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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4대 명장 중 1인]진나라- 백기(白起)

Bawoo 2017. 4. 28. 00:13


무안군 백기(중국어: 白起, 병음: Bai Qi, 바이치[*], ? ~ 기원전 257년 11월)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이다. 현 섬서성 출신으로 소양왕을 받들어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를 공격하여 진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명나라 때 그려진 그림.
명나라 때 그려진 그림.
생애 ? ~ 기원전 257년
출생지미현(郿县)
사망지두우(杜邮)
별명무안군
복무진나라
복무 기간기원전 294년 ~ 기원전 257년
최종 계급상장군(上将军)
주요 참전이궐 전투,
장평 대전





생애

아래는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의거한 기록이다.

기원전 294년에 좌서장(左庶長)에 임명되어 한나라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93년에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해 이궐 전투에서 승리, 24만 명을 잡아 죽이고 한나라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으며 5개 성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92년에 위나라를 공격해 크고작은 61개 성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78년에 초나라를 공격, 수도인 영성(郢)을 함락시켰다. 이 바람에 초나라는 수도를 옮겼다. 같은 해 무안군(武安君)의 작위를 받았다. 기원전 275년에 한나라·위나라·조나라 연합군과 싸워 13만 명을 잡아 죽였다.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 그 휘하 병졸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기원전 265년에 한나라 형성(陘城)을 공격해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을 잡아 죽였다.


 기원전 260년장평 대전에서 조나라와 정면충돌, 조괄이 이끄는 조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이때 40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먹여살릴 식량이 없어서 소년병 240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생매장해 죽였다. 《사기》의 장평 대전 포로 40만 학살사건은 오랫동안 고대사 특유의 과장으로 여겨져 왔으나, 1995년 5월에 산서성에서 해골더미가 대량으로 출토되어 연구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즈음, 진나라 본국의 재상 범수는 장평 대전에서 백기의 활약으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조나라의 수도 한단까지 쳐들어 가려고 하는 백기를 소환한다. 기원전 259년에 진나라는 왕릉(王陵)과 왕흘(王齕)을 시켜 한단을 포위하지만 조나라를 구원하러 온 위나라 신릉군, 초나라 춘신군에게 대패를 당한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시 백기를 출동시키려 했으나, 백기는 범수의 행동에 불신감을 느끼고 병을 핑계삼아 출동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입지가 더욱 좁아진 백기는 기원전 257년에 소양왕의 명령으로 두우(杜邮)에서 자살했다. 백기는 죽기 직전에 “장평에서 40만 포로를 하룻밤 사이 파묻어 죽여서, 하늘에 죄를 짓고 죽는다”고 한탄하고 죽었다. 진나라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각지에서 제사를 지냈다.

일대기

백기는 전국시대의 진나라의 장수이다. 산시성에서 태어나 30여년 이상 진나라의 군인으로서 복무했다.

백기는 총합89만 이상의 전국시대 군사들을 죽이며 인간 도살자라는 칭호를 얻었다(100만에서 크게는 200만까지 사료마다 다름) 그는 6국을 상대로 73번 이상의 공성전을 펼치며 종군기간동안 단 한 번도 패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왕전 이목 염파와 함께 전국시대 4대 명장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좌서장(부승상) 대량조(승상)으로 소양왕에 의해 진급되었다 한 위 조 초 4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며 넓은 땅을 정복했다 BC278년 초나라의 수도인 영을 침략했고  무안군(무로써 평안케 하는 자)칭호를 받았다. BC260년 장평대전에선 왕기를 이어받아 진군의 지휘자가 되었고 조괄이 지휘하는 조군을 무찔렀다. 조군은 보급선이 두동강 났고 백기에 의해 퇴각로 역시 차단되었다. 조괄이 진군 궁수에게 당해 죽은 후 항복한 상당지방의 사람들을 포함해 40만명 이상이 백기의 명으로 살해당했다. 백기는 조나라를 끝장내고 싶었고 조군은 장평대전의 여파로 심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승상인 범수는 경쟁자인 백기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 조나라의 달변가에게 설득당하고 진군은 쉬어야 하기에 조나라의 화친을 받아들이자는 변명으로 왕을 설득했다. 결국 백기는 공격을 멈추고 진나라로 돌아왔고 병에 걸렸다.


BC257년 진나라는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을 공격했다. 백기의 병가로 인해 왕릉이 대신 출전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했다. 몇 달 뒤 백기가 회복 된 것 처럼 보이자 왕은 백기에게 복귀명령을 내렸으나 백기는 더 이상 진나라에 장기전을 펼칠 여력이 없다며 협상에 반대해 온 진나라를 육국이 침략할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그러나 왕은 공격을 계속 할 것을 명했고 백기는 아프다는 핑계로 명령을 거부했고 왕은 왕흘을 백기 대신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그 결정은 전혀 전쟁에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와 위는 조를 돕기 위해 즉시 군대를 보냈고 다섯달 넘게

끌어온 한단전투는 결국 진나라가 패배했다 진군에겐 커다란 패배였다. 왕은 백기에게 다시 복귀명령을

내렸지만 병을 핑계로 다시 거절했다.  전국책엔 그의 진짜 의도가 들어나있는데 그의 불패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왕의 명을 거절해 사형당하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백기가 왕명을 몇 번 거절하자

왕은 화가나서 백기의 모든 직책을 빼앗고 수도에서 추방했다. 이때 범수는 왕에게 백기가 다른 나라의

장수가 되면 진나라에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왕을 설득했고 왕은 이에 백기에게 자결을 명했다.

평가

사마천은 《사기》 〈백기왕전열전〉 말미에서 “백기는 적의 능력을 잘 파악했으며 이에 따라 전략을 능란히 바꾸어 무한한 전술로 천하를 진동시켰다.”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동료인 범수와 사이가 틀어져 최후를 맞게 되기까지 과정을 지적하며 왕전과 함께 유능한 군인이지만 인간적 결점이 존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의 〈등애전〉에서 등애가 누명을 쓰고 죽기 전에 스스로를 백기에 비유해 한탄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참고 자료


[출처:정보-  / 수집-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