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새로이 탄약을 보급 받은 제15연대는 262고지-199고지-212고지를 연하는 북위 40도선까지 진격하였고, 김점곤 대령이 이끄는 제12연대도 남면천 방향으로 경계를 강화하여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한편 운산 남쪽에서는 김동무 대령이 이끄는 제11연대가 이날 오후 운산-용산동간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8일
이때 운산국민학교에 위치한 전방지휘소에서 중공군의 상황을 직접 파악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사단 정면의 중공군은 완전한 정규군 1개 사단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즉각 밀번 군단장에게 제보하였다. 10월 28일의 운산의 전황은 비교적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각 연대는 진지강화와 수색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공군도 적극적인 행동을 삼가면서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 것 같았다. 이날 제12연대는 다시 2명의 중공군을 생포하였는데, 이들도 중공군의 대부대가 침입하였다는 내용을 진술함으로써 10월 25일 최초로 생포한 중공군 포로의 진술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었다. 그러나 미 제1군단의 정기 정보보고서는 “중공군이 출현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정규편제의 부대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지원한 의용군으로 생각된다.”고 기술하고 있어 미군측은 중공군에 대한 최초의 판단을 바꾸거나 중공정규군 개입을 믿으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단의 우측방 인접 부대인 국군 제2군단은 이날 중공군의 포위작전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초산까지 진격한 제6사단의 각 연대가 중공군 제40군의 포위공격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운산 북방 10 km 지점의 구봉산(九峰山)에서는 제2연대 2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Walker) 장군은 운산 정면의 부진한 전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평양을 경비중인 미 제1기갑사단 허버트 R. 게이(Gay) 소장으로 하여금 국군 제1사단을 초월 전진하여 압록강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제1사단은 10월 29일 새벽부터 포병의 탄막사격과 긴밀한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서북방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비록 소화기와 수류탄 및 박격포 등 화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지만 교묘하게 위장한 깊은 참호 속에 워낙 완강히 저항하여 사단의 공격은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제15연대가 공격하던 262고지와 제12연대 정면의 용포동(龍浦洞) 북쪽 고지는 아무리 포격과 폭격을 반복하여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국군이 접근할 때마다 중공군은 수류탄을 국군의 머리 위로 퍼부어댔다.
10월 30일
그런데 이날 저녁 무렵에 미 제1기갑사단의 전위가 되어 평양을 출발한 제8기갑연대가 용산동에 집결하여 북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튿날 10월 30일 제15연대는 사단의 우측에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오히려 적에게 점차적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국군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으로써 좌우로 우회하여 연대를 포위하려고 하였다. 제11연대 또한 이날 밤에 수차례의 공격을 받고 격전을 벌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부득이 1 km 정도 동남쪽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이날 아침 제1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하여 북진 중이었던 미 제1기갑사단의 주력이 용산동에 집결을 완료하게 되어 사단장은 전날 이곳에 도착해 있는 제8기갑연대를 운산으로 진출시키고 제5기갑연대로 하여금 그 후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이 사단의 임무는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삭주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측방의 붕괴소식에 이어 운산 서남방에 수 미상의 중공군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며, 미 제 8군정보참모는 북진하고 있는 제 8기갑연대장과 참모들에게 운산에서 아군을 공격하나 적은 중공군일 가능성이 크다고 경각심을 환기시켰다. 또한 사단을 지원하고 있는 미 제10고사포단장 윌리엄 H. 헨닉(William H. Henning) 대령도 증거를 제시해 가면서 정면의 적은 중공군이 틀림없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연대는 이날 오후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운산에 도착했다.
10월 31일
사단은 10월 31일 오전부터 미 제 1기갑사단과 교대를 시작하면서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 제1기갑연대의 제3대대는 한국군 제11연대와 남면천변에서, 그리고 제2대대는 운산 서측방의 국군 제1연대의 좌측 대대와 교대를 오전 중에 완료하였다. 그러나 전날 밤부터 중공군은 국군 제15연대 정면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제12연대의 우측 제2대대도 계속 공격을 가해 왔다. 따라서 동 대대와 교대하기로 되어 있던 미 제1대대는 우선 그 후방의 진지를 점령한 후 한국군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한국군 제 1사단의 최초 계획에 의하면 제11연대는 미군과 교대하고 난 다음 위기에 처해 있는 제15연대를 증원할 예정이었으나, 이때 사단의 우측 배후를 엄호해주고 있는 한국군 제8사단 16연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긴급히 구룡강(九龍江) 동안으로 이동하여 동 연대와 연결하고 이곳 방어에 임함으로써 사단의 우측 배후를 방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제39군 주력이 운산 부근을 향하여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때 그들은 주위의 여러 곳에 산불을 질러 그 연기로 유엔군의 공중관측을 차단하고 그들의 부대이동을 은폐하려 하였다.
이 무렵 미 제8군의 맨 좌측방은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었는데 미 제24사단은 서해안 도로를 따라 신속히 진격, 제21연대는 곽산을 거쳐 선천을 통과하였고, 제5연대는 구성을 점령한 후 수풍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으며, 정주에 있던 제10연대도 구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동 사단은 압록강을 향해 계속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청천강 계곡으로부터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미 제8군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을 구장동의 동서로 연한 방어선에 배치하고자 하였으나 그 전에 돌파당했다. 따라서 중공군의 대군이 곧 청천평야에 출현할 것을 예상하면, 국군 제2군단이 이용가능한 진지는 원리(院里) 일대밖에 없는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 제8군사령부에는 전황이 미 제1기갑사단은 운산으로 증원하여 전세의 호전을 기대했던 전날과는 다른 국면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간파한 듯 지금까지의 낙관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워커 장군은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운산의 전황을 주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하는 미 제8군의 종전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결과 및 영향
운산-영변의 전투의 결과로 국군은 일시적으로 중공군을 공격하여 전진하였으나 이는 곧 있을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격으로 이어졌으며, 물자부족과 북부 산악지방의 추위 속에서 악전고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선 지휘관들의 제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개입을 과소평가한 지휘부의 오판에 따라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이후 동부전선의 국군은 흥남을 통하여 해상철수를 하기에 이른다.
각주
- 이동 ↑ 한국전쟁사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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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무방비로 중공군 맞아… 방심이 부른 ‘비극의 신호탄’
맥아더 “중공 불개입” 오판..북진길 적 기습에 허 찔려 운산 지키던 美8기병연대 부대원 600명 잃고 패퇴
첫 패배 뒤에도 적 과소평가 상대병력 파악 않고 총공세.. 30만 중공군 반격에 대패 6·25 최대실책으로 기록돼
맥아더 원수는 자신 있게 중공군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 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 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 정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낙동강전선의 북한군이 무너지자 남한지역은 실질적으로 수복됐다. 1950년 9월 하순 아군 지도부가 맞닥뜨린 문제는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이었다. 원래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들은 북한으로의 진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의 논리는 달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군의 진격엔 탄력이 붙었고 북한군의 패주로 생긴 힘의 공백은 아군을 빨아들였다. 북한군 침입으로 이미 권위를 잃은 ‘국경 아닌 국경’ 38선은 이처럼 거센 싸움터의 논리를 막을 수 없었다.
이때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국제정세를 잘 읽고 심지가 굳은 이 지도자에게 북한이 일으킨 싸움을 38선에서 멈춘다는 일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9월 29일 유엔군 총사령부가 모든 작전부대들에 일단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는 한국군에게 북한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10월 1일 한국군 3사단 23연대는 38선을 넘어 북한 땅으로 진격했고 이튿날 양양을 점령했다(이 일을 기념해 우리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삼았다).
거세게 진격하는 아군을 막을 힘이 북한군엔 없었다. 병력과 화력에서도 이미 큰 차이가 났지만 사기도 떨어진 터였다. 그래서 소규모 부대들이 잠시 저항하다 패주하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덕분에 아군의 진격은 순조로워 10월 19일 한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은 평양을 점령했다. 10월 21일엔 이승만 대통령이 능라도비행장에 내려 열광적인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도 비행장에서 가장 먼저 평양에 돌입한 미군부대인 1기병사단 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 F중대는 96일 전 한국에 상륙했던 부대였다. 맥아더 원수는 상륙 당시의 부대원 200명 가운데 아직 남아있는 병사들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앞으로 나온 병사는 겨우 다섯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세 명은 부상병이었다.
○ 중공군의 개입
평양이 아군에게 점령되면서 북한 정권은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동부전선에선 국군이 이미 원산과 함흥을 점령한 터였다. 이제 아군에게 남은 일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까지 진격해 북한군을 소탕하는 작전이었고 그 작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고 예상됐다.
이때 아군 지휘부가 고뇌한 것은 중공군이 북한을 도우려 참전할 가능성이었다. 10월 3일 중공 외교장관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만일 유엔군 병력이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하면 중공은 개입하겠다”고 선언했고 10월 9일엔 중공 외교부 대변인이 개입 위협을 되풀이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만났다. 중공군의 개입을 걱정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단언했다. “제정신인 군사지휘관이라면 겨울을 바로 앞두고 대규모 작전을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맥아더 원수의 얘기가 인천상륙작전을 고집하면서 한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는 사실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워낙 어려우므로 제정신인 군사지휘관은 그것을 선택할 리 없고, 그래서 오히려 기습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거꾸로 기습당할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맥아더 원수가 그렇게 자신있게 중공군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하던 날, 중공군은 이미 12만 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 놓았다.
○ 운산전투의 서막
1950년 10월 하순 아군은 온 전선에서 빠르게 국경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미군 1군단 예하 한국군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운산으로 향했다. 10월 25일 사단의 선봉인 15연대는 운산 바로 북쪽의 전투에서 중공군 한 명을 생포했다. 아군이 생포한 첫 중공군 포로였다. 이 포로는 근처에 2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있다고 말했다.
미군 8군 지휘부는 중공군 포로의 진술과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얘기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소규모의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군이 잇달아 전투에서 밀리자 워커 중장은 평양에 머물던 미군 1기병사단에 운산을 지나 압록강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월 30일 1기병사단의 선봉인 8기병연대가 운산에 이르러서 한국군 12연대의 임무를 맡았다. 12연대는 구룡강 남쪽 입석의 재집결지로 이동했고 11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궤멸된 한국군 2군단 8사단과 접촉하기 위해 동쪽으로 움직였다. 북쪽의 15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11월 1일 운산지역의 아군은 삼탄강을 경계로 동쪽엔 한국군 1사단이 있었고 서쪽엔 미군 8기병연대가 있었다.
○ 운산전투의 경과
이처럼 미군 지휘관들이 중공군의 개입에 대비하지 않는 사이 중공군은 운산지역을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은 115사단과 116사단이었다. 11월 1일 정오에 1기병사단 5기병연대는 운산으로 가는 길목을 점령한 중공군 부대를 축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운산의 미군 8기병연대와 한국군 15연대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돼 고립됐다.
이때 미군 1군단 오른쪽의 한국군 2군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와해됐다. 그래서 운산은 전선의 돌출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운산을 지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미군 1군단 사령부는 미군 8기병연대와 한국군 15연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15연대가 마지막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15연대는 진지를 지킬 수 없었다. 퇴로가 중공군에 점령된 상태였으므로 철수도 어려웠다. 로이 애플먼은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에서 “대략 오후 11시 이후 한국군 15연대는 빠르게 분해됐고 밤 12시 조금 지나서 전투부대로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기술했다.
미군의 철수를 엄호하기로 한 한국군 15연대의 붕괴는 미군 8기병연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 부대의 철수는 2대대, 1대대, 3대대 순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미 중공군이 단 하나의 퇴로를 차단했으므로 2대대와 1대대는 차량들과 중화기들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었다.
후위를 맡은 3대대의 운명은 훨씬 참혹했다. 2일 오전 3시에 3대대 본부는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지고 큰 손실을 입었다. 일부 병력은 걸어서 남쪽으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포위된 채 진지 안으로 들어온 중공군들과 백병전 및 수류탄전을 펼쳤다. 새벽이 되자 미군 항공기들의 지원을 받아 생존자들은 임시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이들 가운데 전투능력이 있는 병력은 약 200 명이었고 부상자들이 170명가량 됐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5기병연대 병력이 차단된 퇴로를 뚫으려고 나섰다. 2일 오전 4시부터 시작돼 종일 계속된 작전에서 5기병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은 530명의 손실을 입고서도 중공군 115사단의 343연대가 점령한 길목을 빼앗지 못했다. 마침내 오후 늦게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8기병연대 3대대의 구출을 포기하고 5기병연대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결정은 미군에겐 더할 나위 없이 치욕적이었으니 미군 역사상 고립된 부대의 구출을 포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일 오후 늦게 8기병연대 3대대의 생존자들은 항공기가 떨어뜨린 전문을 받았다. 구원의 시도가 실패했으므로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밤에 탈출하라는 명령이었다. 생존자들은 협의 끝에 2일 밤은 그대로 버텨보기로 했다. 그날 밤 중공군은 박격포 사격에 이은 보병 공격을 여섯 차례 시도했지만 많은 손실을 입고도 미군 생존자 진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그리고 낮에 산속에 숨어 있었던 2대대 병사 50여 명이 합세했다.
3일 낮엔 항공지원이 없었고 밤엔 중공군의 공격이 이어졌다. 생존자들은 탄약이 거의 떨어졌으므로 적군의 무기를 주워 싸웠다. 4일 새벽 3대대의 생존자들은 전투 가능한 병력 200여 명에 부상병이 250명가량 됐다. 상황이 너무 절박했으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탈출하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됐다. 연대에 복귀한 3대대 병력은 장교 10명에 200명이 채 안 되는 병사뿐이었다.
운산전투에서의 아군 손실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다. 애플먼에 따르면 “야간 전투에서 한국 15연대의 병력 손실은 자인한 것처럼 무척 컸다. 연대의 무기와 장비 손실은 실질적으로 총체적이었다.” 8기병연대는 병력 600명 비롯해 많은 무기와 장비를 잃었다.
○ 운산전투의 중요성
운산전투는 미군과 중공군의 첫 싸움이었다. 당연히 이 전투의 과정과 결과는 흥미롭고 중요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이 입은 손실도 무척 컸다. 그러나 운산전투를 결정적 전투로 만든 것은 전투 자체보다는 전투에 대한 미군 지휘부의 분석과 대응이었다. 한국군 2군단이 궤멸되고 운산전투에서 한국군 15연대와 미군 8기병연대가 포위돼 심대한 피해를 보고서야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했고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8군 정보참모부는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을 대략 2만7000명으로 추산했다. 이런 비현실적 판단이 나온 가장 큰 원인은 맥아더 원수의 낙관적 견해였다. 그의 견해는 정보참모부의 부족하고 부정확한 정보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 요인은 공군력으로 중공군에 대적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맥아더 원수의 판단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회의론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거의 혼자 힘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그의 권위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침내 11월 24일 맥아더 원수는 ‘종전을 위한 총공세’를 명령했다. 그래서 30만 명이나 되는 중공군이 숨어 기다리는 산맥 속으로 아군은 진격했다. 적군에 대한 지식도 없고 적의 기습에 대한 준비도 없이. 결국 아군은 중공군에게 대패했고 북한지역에서 급히 물러나야 했다. 운산전투 뒤에 아군 지휘부가 내린 판단은 6·25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실책으로 판명됐다.
운산전투는
운산전투(1950년 10월 25일∼11월 3일)는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해 최초로 전선에 출현하였을 때 한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구룡강 연안 운산지역 일대에서 중공 제39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전개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했으나 결국 방어에 실패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잃은 채 영변과 용산동 지역으로 철수하게 됐으며 특히 미 제8기병연대는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돼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이 전투로 미 제8군은 진격작전을 중지하고 청천강 연안으로 병력을 철수시켜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됐으며 중공군은 전과를 확대해 구장동-영변-용산동 선까지 진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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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운산전투 (1950년 10월24일 ~ 11월1일) : 유엔의 오판과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
국군 제1사단은 1950년 10월24일 오전 11시 청천강을 건너 운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오른쪽에 제15연대가, 왼쪽에는 12연대가 포진하면서 운산을 정면과 동쪽에서 동시공격할 계획이었다.
우선 15연대는 영변으로, 12연대는 구룡강 서쪽 용산동을 거점으로 삼아 운산으로 돌입하기로 됐다. 북한군의 저항으로 몇 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하루만에 모두 중간목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10월25일 운산공격이 시작됐다. 그런데 운산시내로 진입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1군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최종목표인 수풍댐으로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다 이날 1사단은 국군은 적과 교전중에 중공군 참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날 포획한 중공군은 "운산 부근에 1만명, 희천 부근에 1만명이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1사단은 예비병력인 11연대까지 동원하는 총공세를 벌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했다.
이 때 1사단 백선엽 준장은 상급자인 프랭크 W.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중공군 참전 등의 전황을 보고했으나 유엔군사령부의 반응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특히 미 제8군은 운산과 온정리에서 잡은 포로들을 심문까지 한 상황이었음에도 다르지 않았다. 미 8군은 "포로들은 중공군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북한군을 좀 더 증강하기 위한 징후" 정도로 해석하고 중공군 부대의 참전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엔군사령부도 "중공군 부대가 진입했다는 정보는 없다"고 유엔에 보고했다.
당시 국군 제2군단은 온정리 등에서 중공군의 공격으로 부대가 와해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유엔군은 미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국군 제1사단을 추월 공격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파병된 미 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국군 제12연대와 작전지역을 교대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주일동안 중공군의 초기 공세를 막아내며, 이들 일부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군사작전회의에서는 청천강 이남까지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어 유엔군사령부는 11월1일 오후 뒤늦게 북진중이던 모든 부대에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국군과 유엔군은 대부분의 장비를 두고 철수를 시작했다.
미 8기병연대는 후퇴 도중 중공군에 포위돼 많은 병력을 잃었다. 엄호를 맡은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중공군에 무너지면서 후방이 차단된 탓이었다. 특히 3대대는 적진에 고립되는 위기를 맞았고, 미군은 이들의 구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3대대원 800명 중 약 53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이 사건은 미군 전사에서 '운산의 비극'으로 불릴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중공군은 병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군해 구장동-영변-용산동 선까지 도달했다. 이제 유엔군의 최우선 목표는 중공군을 막기위해 전선을 재조정하는 일이 됐다. 청천강 연안으로 모든 병력을 집중하고 방어지연 전투태세로 전환을 시도한다.
한편 중공군은 이 전투로 미군의 전력을 평가해 '운선전투 평가'라는 팸플릿으로 제작했다. 예하부대에 하달한 이 자료에서 미군은 보병, 전차, 포병의 협동작전능력을 높히 평가했으나 '나약한 보병', '후방차단에 속수무책' 등으로 혹독하게 비평했다. 국군에 대해서도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며 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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