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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4대 명장 중 1인]진(秦)나라 - 왕전(王翦)

Bawoo 2017. 4. 27. 23:42



   

왕전(王翦, 생몰년 미상)은, 중국 전국 시대(戦国時代) (秦)의 장군이다. 빈양(頻陽) 동향(東郷)[1]

출신이다. 왕분(王賁)의 아버지, 왕리(王離)의 할아버지.

진왕 정(政, 훗날의 시황제)를 섬겼고 중국 전국 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써 (楚), (趙)를 멸하는 등 진 왕조의 천하통일에 공을 세웠다.


경력

진왕 정 재위 11년(기원전 236년)에 환기(桓齮) ・ 양단화(楊端和) 등 조의 업성(鄴城,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을 공격해 먼저 9성을 차지했을 때, 왕전은 홀로 알여(閼与) 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를 아울러 한 군으로 삼았다. 장군이 되고 18일 동안 왕전은 군중의 두식(斗食) 이하의 공로가 없는 자를 돌려보내고, 군을 1/5로 줄여 정예 조직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함락되지 않고 있던 업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진왕 정 재위 18년(기원전 229년), 진은 대대적으로 병사를 일으켜 조를 공격했고, 왕전은 상군(上郡) 지방의 군을 통솔해 조의 정형(井陘)[2]을 함락시켰다.

진왕 정 재위 19년(기원전 228년), 강외(羌瘣)와 조를 평정하여 곳곳의 영토를 차지하고, 유무왕(幽繆王)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조의 공자(公子) 가(嘉)가 스스로 서서 (代)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에 병사를 이끌고 (燕)를 공격하여 중산(中山)[3]에 주둔하였다.


진왕 정 재위 20년(기원전 227년), 신승(辛勝)과 연을 쳐서 연과 대의 연합군을 역수(易水) 서쪽에서 부수었다.

진왕 정 재위 21년(기원전 226년), 연의 왕태자 (丹)의 군을 부수고 연의 도읍 계성(薊城)을 평정하였다.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던 태자 단은 이신(李信)이 잡아 죽이고 그 목을 보냈다. 연왕 희(喜)는 요동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왕이 되었지만, 그 해에 노환으로 항복하였다.

진왕 정 23년(기원전 224년), 진왕의 요청으로 다시 군을 이끌고 초를 공격하였다. 하남(河南)의 진(陳) 땅에서 남쪽으로 평여(平輿)에 이르는 땅을 점령하고, 초의 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았다.

진왕 정 24년(기원전 223년), 몽무(蒙武)와 함께 초를 공격하였다. 초왕이 되었던 창평군(昌平君)이 전사하고, 초의 장군 항연(項燕)은 자결하였다.

진왕 정 25년(기원전 222년), 왕전은 몽무와 함께 초의 강남을 평정하였다. 또한 동월(東越)의 왕을 항복시키고 이곳에 회계군을 설치하였다. 이듬해 진은 (齊)를 멸망시켰고, 중원 천하는 통일되었다.

인물 ・ 일화

진왕 정 재위 11년 초부터 사서에 등장하며, 동료인 양단화 등과 함께 업성을 공격해 온갖 계략을 써서 이를 함락시켰다. 그 뒤 진왕 정에게 중용되었으나, 노년이 되고부터는 대우가 다소 소홀해졌다고 한다.

초를 평정하면서 진왕 정은 여러 장군들을 모아두고 초를 멸하려면 얼마나 되는 군사가 필요할지를 물었고, 왕전은 「60만 명은 있어야 합니다.」라고 신중한 의견을 내놓았다. 젊은 장군 이신은 「병사 20만이면 충분합니다.」라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용맹을 드러냈고, 정은 이신을 초로 보냈지만, 왕전은 스스로 물러나

은거에 들어갔다. 초를 쳤던 이신의 진 군사가 초의 기습으로 대패하고 거꾸로 초에서 여세를 몰아 진으로 쳐들어오자, 정은 초를 막아 부수려면 왕전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고 왕전을 몸소 찾아가 당시 진의 총병력이던 60만 군사와 함께 장군의 지위를 내리며 초를 막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왕전은 초의 군대를 맞아 싸우러 가면서도 가는 길 곳곳에서 사신을 왕에게 보내 승전한 뒤의 포상을 몇 번이나 요구하였다. 또한 자신의 일족에 대한 앞으로의 안녕을 묻는 사자를 정에게 몇 번이나 보냈다. 그리고 국경 부근에 와서 견고한 요새를 쌓고 초 군대를 기다렸다. 초의 군대는 진 군대의 요새를 좀처럼 부수지 못하고 있었고, 왕전의 진 군대도 요새에서 좀처럼 나와 공격하지 않았다. 초의 군대는 요새를 공격하거나 진 군대를 도발해 싸우려 했으나 진 군대는 전혀 나올 기미가 전혀 없었고, 요새 또한 견고해 공략하기 어렵자 이래서는 싸울 수 없겠다며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전은 이미 농성하는 가운데서도 병사들에게 식량과 휴식을 충분히 주어, 군사들의 사기를 미리 쌓아두었던 것이다. 사기가 한껏 올라 돌 던지기나 멀리뛰기를 하며 휴식을 하는 병사들을 보며 왕전은 「내 병사들을 이제 내보내도 되겠구나」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왕전이 이끄는 진 군대는 초 군대의 배후를 습격해 전투 태세를 미처 갖추지 못한 초의 군대를 박살내버렸다. 왕전은 그대로 초를 쳐서 이듬해에 멸망시켰다.


왕전은 진왕 정에게 뻔질나게 사자를 보내 승전 뒤의 포상을 요구했고, 이에 보다못한 왕전의 부하 가운데 한 명이 「욕심이 조금 과하신 거 아닙니까? 공께서는 욕심이 없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만」라며 따지자, 왕전은 「너는 왕께서 얼마나 시기심 많은 분인지를 모른다. 지금 나는 반란을 일으키려고 마음만 먹으면 진을 엎을 수도 있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 해서 왕께서는 내게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계신다. 나는 승리한 뒤 받게 될 은상으로 충분하다고, 반란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이니라.」라고 대답하였다.


왕전은 진왕 정의 의심 많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물러날 때도 진왕 정이 쓸모있는 사람에게는 정중하지만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냉담하며 특히 권세가 있는 자는 아무리 공이 높은 자라고 해도 의심하고 처형하거나 일족을 주벌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여불위번어기 등의 경우처럼) 왕전 자신의 의견도 처음에 채택되지 못한 것도 진왕 정이 「왕전도 이제 늙었구만, 힘도 없고 약해졌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장군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것이다(왕전이 처음 물러날 때도 정은 그를 굳이 잡거나 만류하지 않았다). 때문에 진왕 정 본인이 왕전에게 장군이 되어 달라고 요청받을 때도, 진의 거의 모든 병력을 위임받고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음으로써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초를 평정한 뒤, 왕전은 진왕 정의 의심을 사거나 하는 일 없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자손

왕전의 사후, 아들 분(賁)이 뒤를 이었고, 손자 리(離)에게로 이어졌다.

신당서》(新唐書) 재상세계(宰相世系) 표2 중에는 왕전의 손자인 리가 진의 무성후(武城侯)가 되었고 원(元) ・ 위(威)라는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아들들은 진의 전란을 피해 산둥(山東)으로 이주했고, 그 먼 후손들이 후세에 (漢)의 왕길(王吉) ・ 왕준(王駿 ・ 왕숭(王崇), 조위(曹魏)의 왕웅(王雄), (晋)의 왕양(王祥) ・ 왕도(王導) ・ 왕돈(王敦) ・ 왕희지(王羲之)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문벌로써 이름을 떨쳤던 낭야 왕씨(瑯邪王氏) 집안도 왕전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즉 낭야 왕씨는 왕리의 먼 후손이 되는 것이다. 다만 한서(漢書) 왕길전(王吉伝)에는 왕리와 왕길 사이에 대한 관련을 적고 있지 않아서 《신당서》의 계도에 대해 신뢰성이 의심받고 있다.

참고 문헌

각주

  1. 이동 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푸핑 현(富平県)
  2. 이동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3. 이동 지금의 산시 성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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