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李牧)
(? ~ B.C. 228)
염파의 천거로 장군이 된 인물로 춘추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명장으로 북방 지역을 지키면서
10여년 동안 흉노들을 상대로 싸워 그들을 벌벌 떨게 할 정도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1]
2.1. 흉노와의 전쟁
이목은 일찍이 조나라 북쪽의 국경지대인 대(代)와 안문(雁門)에 주둔하면서 장수를 역임하였는데, 그는 놀랍게도 나가 싸워서 흉노의 목을 잘라오는 자는 죽여버린다고 엄포를 놓고, 흉노가 쳐들어오면 민간인이건 군사들이건 모두 성 안으로 도망치라는 명령을 내려서 인적·물적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여 흉노가 약탈을 하러 와도 득이 없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안문 일대에서는 이목이 부임한 이후 어떤 피해와 손실도 입지 않아 인구가 늘고 풍족해졌으나, 매번 싸움을 피하는 이목의 태도와 모습을 본 흉노는 이목을 겁쟁이로 여겼고 조나라 군사들도 자신들의 대장이 겁쟁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 소식이 왕에게까지 전해져 왕도 그를 크게 질책했으나, 이목이 여전히 같은 방식을 고수하자 결국 그를 파직하고 다른 장수로 교체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장수는 흉노가 쳐들어 오는 족족 나가 싸웠으나 매번 패배해서, 결국 이목이 다져놓은 북쪽 국경 일대를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목을 불러오라고 아우성을 치자, 이목이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억지로 그를 복직시켰다. 이목은 자신이 다시 부임해도 이전의 방침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였고 왕이 그렇게 해도 좋다고 약조하면서 전선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예전과 같은 방식을 고수하여 흉노는 얻는 것이 전혀 없었다.
흉노는 여전히 '이목=겁쟁이' 설을 맹신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목은 여지껏 군을 그냥 방치해둔 것이 아니라 계속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흉노는 이목이 겁쟁이라 여기고 조나라 군사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훈련해도 싸우지를 못하니 흉노와 싸우기만을 고대하였다. 이목은 때가 되었다고 여기자 "그럼 이제 크게 붙어볼까?"라면서 평원에 대군을 전개시켰다. 흉노는 의심을 하여 적은 수의 군사를 먼저 보냈는데 이에 이목이 거짓으로 퇴각하면서 수천의 군사를 내버려 두자 흉노는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허나 이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한 진세'를 펼쳤고 흉노는 10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다. 뒤이어
담람(襜襤)이라는 부족은 전멸, 임호(林胡)라는 부족은 항복, 동호(東胡)는 궤주했다니, 북방 유목 민족들이 부족 중심인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피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싸움의 효과는 10년 넘게 지속되어, 이후 흉노는 조나라 국경에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2]
당시 조나라는 장평대전에서의 패배와 그 후 연나라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그나마 염파가 분전하여 연나라의 침략을 격퇴하고 역으로 침략을 하기는 했으나 삼국지의 황호나 잠혼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의 간신배 곽개가 예전에 염파가 자신을 소인배라고 욕했던 것에 열받아 모함을 하여 염파를 해임시킨다. 이에 염파는 악승이 이끄는 자기의 후임 부대를 공격하고 위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이목은 한 집안을 망하게 한 창씨에게 반해 왕후로 맞아들이려는 도양왕에게 간언하기도 했지만 도양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력은 쇠퇴하고 남아있던 명장 염파마저 다른 나라로 망명한 조나라는, 통일대업을 시작하여 이미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秦)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조왕 천의 요청을 받아 대장군에 임명된 이목은 군사를 이끌어 기원전 243년에 연나라에게 대승을 거둬 무수, 방성땅을 함락하고 기원전 233년에는 진나라 군사들을 맞아 의안에서 승리하였다. 기원전 232년에도 진의 대군을 업과 번오에서 막아낸다. 이에 진나라는 기원전 229년에 백전노장 왕전과 양단화를 시켜 합동작전을 펼쳐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으로 출동시키지만 이목은 사마상과 함께 진나라 군사를 잘 막아내 멸망의 위기를 극복한다. 진의 조나라 침공은 결국 이목에 의해 모조리 막혀버린 셈.
2.2. 죽음, 그리고 조나라의 멸망
이목이 있는 한 조나라를 멸망시키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진나라는 기원전 228년에 조나라의 간신 곽개를 매수해 왕에게 이목을 모함하게 하였고, 이에 속아 넘어간 조왕 천은 결국 이목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3]
거기다가 이목과 가까웠던 사마상마저 장군직에서 해임되자 방해거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진나라는 바로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이목이 있을 때 연이어 대패하며 크게 고전했던 것과 달리, 석 달도 안돼서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성이 함락되었고 조왕 천도 사로잡히며 조나라는 순식간에 멸망하게 된다. (이 때 곽개도 같이 사망한다. [4] )
활약, 능력, 위치로 보면 그야말로 동오의 육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5]
염파처럼 조국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며 수 차례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지만 결국은 모함을 받고 참수당하니 역시 내부의 적이 생겨나지 않게 하고 국론을 단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기, 왕전, 염파 등과 나란히 칭송받을 정도의 전국시대의 명장이었다. 한신도 경계할 정도로 뛰어난 전략가였던 초한쟁패기 조나라의 광무군 이좌거는 이목의 손자였다고 한다.
[각주]
[1] 천자문에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은 바가 있다.
[2] 당시 흉노는 묵돌 시절처럼 천하를 통일했던 유방을 쳐바르고 전한 제국을 압박하던 포스를 보여줄 만큼 강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진 제국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기 전이었으므로 동호에게 삥이나 뜯기며 빌빌대던 진나라 말기의 약체도 아니었다. 흉노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골칫거리였던 것만은 사실.
[3]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목이 반간계를 미리 알아채고 스스로 위나라로 망명 가서 염파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도 한다. (신동준역주 동주열국지에는 위나라로 망명가는 도중 여점-길가 주점-에서 술을ㅁ 마시며 쉬는 도중 추격대-역사로 표현-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는 걸로 나온다.
[4] 조나라 왕비가 죽였다는 기록도 존재하지만 역사서 기록에 의하면 조나라 멸망후 함양으로 이사하고 진시황에게 요청해 휴가를 얻어 여러 나라에서 받았던 황금들을 여러 채의 수레에 나누어 다시 함양으로 돌아오다 산길에서 도적들을 만나 황금을 모조리 뺏겼고 본인마저도 살해당했다. 이 도적들이 곽개에게 복수하려던 이목의 식객들인지, 혹은 그저 황금을 탐한 도적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열국지에 나오는 내용)
[5] 사실 나라의 상황이나 자신의 위치, 그리고 최후까지 고려하면 남송의 악비, 명나라의 원숭환, 로마 제국의 스틸리코와 비교하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었으나, 내부의 적에 의해서 쓰러지면서 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점에서 닮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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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李牧, ? ~ 기원전 229)은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趙)의 재상이자 장군이다.
조나라 말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명장으로 손꼽힌다. 본명은 이촬(李繓)이고 자가 목(牧)이지만, 본명보다는 이목(李牧)으로 알려져 있다. 벼슬이 상국(相國)에 이르렀으며 무안군(武安君)의 칭호를 받았다. 북쪽의 흉노(匈奴)와 서쪽의 진나라(秦) 등을 상대로 많은 전공을 거두었다.
생애[편집]
흉노와의 전쟁[편집]
이목은 본래 조나라 북쪽의 국경을 지키는 장군이었다. 그는 일찍이 대(代)나라와 안문(雁門) 사이에 주둔하며 흉노(匈奴)와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에 이목은 관리를 적절히 배치하고 세금을 모아 병력을 강화하는 한편,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며 활쏘기와 말타기 훈련을 시켰다. 또한 봉화를 설치하고 첩자들을 풀었으며 전사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목은 흉노가 침입할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그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여 수비로 일관하였다. 때문에 조나라 군대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흉노와 조나라 병사들은 모두가 이목을 겁쟁이라고 여겼다. 조나라 왕이 이를 나무랐으나 이목이 듣지 않자, 왕이 화가 나서 이목을 불러들이고 대신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흉노가 쳐들어올때마다 조나라 군대 또한 출전하였으나 매번 불리해져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변경에서 농사와 목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조나라 왕이 이목을 불러들였으나, 이목은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조나라 왕이 이목에게 강제로 군사를 이끌게 하자, 이목은 "왕께서 신을 기용하시되, 신이 예전에 했던 그대로 하게 해주시면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라 하였다. 조나라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변경으로 돌아간 이목은 이전처럼 수비로 일관하며 군대를 양성하였다. 후한 대우를 받은 조나라 군대가 싸우기를 원하자, 이목은 마침내 튼튼한 수레 1300대와 말 13000마리를 선발하였고, 또한 전공을 세워 100금을 상으로 탄 용사 5만 명과 강한 활을 잘 쏘는 병사 10만 명을 선발하여 하나의 부대로 조직하고는 훈련을 시켰으며, 들에 가축과 백성들을 풀어놓았다.
흉노의 선우(單于)가 적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해오자, 이목은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였다. 이에 선우가 다시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해오자, 이목은 적들이 예상치못한 진용을 펼치며 부대를 좌우 양쪽으로 펼쳐 흉노를 공격하였다. 이목은 이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흉노족 기병 10만 명을 죽였으며 담람(襜襤)이라는 부족을 없애버렸고, 동호(東胡)를 쳐부수고 임호(林胡)를 항복시켰다. 흉노의 선우는 달아났으며 이후 10년이 넘도록 흉노는 조나라 국경을 넘보지 못하였다.[1]
관료로서의 활약[편집]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목은 공적으로 인하여 조나라의 재상직인 상국(相國)에 임명된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진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후, 자신의 상국과 어사(御史)들에게 "조나라 왕이 그 상국 이목(李牧)을 보내 맹서를 약속하기에 그 인질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 맹서를 어기고 우리 땅 태원에서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잡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2]
또한 이목은 조 도양왕이 음탕한 성품으로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과부 창후(倡后)와 혼인하려 할때에 이를 반대하며 "여인이 정숙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불안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한 집안을 망하게 하였는데, 대왕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라 간언하였다. 그러나 조 도양왕은 "나라가 어지럽고 어지럽지 않고는 과인이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라고 말하며 이목의 간언을 무시하고 창후와 혼인하였으며 그 소생인 조왕 천을 후계자로 삼았다.[3]
진나라와의 전쟁[편집]
기원전 243년(도양왕 2), 이목은 장수가 되어 연나라(燕)를 공격하여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함락시켰다.[4]
기원전 233년(조왕 천 3), 진나라(秦)가 조나라의 적려(赤麗)와 의안(宜安)을 공격했다.[5] 그러자 조나라는 이목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나라 군대와 맞서도록 하였다.[6] 이목은 비(肥) 성 아래서 싸워[7] 진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진나라의 장군 환의(桓齮)는 패하여 달아났다.[8] 그 공로로 이목은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9]
기원전 232년(조왕 천 4), 진나라가 파오(番吾)를 공격하자 이목이 이를 물리쳤다.[10] 또한 남쪽으로 한나라(韓)와 위나라(魏)를 막았다.[11]
죽음과 사후[편집]
기원전 229년(조왕 천 7), 진나라가 장군 왕전(王翦) 등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였다.[12] 그러자 조나라에서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으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였다.[13] 이목은 수차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진나라의 장군 환의를 죽였다.[14] 그러자 진나라에서는 조왕 천이 총애하던 신하인 곽개(郭開)에게 뇌물을 주고는 이목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때문에 조왕 천은 조총(趙蔥)과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 대신에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이목이 명령을 따르지 않자, 조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정탐하다가 체포하여 죽이고 사마상을 해임시켰다.[15] 이와 같은 이목의 죽음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에 전해지며, 《사기》 권43 조세가에는 자세한 정황을 전하지 않고 단순히 이목이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이 파면당했다고만 서술하였다.
이목이 죽은 후에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에게 크게 격파되었으며, 이목이 죽은지 3달 후에 조왕 천이 진나라 군대에 사로잡혔다. 이듬해인 기원전 228년 10월,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이 진나라에게 함락되면서 조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16]
또다른 기록[편집]
《전국책》 권7 진책5에서는 이목을 모함하여 죽인 사람을 곽개가 아니라 한창(韓倉)이라고 하였다. 한창이 무안군 이목을 모함하자, 조왕 천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목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목이 돌아오자, 조왕 천이 한창으로 하여금 이목을 문책하기를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에, 장군이 왕에게 헌주를 받으면서도 어전에서 비수(匕首)를 차고 있었으니 사형에 해당하오."라 하였다.
그러자 이목은 "나에겐 팔이 굽는 병이 있어서, 키는 크되 팔이 짧아서 절을 할때에 땅에 닿지 못해 거동이 불경하였는데, 어전에서 죽을 죄를 범할까 두려웠으므로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나무로 덧붙이는 손을 만들게 하였소. 주상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보여드리겠소."라 말하고는 소매를 걷어 팔을 보여주며 자신의 사정을 왕에게 잘 알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한창은 "왕으로부터 장군에게 죽음을 내리라는 명을 받았으니, 사면할 수 없소."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목이 북쪽을 향해 수차례 절을 올리고는 죽음을 맞았는데, 검을 뽑아 스스로 자결하려다가 "신하가 궁중에서 자살할수는 없다."라 하고는 극문(棘門)을 나와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팔이 짧아서 닿지 못하자, 검을 입에 물고 기둥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찔러 죽었다.[17]
한편 《열녀전》 권7 얼폐전에서는 조 도양왕의 후비이자 조왕 천의 어머니인 창후(倡后)가 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목을 죽였다고 하였다.[18]
가계[편집]
이목의 가계(家係)는 당대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후대의 기록인 《신당서》에 전해진다.
그에 따르면, 조군 이씨(趙郡李氏)는 진나라에서 사도를 지낸 이담(李曇)과 그 둘째아들로 진나라에서 태부를 지낸 이기(李璣)로 부터 출자하였다. 이기에게는 이운(李雲) · 이목(李牧) · 이제(李齊) 등의 3아들이 있었는데, 이목이 조나라의 재상이 되어 무안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조군(趙郡)에 거주하게 되었다. [19]
이목에게는 이골(李汨) · 이홍(李弘) · 이선(李鮮) 등의 3아들이 있었다. 이골은 이량(李諒) · 이좌거(李左車) · 이중거(李仲車) 등의 아들이 있었다.[20] 이좌거는 광무군(廣武君)의 칭호를 받았으며 훗날 초한전쟁 때에 명장 한신(韓信)의 참모로 활동하였다.[21]
평가[편집]
-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조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명장들인 염파 · 인상여 · 조사 · 이목 등의 열전을 함께 묶어서 구성하였다. 이들의 열전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에 수록되었다. 여기서 이목은 "양장(良將)", 즉 "뛰어난 장수"라 평가되었다.
- 남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는 《천자문》에서 "기전파목(起翦頗牧) 용군최정(用軍最精)"이라 하였는데, 이는 곧 전국시대에 백기 · 왕전 · 염파 · 이목 등이 군사를 가장 잘 부렸다는 뜻이다.
각주[편집]
-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 《열녀전》 권7 얼폐전 도양창후
- ↑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43 조세가
-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43 조세가
-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6 진시황본기,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전국책》 권21 조책 4 : 李牧數破走秦軍,殺秦將桓齮.
-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전국책》 권7 진책5
- ↑ 《열녀전》 권7 얼폐전 도양창후
- ↑ 《신당서》 권72 上 재상세계표 1 上
- ↑ 《신당서》 권72 上 재상세계표 1 上
- ↑ 《사기》 권92 회음후열전
[출처]정보-책 55~57쪽/ 5권 675~682쪽/수집-나무 위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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