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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歷史認識 ―그 差異點과 共通點

Bawoo 2017. 4. 29. 22:25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歷史認識

―그 差異點과 共通點―

 

韓永愚


 

Ⅰ.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頒布上의 葛藤
Ⅱ.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編纂過程.
Ⅲ. 高麗史의 體裁와 內容
 1. 高麗史의 體哉
  (가) 編纂者
  (나) 世家
  (다) 志와 年表
  (라) 列傳
  (마) 論?
 2. 高麗史의 歷史認識
  (가) 歷史主體에 대한 認識
  (나) 文化意識의 性格
Ⅳ. 高麗史節要의 歷史認識
 1. 高麗史節要의 本文
 2. 高麗史節要의 史論
Ⅴ. 餘論-두 史書의 共通點-



 

Ⅰ.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頒布上의 葛藤

 

高麗史(高麗全史)와 高麗史節要는 1451年(文宗元年)과 1452年에 6개월의 時差를 두고 편찬된 高麗時代史의 姉妹史書이다.


이 두 史書는 形式上다 같이 王命에 의해서 편찬된 官撰史書이며, 편찬에 참여한 人物도 대부분 서로 중복되어 있다. 따라서 두 史書는 全史體(紀傅體)와 編年體라는 體制上의 差異點을 제외하면 歷史意識과 歷史認識에 있어서 根本的인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高麗史節要편찬의 主責任者인 金宗瑞가 내건 名分은 「高麗全史의 煩文을 간추려서 編年體로 서술함으로써 觀覽에 便하게 하기 위함」1)이라는 것이었다. 高麗史節要의 箋文에서도 「先修全史次及編年」이라는 世宗의 命에 의해서 全史와 編年을 차례로 쓰게 되었다는 것과 「?煩就簡表年?事以便考閱」이라 하여 考閱에 便하도록 간추려 쓰여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두 史書의 內容을 비교 검토하고 두 史書가 頒行되는 과정을 알아보면, 두 史書가 결코 體制의 차이라든가, 煩簡의 차이로서만 설명되어질 수 없는 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곧 歷史意識과 歷史認識의 차이이다.


첫째로 高麗史節要는 「?煩就簡」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高麗史에 없는 內容을 상당히 많이 追加·收錄하고 있음이 注目된다. 高麗史節要凡例에는 「治亂과 興亡에 관계되어 可鑑·可戒할 사건을 모두 記錄하였고 그 나머지는 正史(高麗史=필자)에 있으므로 생략하였다」고 하여 敎訓이 될만한 事件으로서 正史에 누락된 것을 補充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箋文에서도 그와 같은 취지를 설명하여 「世敎에 관계되는 事驗과 ?式이 될만한 制度」를 ?集하였다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高麗史節要는 敎訓을 目的으로 하여 이와 관련되는 政治·制度史관계 記事를 보충하는 方向에서 편찬되었음을 示唆하고 있다.

둘째로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는 頒布과정에서 서로 심각한 갈등을 빚어냈다는 사실을 注目할 필요가 있다. 金宗瑞가 端宗代에 高麗史節要를 印出할 적에 高麗史의 頒賜를 억제했다는 다음과 같은 李克堪의 啓가 있다.

 

「檢詳李克堪堂上議啓曰 高麗全史 人之是非得失 歷歷俱載 皇甫仁金宗瑞 懼全史出 則人人皆知是非 故但印節要頒賜而全史則少印 只藏內府 吾東方 萬世可法可戒之書 莫如高麗史 請印全史廣布 從之」2)

이 記事에 의하면 皇甫仁·金宗瑞등이 高麗全史의 人物에 대한 是非평가를 두려워하여 全史를 소량으로 印出하여 內府에 보관해 두고 그 대신 高麗史節要만을 頒賜했다는 것이다. 이 記事가 보이는 것은 端宗 2年10月로서 이때는 이미 皇甫仁·金宗瑞등이 소위 癸酉靖難으로 首陽大君에 의해서 被殺된 지 1年뒤이다.

여기서 우리는 金宗瑞·皇甫仁등이 제거되면서 高麗史節要의 반포가 중지되고 그 대신 高麗全史가 반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高麗史가 本格的으로 印出된 것은 端宗 2年10月 이후의 일이며, 이때 箋文의 作者를 金宗瑞에서 鄭麟址로 바꾸고 端宗復位運動에 관여되었던 許?·朴彭年·柳誠源의 이름을 삭제하게 되었다.

 

端宗元年에 高麗史節要가 頒布될 때에 儒臣들은 ?成派와 反對派로 갈라졌던 것 같다. 端宗元年7月에 侍講官成三問이 經筵에서 高麗史節要의 廣布를 主張하는 啓를 올린 記事가 보인다.3)

한편, 檢詳李克堪이 高麗史節要의 頒布를 반대하였음은 위의 引用記事로서 명백하다. 成三問은 周知하다시피 뒤에 死六臣의 核心人物이 되었으며 李克堪은 世祖의 執權을 보좌하여 佐翼功臣이 된 人物이다. 말하자면 反世祖派의 儒臣들은 高麗史節要의 頒布를 찬성하고 親世祖派의 儒臣들은 高麗史의 반포를 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兩派의 對立이 政治的立場의 차이에서 뿐만 아니라, 高麗史節要와 高麗史의 內容자체에 대한 평가의 차이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注目할만하다. 위의 李克堪의 啓言에서 보이듯이,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는 是非得失에 대한 평가를 서로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두 史書의 頒布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던 것이다.

 

1) 文宗實錄 卷9 文宗元年 8月 庚寅條「知春秋?事金宗瑞等 進新撰高麗史… 宗瑞啓曰 此全史也 當節其煩文 編年紀事 庶可便於觀覽耳」

2) 端宗實錄 卷 12 端宗 2年 10月 辛卯條
3) 端宗實錄 卷 7  端宗 元年 7月丁丑條「侍講官成三問 於經筵啓曰 臣聞命頒高麗史節要 登名頒 賜記者 皆己知之 昨日 還?頒賜記 削其五十餘人 此書…近日書成前日納私紙者 ?擬受賜雖 人不可誣也 況五十餘人之多乎…今若不足 則更命加印 廣布可也 不從」


 

李克堪은 두 史書의 편찬에 모두 修史官으로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高麗史節要의 반포를 반대하고 高麗史만의 반포를 찬성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비단 그이만의 경우가 아닐 것이다. 두 史書의 편찬에 참여한 모든 修史官의 입장도 두 史書중의 어느 한 쪽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두 史書가 모두 官撰인 동시에 共同著述이라는 여건에서 초래된 限界性이요 특색이기도 하다. 따라서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는 각각 편찬자 전원의 歷史意識을 統一的으로 反映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資料의 취사선택이나 是非得失과 같은 중요한 歷史的評價는 高級修史官에 의해서 左右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또한 君主가 修史에 깊이 관여할 경우에는 修史官자신보다도 君主의 입장이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差異點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누가 실제로 편찬의 주도권을 장악했느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는 다같이 金宗端가 편찬의 최고 책임을 맡았으나, 前者는 엄밀히 말하여 君主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것이고, 후자는 高級修史官의 입장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高麗史는 그 箋文에「大義悉?於聖裁」라 한 바와 같이 編史의 大義를 世宗이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高麗史節要는 그 편찬과정에서 君主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의 편찬이 文宗元年 8月이후에 착수되어 다음해 2月에 完成될만큼 진척이 빨랐던 것과, 다음 해(端宗元年) 4月에 活字本으로 印出되어 高麗史를 제쳐놓고 먼저 廣布되기에 이른 것도 모두 君主의 간섭이 없었던 데에 큰 理由가 있었다. 두 史書는 이렇듯 出刊경위와 與件이 매우 달랐다.


端宗代에 廣布되었던 高麗史節要는 金宗瑞一派와 死六臣이 제거되고 世祖의 執權이 강화되면서 頒布가 중지되고 그 대신 高麗史만이 頒布되었다.
世祖는 다시금 修史의 주도권을 잡고 高麗史를 토대로 여기에 古代史를 改撰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通史體系를 수립하고자 東國通鑑편찬에 착수했던 것이다.4) 世祖가 高麗史節要를 기피한 것은 그 主撰者가 金宗瑞
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內容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問題點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成宗이 ?位한 뒤로는 다시금 高麗史節要가 通用되고, 高麗史도 再印되었다. 그리고 高麗史節要와 새로 편찬된 三國史節要를 대본으로 하여 東國通鑑이 편찬되었다.5)


그 뒤 中宗·宣祖代에는 高麗史節要가 經筵에서 자주 講論되었으나6) 高麗史는 이용되지 않았다. 高麗史가 다시 注目받게 된 것은 光海朝代로서 이때 高麗史가 再印되었다. 그러나 朝鮮後期의 士林들은 高麗史에 불만을
품고 高麗史를 새롭게 再整理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代表的인 史書가 1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兪棨의 麗史提綱과 洪汝河의 彙纂麗史이다.


以上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볼 때,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는 그 편찬과정과 반포과정에 있어서 서로 相反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高麗史는 一般的으로 君權이 강화되고 儒敎이외의 思想을 넓게 포용하는 시대에 注目을 받았고, 반대로 高麗史節要는 臣權이 강화되고 儒敎理念이 강화되던 시기에 好應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史書의 歷史意識과 歷史認識의 차이를 이해하는 出發點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韓永愚「朝鮮初期의 歷史?述과 歷史認識」(韓國學報7, 1977.7, pp.41∼47).

5) 前揭論文p.52∼57.
6) 中宗實錄卷25 中宗11年6月壬子條, 同書卷43 中宗17年1月壬申條, 同書卷44 中宗17年3月己未條, 同書卷98 中宗37年7月乙亥條, 同書卷56 中宗27年10月乙丑條, 宣祖實錄卷59 宣祖28年1月庚子條, 同書卷61 宣祖28年3月丙子條, 同書卷165 宣祖36年8月丙戌條.


 

Ⅱ.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編纂過程

 

高麗史와 高麗史節要가 편찬되기 이전에 高麗歷史를 정리하는 작업은 여러 차례 시도되었고, 高麗史節要가 편찬된 이후에 있어서도 高麗史改修作業이 있었다. 太祖에서부터 世祖代에 이르기까지 약 70年間에 걸쳐 일곱 차례의 改修作業이 있었는바, 이를 一覽表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p.100참조)


이 중에서 지금 남아있는 것은 高麗史(高麗全史)와 高麗史節要뿐이지만, 나머지 史書들은 위 兩書의 母胎的구실을 하였다는 점에서 注目할 필요가 있다.

 


 

먼저 高麗史節要는 어떤 史書를 母胎로 한 것일까? 이 책이 착수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先行의 어떤 史書를 모태로 하여 部分的으로 加筆하였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 점에 관하여 중요한 示唆를 주는 것은 端宗元年7月에 侍講官成三問이 올린 啓言가운데

 

「臣聞命頒賜 高?麗?史? 節?要? …此書? 自?太?宗時?始撰? 至?世?宗?朝?功?訖? 許?人私印?而以書有誤撰 遂命改之 近日 書成」7)

이라 한 대목이다. 즉 高麗史節要는 世宗代에 완성되어 私印된 것을 改正한 것이라 한다. 世宗代에 완성된 것은 ?校高麗史와 改修高麗史둘 뿐인데 後者는 鑄字所에서 정식으로 刊行하였으나 반포만을 중단시킨 것이므로 私印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이 ?은 뒤에 世祖4年에 王命에 의하여 梁誠之와 權擥에 의해서 수정되어 春秋?에 보관되었는데8) 만약 高麗史節要가 이 ?을 母體로 한 것이라면 世祖가 그토록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高麗史節要의 母體가 된 것은 ?校高麗史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世宗20年3月에 承旨許?가 紀傳體高麗史편찬을 건의하면서 ?校高麗史를 史略(節要)으로 만들자고 주장한 것은 보면,9) ?校高麗史가 高麗史節要의 母體가 된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한편, 尹淮·柳觀등이 撰한 ?校高麗史는 鄭道傳등이 撰한 高麗國史를 ?校한 것이지만, 기본골격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高麗國史撰者의 一人인 尹紹宗은 바로 尹淮의 父親이라는 점과, 兩
書가 모두 編年體라는 점, 그리고 ?校高麗史의 序文에서 高麗國史의 誤謬로서 宗을 王으로, 節日을 生日로, 太子를 世子등으로 改書한 것을 지적하는 데 그친 점10) 등으로 보아서이다. 말하자면 ?校高麗史와 高麗國史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直書主義와 改書主義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11)


高麗國史·?校高麗史·高麗史節要가 기본적으로 同一系?의 史書라는 것은 高麗國史의 序文과 高麗史節要의 凡例가 서로 비슷하고12) 高麗史節要의 王?과 王의 性品에 대한 記事가 鄭道傳의 經濟文鑑別集君道의 기사
와 一致된다는 점에서도 인정된다.13) 君道는 아마도 高麗國史의 史?을 要約한 것으로 생각된다.14)

7) 端宗實錄 卷7 端宗元年7月丁丑條
8) 成宗實錄卷138 成宗13年2月壬子條
「南原君梁誠之上疏曰…臣空觀春秋? 有一件高麗史 或稱權草 或稱紅衣草 或稱全文 世宗戊辰下鑄字所印出 命臣監校印畢 世宗聞修史不公 命停頒賜 秉筆史臣以此得罪 至戊寅年(世祖4年 一筆者) 世祖御思政殿 臣與權擥入侍 親?上旨 改正本稿…」
9) 世宗實錄卷80 世宗20年3月乙巳條
10) 東文選卷93 進?校高麗史序(尹淮作)
11) 高麗國史보다 ?校高麗史는 內容이 다소 자세해졌다고는 하지만 脫略이 많기는 高麗國史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文宗實錄 卷12 文宗 2年2月 甲申條)
따라서 두 史書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內容의 詳略보다는 直書와 改書의 차이로 이해된다.
12) 本稿p.140 참고.
13) 邊太燮「高麗史·高麗史節要의 史論」(史叢21·22合輯, 1977.10 참조).
14) 高麗國史는 太祖4年에 완성되고 經濟文鑑別集은 太祖6年에 편찬되었으므로, 後者의 君道가 前者를 참고하여 서술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한편, 高麗全史의 母胎가 된 史書는 改修高麗史로 보아진다. 이 ?은 一名高麗史大全혹은 高麗史全文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分量도 꽤 방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世祖가 高麗史를 아끼면서 동시에 高麗史全文도 梁誠之·權擥으로 하여금 修正·보관케 한 것을 보더라도 兩書가 같은 系統의 史書라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또한 世宗이 ?校高麗史는 公的으로 印出조차 하지 않았음에 反하여 高麗史全文은 일단 鑄字所에서 印出하게 한 것
을 보면, 비록 부분적으로는 불만을 가지고 頒布를 中止시켰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世宗의 의취에 상당히 부합되는 史書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또 한 가지 高麗史全文의 撰者인 權?와 安止는 바로 龍飛御天歌의 作者이며 용비어천가의 內容이 高麗史世家에 크게 反映되고 있다는 것도 高麗史全文과 高麗史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초기의 高麗史서술이 기본적으로 두 系統으로 갈라져 내려오다가 그것이 각각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로 매듭지어지게 된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두 系統의 기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君主의 입장에서 高麗史를 정리하려는 것이요, 후자가 臣下(특히 宰相)의 입장에서 高麗史를 정리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高麗史정리가 難航을 거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高麗史를 君主의 입장에서 정리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世宗의 역사인식태도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문제는 그의 在世時에 完成된 東國世年歌(權?撰)와 龍飛御天歌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捷徑이 될 것이다.
前者는 七言詩로 기술한 韓國通史이며 後者도 역시 詩歌形式의 李朝建國史라 할 수 있다.

 

東國世年歌는 기본적으로 李承休의 帝王韻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一然의 三國遺事나 權近의 東國史略에 비하여 國史를 民族史的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큰 것이 특색이다.15) 龍飛御天歌는 李朝建國史를 李王室中心

으로 서술한 것으로 특히 李太祖의 言行과 治績이 中國歷代帝王의 그것과 종횡무진하게 비교되고 있다. 특히 李太祖가 가장 빈번하게 비교되고 있는 것은 唐太宗·宋太祖·漢高祖·金太祖등이 다.16) 李太祖의 化家爲國이 극도로 美化되어 있는 이면에서 開國功臣의 역할은 한낱 助役者의 위치로 서술되고 있으며 新舊儒臣間의 싸움에 黨派的利害와 感情이 介在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李氏一家는 항상 公明正大한 超黨派的입장에서 國利民福을 추구하고 國民의 信望을 모아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17)


한편, 李太祖의 對外政策은 民族政策과 事大政策이 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事大는 保國의 道로서 三國統一이후 우리의 傳統이 되었고, 李太祖의 威化島回軍도 그러한 政策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것은 國家力量을 增强시키려는 팽창주의 정책이나, 血統과 文化의 個別性을 자각하고 이를 강화하려는 民族정책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그 증거로서 「遼河以東을 강역으로서 世守하고, 遼東
의 人民이 本國疆內之民」18)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高句麗의 隋唐과의 抗爭이 大書特筆되고 있다. 겨레의식은 三韓으로 표현되고, 새 왕조의 歷史的正統性은 檀君時代의 仙人神誌氏로부터 내려오는 民族信仰즉 圖讖思
想에 의해서 正當化되고 있다. 말하자면 民族의 保全과 成長은 目的이요 事大는 그 手段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東國世年歌와 龍飛御天歌에 反映된 世宗의 歷史인식은 말하자면, ① 君主와 英雄的인 활동을 一次的으로 강조하고, ② 民族政策과 事大政策이 조화된 토대 위에서 國家發展을 이해하며, ③ 國民전체의 균형된 福利증진에
서 王朝統治의 正當性을 구하려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입장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 君主의 위치를 존중하는 입장은 君主나 그를 둘러싼 少數黨派의 私益과 私權을 위해서라기보다는 民
族과 국가, 그리고 國民의 전체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公益的입장에서 있다는 것이 적어도 名分上으로는 표방되어 있는 것이다.

 

15) 韓永愚前揭論文, pp.20∼24.

16) 同上pp.24∼25.
17) 예컨대 開國功臣鄭道傳은 私憾에서 李穡과 禹玄寶一家에게 極刑을 주려고 하였으나 李成桂가 이를 만류하였고 易姓革命율 저지하려는 李穡·鄭夢周·禹玄寶의 책동에 대해서도 季成桂는 항상 관대한 태도로 임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18) 龍飛御天歌 第42章


 

世宗의 專制君主的歷史인식태도는 臣下의 歷史인식태도와는 때때로 상충될 素地를 갖고 있었다. 下級관료는 專制君主에 기생함으로써 자신의 성장이 순조로울 수도 있으나 高級官僚나 특수한 정치적 공적을 쌓은 功臣
의 입장에서는 君權의 강화가 바로 자신의 成長에 逆作用을 주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러한 權力의 自己矛盾은 歷史서술에 있어서 君主의 역할을 우위에 두느냐 관료의 역할을 優位에 두느냐의 문제에서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高麗史정리의 難航도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鄭道傳의 高麗國史는 한마디로 開國功臣의 입장에서 쓴 高麗史서술이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李王室이나 舊臣勢力의 역할이 과소평가되거나 否定的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王室의 稱號를 格下하여 改書했다는 것만 이 高麗國史의 오류라고 한다면 고려국사의 改撰은 훨씬 容易했을
것이다. 世宗이 高麗國史를 가리켜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한 것도 단순히 尊稱의 改書를 두고 한 말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太宗代에 高麗國史의 改撰이 착수된 것도 太宗의 政治勢力이 기본적으로 反鄭道傳세력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太宗과 그를 보좌한 河崙·卞季良 등은 李成桂의 事跡이 소홀하게 취급되었다든가 鄭道傳과 그 父親鄭云敬, 그리고 尹紹宗의 행적이 지나치게 美化되었다는 것을 고려국사의 오류로서 지적하였다.19) 그러나 이러한 지적 자체가 이미 자신들의 政治的利害와 얽혀 있는 限반드시 公正한 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 世宗6年에 完成된 ?校高麗史도 王室에 대한 尊稱을 直書하였다는 점에서 君主의 權威를 강조하려는 世宗의 의취에 부합되었는지는 모르나, 尹淮가 尹紹宗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볼 때 反革命派의 입장에서「高麗國史」를 수정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世宗의 불만을 야기한 주요 이유일 것이다.20)

 

世宗은 22年에 權?·安止·南秀文·申?등으로 하여금 高麗史를 改修하게 하여 24年에 완성하고, 28年에 刊行하였으나 세종은 반포를 中止하고 修史官을 처벌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世宗이 本書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진 이유는 王室關係기사가 疎略하다는 것과 權?가 私情에 따라 權氏一家의 非行을 삭제하는 등 筆削이 不公하였다는 점이었다.21)

修史官이 처벌을 받은 주된 이유는 筆削이 不公하다는 것이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高麗王室과 李太祖관계기사가 소략하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 같다.22) 말하자면 王室중심의 高麗史와 李王室中心의 李朝建國史가 제대로 서술되지 않았다는 것이 세종의 가장 큰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世宗은 31년에 金宗端·정인지·정창손 등에게 다시 高麗宋의 ?校를 명령하면서 李成桂의 四代祖와 李太祖관계 기사를 용비어천가 등에서 보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새로이 高麗史의 개찬을 위임받은 修史官들은 대부분 世宗이 바라던 編年體를 반대하고 紀傳體를 고집하여 뜻을 관철하였다. 紀傳體서술의 주장은 전부터 간간히 제기되었으나 衆論에 의해서 묵살되다가 세종31년에 改撰命令이 내려지면서 衆論이 그리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紀傳體論의 표면적인 이유는 史實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데 이 體裁가 유리하다는 것과, 또 本史를 구성한 다음에 編年體를 편찬하는 것이 修史의 격식에 맞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紀傳體論의 본뜻은 거기에 있는 것 같지 않다. 紀傳體의 매력은 列傳에 있으며23) 列傳을 통해서 臣下들의 활동을 부각시킬 수 있고, 人物評價를 주관적으로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물론 紀傳體가 臣權을 높이는 最上의 史體인 것은 아니다. 編年體로서도 臣權위주의 歷史서술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世家(本紀)가 없는 編年體가 紀傳體보다도 더 유리한 史體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編年體가 王室위주로 서술되어야 할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次善策으로서 紀傳體로의 전환을 가며온 것이 아닐까?

 

19) 太宗實錄卷27 太宗14年5月壬午條

20) 世宗이 ?校高麗史에 만족하지 않고, 「未成之書」라고 하면서 또다시 改修를 명령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표면상으로는 脫略이 많다는 金孝貞(同知春秋?事)의 건의에 의해서 改撰이 命해졌다고 하나(文宗實錄 卷12 文宗2年2月甲申條), 그 脫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校高麗史의 主撰者인 尹淮가 高麗國史편찬에 참여한 尹紹宗과 父子關係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校高麗史가 高麗史節要의 母體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世宗의 ?校高麗史에 대한 불만은 단순한 記事의 脫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脫略이 가지는 政治的입장에 있다고 보여진다.
21) 예컨대 桓祖(이성계의 父) 이후의 기사가 소략하고 修史官權?가 崔士康외 청탁을 받아 蔡河의 母가 官婢인 것을 삭제하였으며 자기 아버지 權近이 中國에서 가져온 外交文書를 私折한 일을 감추었을 뿐 아니라 先代權溥·權準·權皐의 행실을 貶書한 기록을 삭제하였다는 것 등이다.
22) 世宗31年1月乙酉에 春秋?에 내린 世宗의 高麗史改撰傳旨에 의하면 前撰 高麗史가 「失疎疎略」하다는 것이 改撰의 주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疎略의 一例로서 遼가 世子에게 冕服을 下賜한 기록의 탈락이 지적되었다. 또 앞으로의 ?校方向으로서 一字一事라도 빠진 것을 고쳐야 할 경우에는 모두 付標하여 啓를 올리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렇듯 世宗이 疎略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주로 王室관계 기사에 있음을 엿볼 수 있다.

23) 梁啓超는 「中國歷史硏究法」(p.20)에서 紀傳體는 人物本位의 歷史로서, 編年體는 年代爲主의 歷史로서, 그리고 紀事本末體는 事件爲主의 歷史로서 적합한 史體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世宗으로서도 紀傳體를 반대할 뚜렷한 名分이 없었고 또 臣下들의 衆論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정한 양보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24)
그러나 修史의 大義는 여전히 世宗이 주도하는 가운데 史書의 골격이 짜여졌기 때문에 비록 文宗元年(1451)에 完成되었다 하더라도 그 골격이 크게 바꿔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紀傳體高麗史가 착수된 지 3년이 못되어 完成된 것은 이미 그 母體가 되었던 權?의 改修高麗史가 부분적으로 결함은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紀傳體로의 급속한 改編을 가능하게 할만큼 방대한 資料整理위에서 편찬되었으리라는 것을 示唆한다고 볼 것이다.

 

따라서 紀傳體高麗史는 君主中心의 高麗史觀과 臣僚中心의 高麗史觀이 서로 절충되는 交叉點위에서 成立되었다고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交叉點에서 臣僚쪽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정리된 것이 바로 高麗史
節要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은 君主가 修史의 大義를 주도한 것이 결코 아니며 臣下자신이 自意로 편찬하여 君主에게 바친 史書라는 점에서 高麗史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24) 世宗은 한번도 紀傳體를 주장한 일이 없이 編年體만율 고집해 왔으나 金宗瑞· 정인지 등이 世子를 먼저 설득시키고, 世子가 入啓하여 마침내 기전체를 승낙받기에 이르렀다. 世宗이 編年體를 양보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紀傳體를 통해서도 所期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를 가지고 본다면 紀傳體高麗史는 특히 世家에서 세종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列傳에서도 人物評價의 기준이 李成桂의 행적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설정된 부분이 적지 않다. 따라서 紀傳體고려사는 世宗과 修史官의 입장이 어느 정도 조화될 여지를 가지고 채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Ⅲ. 高麗史의 體裁와 內容

 

1. 高麗史의 體裁

 

(가) 編纂者

 

高麗史는 世家46卷, 志39卷, 年表2卷, 列傳50卷, 目錄2卷을 합하여 모두 139卷이며, 卷頭에 箋文과 凡例가 들어 있다. 現行高麗史에는 箋文을 鄭麟址가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實錄에는 金宗瑞로 되어 있다.25)
金宗瑞는 修史의 최고 책임자였으나 뒤에 癸酉靖難에 叛逆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鄭麟址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아마 高麗史의 初刊本은 金宗端의 이름이 들어 있을 것이다. 또한 現行高麗史에는 32名의 修史官
명단 중에 許?·朴彭年·柳誠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이들도 역시 世祖의 逆臣으로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修史官명단에서 削除된 것이다.


世家와 志·年表등은 盧叔同·李石亨·金禮蒙·李芮·尹起?·尹子雲등이 집필하였고,26) 志중에서도 地理志는 梁誠之가 담당하였다.27) 한편 列傳은 崔恒·朴彭年·申叔舟·柳誠源·李克堪등이 담당하였으며 전체의 校閱과 ?潤
은 金宗端·鄭麟祉·許?·金?·李先齊·鄭昌孫·辛碩祖가 담당하였다.28)

 

25) 文宗實錄卷9 文宗元年8月庚寅條
26) 文宗實錄卷12 文宗2年2月甲申條
27) 梁誠之는 高朦史地理志뿐아니라, 八道地理誌·東國輿地勝覽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여 조선 초기 학자 중에서 地理에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韓永愚「訥齋梁誠之의 社會·政治思想」, 歷史?育17, 1975)
28) 註(26) 과 같음


 

(나) 世家

 

世家는 太祖에서 恭讓王에 이르는 歷代諸王의 治績을 편년체로 기술한 것인데 주요한 특색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天子를 「本紀」라 하고 諸侯를 「世家」라고 한 史記의 名分에 따라,王紀를 世家라고 표기한 점.29)


둘째, 漢書와 後漢書, 그리고 元史에 준하여 君主의 事實과 言辭를 모두 記錄하였다.30) 元來元史는 明나라 太祖때에 편찬된 것으로 兩漢書를 따라서 皇帝의 事實과 言辭를 ?載함으로써 唐書가 皇帝의 事實만 적고 言辭, 즉 詔勅을 뺀 것을 시정하려고 하였다. 高麗史도 元史에 준거하여 世家를 지었기 때문에 君主의 事實(행동)과 言辭(敎旨)를 모두 기록하였다.


셋째, 宗·陛下·太后·太子·節日·制詔등과 같은 用語들은 天子만이 쓸 수 있는 것이지만 당시의 所稱을 따라 그대로 기재함으로써 史實을 變改하지 않았다.31) 이로써 高麗史世家는 諸侯의 名分을 준수하면서 또 그 名分을 파기하는 兩面性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高麗라는 國家는 中國의 諸侯인 동시에 天子의 면모를 가진 나라로 서술되었다.


넷째로, 圓丘·籍田·燃燈·八關등과 같은 빈번한 宗敎行事는 처음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되 만약 君主가 親히 行한 것은 빠짐없이 기록하였다.32) 佛敎行事나 道敎行事도 君主와 관련되는 것은 거의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로, 黃周亮이 撰한 高麗實錄과 閔漬의 「編年綱目」, 金寬毅의 「編年通錄」등 雜記類에 의거하여 王建의 世系를 따로 지어서 世家의 앞머리에 실었다.

 

以上世家편찬의 다섯 가지 특색은 주로 凡例를 가지고 이해한 것이나, 이러한 凡例의 정신이 의도하는 바는 한마디로 말하여 君主의 權威와 治績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이 점은 비단 世家만의 특색이라기보다는 高麗史전체의 특색이며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근본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再論하기로 한다.

 

29) 高麗史 凡例「按史記 天子曰紀 諸庚曰世家 今纂高麗史 王紀爲世家 以正名分」
30) 同上「其書法準兩漢書及元史 事實與言辭 皆書之」
31) 同上「凡稱宗·稱陛下·太后·太子·節日·制詔之類 雖涉?諭 今從當時所稱書之 以存其實」
32) 同上「如圓丘·籍田·燃燈·八關等常事 書初見 以著其例 若親行則必書」


 

(다) 志와 年表

 

다음에 志39권은 分類史에 해당하는 것으로 天文志(3권)·曆志(3권)·五行志(3권)·地理志(3권)·禮志(11 권)·樂志(2권)·輿服志(1권)·選擧志(3권)·百官志(2권)·食貨志(3권)·兵志(3권)·刑法志(2권)등 12志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分類는 元史를 따랐다고 凡例에서 밝히고 있으나, 元史의 志와 완전히 一致되는 것은 아니다.33)


그러나 元史의 志가 갖은 특색은, 唐書의 志가 事實만 가지고 組立하여 制度의 根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反省하여 宋史의 志에 따라서 條分類聚한 점에 있다. 따라서 高麗史의 志가 元史의 志를 따른다고 한 것은 元史의 志의 項目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條分類聚하는 취지를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志에 引用되고 있는 資料들을 보면, 古今詳定禮·式目編修錄등 官撰자료를 비롯해서 周官六翼·蕃國禮儀·墓誌銘·道詵松岳明堂記·三韓會土記·英州記 등 諸家의 雜錄이 인용되고 있으며, 그밖에 古記·世傳·該傳이라하여 古記 자료와 口傳되는 자료까지도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당시에 入手할 수 있는 資料는 그 思想系統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넓게 수집하여 高麗文化를 體系的으로 정리하려는 意圖가 엿보인다.


다만 高麗史편찬의 근본의 도가 高麗時代의 制度와 思想을 정리하는데 있다기보다는 政治史서술에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志보다는 世家와 列傳에 苦心한 흔적이 가장 크고 志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편찬되었다고

생각된다.34) 高麗史를 紀傳體로 바꾼 근본 이유도 世家와 列傳에 있는 것이지 志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釋老志나 藝文志같은 것이 빠진 것도, 반드시 元史를 기준으로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러한 志를 설정할만한 資料의 정리가 未洽했고 또 그러한 資料의 수집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高麗
史편찬이 難航을 거듭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政治的立場의 차이에서이지 資料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음에 年表는 金富軾의 三國史記를 모방하여 王曆만을 기록하고 宰相이나 功臣의 年表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君主中心으로 年表가 作成된 것을 의미한다.

33) 元史에는 天文·五行·曆·地理·河渠·禮樂·祭紀·輿服·選擧·百官·食貨·兵·刑法등 13志로 구성되어 있어서 高麗史志에 없는 河渠志가 들어 있는 것이 다르다.
34) 예컨대 志에는 年代의 표시가 없는 것이 적지 않고, 한 가지 내용을 분해하여 이곳저곳에 分載함으로써 억지로 形式을 갖추기에 급급한 인상을 주는 것들이 많다.

(라) 列傳

끝으로 列傳은 50권으로 分量도 가장 많고 또 高麗史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世家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列傳은 ① 后妃(2권) ② 宗室과 公主(2권) ③ 諸臣(29권) ④ 良吏⑤忠義⑥ 孝友⑦ 烈女⑧ 方技⑨ 宦者⑩ 酷吏⑩ 嬖幸⑪ 姦臣⑫ 叛逆 등 13분야로 나누어 싣고 있으며 辛禑를 叛逆傳에 넣고 있는 것이 注目된다. 이와 같은 分類는 儒敎的價値觀에 따른 것이지만, 순전히 儒敎的기준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儒敎的기준에 충실하려면 道學·儒林·文苑傳등이 들어가야 하고 忠義·孝友·烈女등이 충실하게 취급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忠義·孝友·烈女등은 모두 合하여 한 권도 안될 만큼 분량이 작은 것은 역시 상징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列傳의 과반수인 29권이 諸臣으로 채워진 것과 그 대부분이 高麗末期人士로 구성된 것, 그리고 后妃와 宗室·公主가 4권이나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列傳의 성격이 매우 政治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列傳이 지닌 政治的性格이 무엇인가는 姦臣과 諸臣의 구별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알아보는데서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卷3, 8, 39에 실려 있는 姦臣中에서 池奫以下의 8人의 姦臣은 모두 禑王代人物로서 池奫.李仁任·林堅味·廉興邦·曹敏修·邊安烈·王安德이 갖는 共通點은 禑·昌을 추대하는데 참여했거나, 李成桂에 의하여 제거된 人物들이다. 이들이 추대한 禑·昌은 李成桂등에 의해서 廢殺되고 이른바 廢假立眞의 名分下에 恭讓王이 추대되었으며 李成桂등은 中興功臣의 칭호를 받았었다. 따라서 禑·昌이 叛逆列傳에 들어가고 그 추대세력이 姦臣傳에 들어간 것은 李成桂의 공양왕 추대를 正當化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鄭夢周·朴?·池勇奇같은 人物이 李成桂와 날카롭게 대립되었던 政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姦臣傳에 들어가지 않고 諸臣傳에 넣은 것도 그들의 忠節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李成桂와 더불어 恭讓王
옹립에 참여한 中興功臣이었다는 점에 있었던 것 같다.35) 만약 그들을 姦臣傳에 넣게 된다면 李成桂도 姦臣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威化島회군 후에 李成桂에 의해서 除去된 崔瑩이 諸臣傳에 들어있는 것도, 그가 李成桂와 더불어 李仁任一派를 제거하는데 合力한 人物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崔瑩이 愛國名將이요 高麗의 忠臣이었기 때문에 諸臣傳
에 실린 것은 아니다. 曹敏修·邊安烈·王安德도 뛰어난 愛國武將이지만 姦臣傳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李穡은 昌王옹립에 참여하고 李成桂를 明帝에게 誣?한 尹彛·李初의 獄에 연루되었으며, 田制개혁을 反對하는 등 李成桂一派와 날카롭게 대립되었던 人物임에도 불구하고 諸臣傳에 들어간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李成桂가 이색의 죄를 용서하여 개국직후에 韓山伯으로 봉한 人物이기 때문일 것이다. 禹玄寶의 경우도 비슷한 事例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列傳에 麗末의 인물을 叛逆또는 姦臣으로 넣느냐 諸臣으로 넣느냐의 기준은 거의 전적으로 李成桂의 정치행적을 正當化하는 입장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國家와 民族을 위해서 얼마나 공헌했느냐 또는 李一派와 얼마나 對立되었느냐 하는 것은 오히려 副次的인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列傳이 내포한 政治的感覺이 얼마나 예민한 것인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列傳의 앞머리에 后妃·宗親·公主를 넣은 것과, 列傳의 말미에 姦臣·諸臣을 둔 것은 서로 깊은 관련을 가진 것으로서 그것은 요컨대 高麗君主와 王室의 권위 그리고 李成桂의 權威를 내세우려는 것이며 世家에서 君主와 王室의 치적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킨 것과 같은 ?絡위에 있는 것이다.


高麗史列傳이 李成桂및 君主의 입장에서 편찬되었다는 것은 李朝開國功臣의 列傳을 지극히 제한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開國功臣54名중에서 獨立列傳을 가진 이는 5名, 祖上의 列傳에 附記된 者가 2名뿐이다.36)

이것은 開國功臣의 行蹟이 미미해서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削除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된다.

첫째는 李朝開國과정에서 功臣의 역할을 작게 평가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開國功臣의 상당수가 國初에 소위 鄭道傳亂 또는 朴苞의 亂에 연좌되어 叛逆罪로 피살된 것과 관련이 있다. 世宗의 高麗史개찬은 바로 開國功臣의 입장에서 씌어진 高麗國史를 王室의 입장에서 바꾸려는 데서 비롯된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想起해 둘 필요가 있다.


한편 開國功臣이 많이 누락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開國功臣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귀양 갔거나 隱居한 舊臣들이 名臣列傳에 대거 등재되고 있다. 金子粹·姜淮白·金震陽·李崇仁·權近등 그 例를 다 들기 어렵다. 이것은
世宗代의 支配層이 高麗舊臣이거나 그들의 후예인 것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高麗史列傳은 君主의 입장과 修撰당시의 支配層의 입장이 타협하는 조건에서 人物選定과 人物評價의 기준이 설정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麗末이전의 人物들은 비교적 정치적 편견이 없이 選定·評價되고 있다. 그리고 世宗·文宗代의 文化분위기를 反映하여 儒·佛·仙에 관련된 人物과 雜職또는 技術職에 관련된 人物들이 비교적 골고루 등재되고 있다.
李資玄·韓惟漢과 같은 道家流의 인물이 諸臣傳에 들어 있고 金謂?와 같은 風水圖讖家, 李寧과 같은 畵人, 李商老·薛景成과 같은 醫人, 伍允孚와 같은 卜筮人이 方技傳에 실려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비록 釋老傳은 따로 없으나 釋·老에 관련된 儒者들은 거의 빠짐없이 수록되고 있음을 본다.

 

35) 中興功臣의 名單은 다음과 같다.
一等功臣: 李成桂
二等功臣: 沈德符
三等功臣: 鄭夢周, 池勇奇, ?長壽, 成石璘, 朴?, 趙浚, 鄭道傳

36) 開國功臣으로서 獨立列傳을 가진 이는 趙浚·鄭道傳·南誾·李豆蘭·吳思忠이고 祖上에 附記된 者는 趙仁沃·金士衡2人이다.


 

(마) 論?

 

高麗史의 體裁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言及해두어야 할 것은 撰者자신의 論?을 거의 싣지 않고 있는 點이다. 그 이유를 凡例에서는 「元史」에 準한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內面的인 이유는 아마도 論?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撰者의 修史精神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高麗史에 대한 論?은 鄭道傳의 「高麗國史」이래로 상당한 축적이 있었던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高麗史에서는 旣往에 씌어진 論?을 고의적으로 削除하고 다만 李齊賢·崔?·金富軾·金莘夫·金良鏡등 高麗史臣
이 쓴 19則의 論?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史臣이 쓴 14則의 論?合하여 33則의 論?만을 실어서 各王마다 평균 1 則씩 배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李朝建國後에 儒臣들이 쓴 史論을 의도적으로 빼버리고 있다. 이것은 바로 世宗이 鄭道傳의 「高麗國史」를 가리켜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비난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世宗은 鄭道傳등 國初史臣들이 쓴 論?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鄭道傳등의 論?은 開國功臣의 입장에서, 臣下의 입장에서 儒臣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論?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君主의 입장에서, 王室의 입장에서 高麗史를 쓰려는 世宗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矛盾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狀況이 高麗史로 하여금 論?이 貧困한 史書가 되게 한 근본이유일 것이며 또 이 點이 뒤에 검토할 「高麗史節要」와 근본적으로 다른 點이기도 하다.


 

2. 高麗史의 歷史認識

 

(가) 歷史主體에 대한 認識


高麗史는 高麗國家를 이끌어 온 歷史主體를 어떤 勢力에 설정하고 서술되었는가? 이미 高麗史의 體裁에 대한 검토에서 高麗史서술의 기본입장이 君主와 王室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鄭麟趾가 쓴 進高麗史箋文에는 君主중심의 高麗史인식태도가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文宗代를 分岐點으로 잡아 그 이전을 긍정적으로, 그 이후를 否定的으로 이해하고 있다. 文宗代까지의 고려 前期가 긍정적인 理由는 君主의 善政에 연유한다. 예컨대 王建은 三國을 統一하고, 中國을 높이어 東土를 보전하고 宏遠한 規模를 창설하였으며 光宗은 儒風을 稍興시키고, 成宗은 ?社를 建立하고 治具를 다 갖추었으며, 顯宗은 宗祐을 中興·再定하고 文宗은 太平의 治를 베풀었다. 말하자면 모두가 君主의 뛰어난 善政에서 創業·中興·太平의 시대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37)


한편, 고려후기는 權臣과 臣姦이 잇달아 나타나서 王權을 넘나보고, 君主를 바둑알처럼 주무르고, 强敵이 잇달아 침범해 와서, 백성을 풀베듯이 죽이어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본다.38)


여기에서 高麗王朝의 興盛은 주로 君主의 공적에 돌려지고, 王朝의 衰亡은 주로 臣下의 잘못으로 전가되고 있다. 君主를 중심으로 하여 興亡과 治亂을 인식하는 高麗史의 箋文은 뒤에 살피게 될 高麗史節要의 箋文과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後者는 「君主」보다도 「制度」에 力點을 두고 興亡盛衰를 이해한다는 점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高麗史世家에서 君主와 王室에 대한 稱號를 變改하지 않고 사실대로 直書한 것이나 君主와 王室의 宗敎行事를 거의 빠짐없이 必書한 것, 그리고 太祖王建의 世系를 따로이 첨가한 것 등이 모두 直書主義라는 原則에서 서술된 것이지만 그 근본 의도는 直書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直書를 통해서 君主와 王室의 治績과 권위가 올라가고 그에 따라서 國家의 權威가 높아진다는 점에 있다. 祖宗·太后·太子·節日·制詔등의 칭호는 天子만이 가잘 수 있는 것이요, 圓丘·籍田·燃燈·八關·醮祭등 宗敎行事도 祭天과 관련되는 것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諸侯의 名分에 어긋나는 行事이다. 하늘에 대한 祭祀는 天子만이 거행할 수 있고 諸侯는 自己境內의 山川에 대해서만 제사해야 한다는 것이 儒敎의 祭祀規範이기 때문이다.

37) 進高麗史箋(鄭麟趾等撰) 「惟王氏之肇興自泰封以?起 降羅滅濟 合三韓而保東土 ?革煩苛之政 式俠恢宏遠之規 光朝臨軒策士而儒風稍興 成宗建?立社而治具悉備 宣讓失御 運祚幾傾 顯濟 中興之功 宗祐再定 文闡太平之治 民物咸熙」
38) 同上「(承前)?後嗣之昏迷 有權臣之?恣 擁兵而窺神器 一啓於仁廟之時 犯順而倒大阿 馴致於毅宗之日 由是巨姦迭?煽置君如碁奕 强敵交侵而刈民若草…」


다음에 高麗史卷頭에 王建의 世系를 첨가한 것도 중요한 意義를 가진다. 王建의 世系와 관련된 說話를 金寬毅의 編年通錄이나 閔漬의 編年綱目등과 같은 雜錄에서, 引用소개한 것은 太祖王建의 出自를 聖化하는 의의를 가진다. 또 說話에 내포된 道說의 風水信仰은 王氏가 陰陽五行의 運數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水德의 大數를 따라 등장하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王氏의 등장은 人爲的인 것일 뿐아니라 天地의 大數에 부응하는 超人間的인 運數의 변화로서 이해되고 있다.


물론 世系의 말미에 李齊賢의 論評과 撰史者의 論을 부기하여 이러한 說話가 황당무계한 사실로서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但書가 太祖의 聖化를 전혀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說
話자체를 삭제한 高麗史節要와 비교할 때, 世系의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듯하다. 이것은 李成桂의 出自와 行蹟을 聖化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太祖王建의 建國및 統一과정에 대한 서술도, 開國功臣이나 그 밖의 協?者들의 功勞를 간략히 서술하거나 삭제하고 있다. 예컨대 鹽州의 賊柳矜順의 휘하에 있다가 投降하여 太祖의 開國에 협력한 騎卒泰評에 관한 記事가 高麗史世家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功臣들의 行蹟은 列傳에 상세히 기록되었기 때문에 世家에서는 그 서술이 간략해질 수밖에 없지만 世家만 떼어놓고 본다면 功臣들의 역할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記述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비단 太祖記事에만 국
한되는 것이 아니라, 世家전반의 특색이기도 하다.39)


恭愍王이후 李成桂가 등장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李成桂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李成桂는 단순한 開國功臣의 우두머리로서 보다는 派黨을 초월한 中道的입장에서 항상 大義를 추구하고, 權力을 貪하지 않는 高麗王室의 忠臣이며, 너그럽고 애국적이며 神技에 가까운 武才를 지닌 超人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편, 開國功臣들이나 그와 대립되었던 反革命派人士들은 私黨的인 입장에서 權力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李成桂가 王位에 추대되는 과정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조선왕조의 太祖實錄에 의하면, 開國功臣들이 李成桂를 추대하려는 密議는 이미 위화도 回軍당시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40) 高麗史世家에는 一言半句도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李成桂와 開國功臣은 별로 긴밀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다. 李王朝는 어디까지나 李成桂個人의 超人的인 威德에 의해서 저절로 創業된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

또한 李成桂의 家系와 관련된 記事도 美化로 일관되어 있다. 이미 李成桂의 世系에 대한 聖化작업은 龍飛御天歌에 의해서 마무리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高麗史世家가 서술된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高麗史자체가 李王室을 위하여 편찬되었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그런데 李成桂의 家系와 관련하여 高麗史節要에는 高麗史世家에 없는 사실이 보이고 있다.


예컨대 恭愍王13年正月에 東北面을 寇掠한 女眞人三善·三介에 대하여 高麗史節要에서는 그가 太祖李成桂의 外兄弟임을 밝히고 있다. 즉 度祖의 딸(李成桂의 고모)이 女眞人金方卦에게 시집가서 낳은 이가 三善·三介라
는 것이다.41) 그러나 이러한 記事가 고려사 世家에는 보이지 않고, 韓方信傳에만 보일 뿐이다. 李成桂의 家系를 粉飾하는데 지장을 주는 記事는 世家에서 빼버린 것을 알 수 있다.

39) 一例를 들면 成宗代의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준 崔承老의 時務28條에 대하여 世家에서는 一言半句의 言及도 없다.
40) 太組實錄卷1 總書 恭?王 4年6月條

41) 高麗史節要卷28 恭愍王 13年 春正月條


 

다음에 列傳에서도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君主와 李成桂중심의 예민한 정치감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았다. 列傳에서는 后妃·宗室다음에 功臣傳이 따르는 것이 常例인데, 高麗史列傳에는 功臣傳이 宗室傳 다음에 나오고 있으나, 記事가 매우 소략하여 形式을 갖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李太祖功臣도 別傳을 가진 이가 5名에 지나지 않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또 麗末의 姦臣이 李成桂의 行蹟을 기준으로 分類되었음도 이미 살펴보았다. 高麗史가 君主중심으로 서술된 史書라는 것은 撰史者의 論?을 거의 첨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各王에 대하여 1 則의 論?만을 싣고 있는데 그 論?도 君主를 정면으로 공격하든가 高麗文化를 예리하게 批判하는 것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개 君主를 비판하더라도 부드럽고 추상적이며, 또 失政의 책임을 君主자신에게 돌리기보다는 臣下의 잘못을 나무라는데 力點을 두는 것들이 대부분이다.42)


高麗史臣의 論?중에서도 君主의 失政을 정면으로 공박한 것은 빼버렸다. 이것은 高麗史節要의 論?과 비교할 때 분명한 증거가 드러난다.


高麗史가 그 體裁에 있어서 紀傳體正史를 따르면서 史記·兩漢書·元史·三國史記등의 體制를 잡다하게 절충한 것은 君主中心史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北宋司馬光의 資治通鑑이나 南宋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은 기본적으
로 君主의 監修下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撰者자신의 自由意志로 씌어진 것이며 臣下의 입장에서 君主에게 戒鑑하기 위한 史書인 것이다. 뿐 아니라 宋學의 政治思想은 君權보다도 臣下의 自律性을 존중하는 성격을 갖는 까닭에, 君主專制權을 지지하는 漢唐儒學과 다르다.

 

高麗史가 이러한 通鑑·綱目體를 따르지 않고 漢唐유학과 연결된 正史體를 따랐다는 것 자체가 朱子學的政治理念에 대한 反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君主(世宗)자신이 高麗史편찬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도 朱子學的編史原則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다.


요컨대 高麗史의 가장 큰 특색의 하나는 君主의 權威를 강화하고, 君主의 專制權을 높이며, 그것을 통해서 君主와 백성을 직접 연결하려는 목적의식이 반영된 史書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현실적으로 李王室의 영구한 정치적 안정에 대한 강력한 希求의 반영일 수도 있으며 또 世宗자신의 안정된 王權의 投影일 수도 있는 것이다.

 

41) 高麗史節要卷28 恭愍王13年春正月條
42) 邊太燮「高麗史·高麗史節要의 史論」(史叢21.22合輯號, 1978) p.126참조.


 

(나) 文化意識의 성격

 

高麗史에 반영된 文化意識은 高麗史의 體裁와 引用資料, ?述내용 그리고 撰史者들의 一般文化活動의 성격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高麗史의 體裁가 官撰·正史體를 따르고, 兩漢書. 元史·三國史記의 體裁를 절충하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朱子學的歷史?述방식과 다른 점이다.
물론 高麗史완성이전에 이미 資治通鑑이나 通鑑綱目에 대한 理解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나43) 高麗史는 通鑑類의 體裁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高麗史에 反映된 文化의식은 기본적으로 朱子學的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高麗史편찬에 引用된 資料들도 소위 諸家의 雜記또는 雜錄이 많다. 이러한 雜記類들은 그 思想기 반이 民間信仰이라든가 風水思想·道敎·佛敎등과 연결된 것들로서 儒敎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異端的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異端的자료들을 가지고 世系·志·世家·列傳등을 편찬하는데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高麗史의 내용이 풍부해질 수 있고, 資料集의 구실을 크게 가질 수가 있었다. 물론 雜記의 기록을 모두 信奉한다는 입장에서 雜記를 참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雜錄을 철저히 不信한다는 입장도 아니다. 異端文化를 철저히 不信하는 입장에 있었다면, 王建의 世系를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歷代諸王의 수많은 異端的宗敎行事에 대하여 批判이 가해졌을 것이다.
또 列傳에 있어서도 李資玄.韓惟漢등과 같은 道家流를 諸臣傳에 넣고, 風水家·畵家·醫人·占卜人등을 方技傳에 넣어준 것도 異端·雜流人에 대한 포용적 태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高麗史의 各志도 異端文化를 적지 아니 정리해주고 있다. 禮志에서 醮祭·山岳숭배·箕子와 東明에 대한 信仰등 雜祀를 소개한 것이라든가, 樂志에서 三國과 고려의 俗樂을 소개한 것, 그리고 地理志에서 각 지방에 얽힌 傳說·土俗信仰등을 자세히 수록한 것 등이 그것이다. 특히 梁誠之가 쓴 地理志는 古記·三韓會土記·道詵松岳明堂記·英州記·三國遺事·諺傳·世傳·道詵密記등을 인용하여 각 지방의 土俗信仰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注目을 끈다. 예컨대 名山大川의 古代神祠를 비롯하여, 摩利山의 檀君祭天壇(塹星壇), 傳燈山의 三?城說話, 文化縣의 九月山·??坪·三聖祠, 鹽州의 氈城(古代祭天壇), 耽羅의 三神說話, 金海의 首露王說話와 招賢臺의 ?始仙人설화, 平壤의 朝天石설화 등이 그 대표적인 例이다. 말하자면 중요한 民族信仰과 그와 연관된 神話·傳說을 거의 빠짐없이 수록하여 高麗史地理志로 하여금 人文地理的인 성격을 강하게 띄게 하고 있으며, 國土에 대한 인식을 民族自覺의 次元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地理志序文은 撰者의 文化意識을 집약적으로 反映하고 있다. 이 序文은 우리나라가 본래 「幅員의 넓이가 萬里」라는 것을 전제하고, 고려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서 三韓을 統一하고, 마침내는 580餘州郡을 포용하는 大國으로 발전했음을 자부하고 있다.44) 그리하여 高麗의 강역은 西北쪽으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高句麗의 영토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東北쪽으로는 先春嶺을 경계로 하여 고구려 영토를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다. 先
春嶺에 대해서는 地理志東界條에서 尹瓘이 쌓은 九城中公?鎭에 있음을 밝히고, 公?鎭의 소재는 蘇下江邊또는 白頭山東北에 있다는 說을 引用하고 있다.45)

 

따라서 高麗는 文化的으로나 領土에 있어서나 古朝鮮―高句麗로 이어지는 古代國家의 후계자로서 인식되고 있다.

 

43) 世宗代에는 資治通鑑과 資治通鑑網目에 대한 訓義本율 낼 정도로 兩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

44) 高麗史地理志序文「惟我海東 三面阻海 一隅連陸 幅員之廣 幾於萬里 高麗太祖 興於高句麗之地 降羅滅濟 定都開京 三韓之地 歸于一統…其所管州郡共五百八十餘…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 不及高句麗而東北過之」

45) 先春嶺의 위치에 대해서는 龍飛御天歌에서도 豆滿江東北700里라고 말하고, 이 碑文에 高慶의 境界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高麗와 高句麗를 연계시키려는 의식은 世家의 太祖관계기사에서도 나타난다. 太祖世家의 말미에 李齊賢의 ?을 수록하여, 太祖가 「西都(平壤)에 屢行하고 北鄙를 親巡한 것은 東明舊壤을 吾家의 靑氈으로 席卷해 가지려는 뜻」이었다고 찬양한 것이나, 太祖8年에 渤海遺民이 고려에 來附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渤海가 高句麗人大祚榮에 의해서 건국되고 扶餘.肅愼등 十餘國을 幷合하여 5천여 리의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文字와 禮樂을 가진 나라임을 들어서 高麗와 「與國」임을 천명한 것이 그 例라 하겠다.46)


太祖의 건국을 단순히 王朝의 新創으로 이해하지 않고 「三韓統一」로 이해하는 것도, 말하자면 고려건국을 民族統合의 次元에서 이해한 것을 의미한다.
즉 고려는 가까이는 高句麗를 承繼한 국가이지만 멀리는 古朝鮮·三韓·扶餘·肅愼·渤海·新羅·百濟등 「韓」民族전체의 歷史와 文化와 領土를 계승한 者로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47)

 

그러므로 高麗史가 古代文化전통과 관련되는 온갖 異端文化를 비교적 폭넓게 받아들여 高麗文化의 史實的再現에 힘쓰고 있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그러한 異端文化를 통해서 民族的傳統을 承繼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異端文化에 깊이 浸潤되어 있는 基層社會를 포용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전자는 縱的인 의미를 갖는 것이고, 後者는 橫的인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하자면 종적으로 民族的전통을 승계하려는 의식은 횡적으로 그 民族的전통을 保持하고 내려온 基層社會와 국가권력이 연결되려는 意志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46) 高麗史世家卷1 太祖8年秋9月條
47) 高麗建國을 三韓統一로 표현할 때의 三韓은 馬轉·辰韓·弁轉의 세 國家나, 또는 그 地域에서 건국된 三國을 가리키는 것이기보다는 李承休의 「帝王韻記」와 世宗代權?가 지은 「東國世年歌」에서의 三韓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三韓은 檀君의 後裔들이 漢四郡지배하에서 相聚自保하여 결집된 세 개의 커다란 民族的政治세력인 동시에 그들이 領有하고 있던 領土를 가리킨다. 三韓중에는 70餘國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扶餘·沸流등이며, 그밖에 尸羅·高禮·沃沮·濊貊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三韓은 三國遺事나 權近의 東國史略등에서 말하는 三韓과는 성격이 다르다. 후자의 三韓은 馬韓을 箕子朝?의 후예로, 辰韓율 秦之亡人으로, 弁韓을 不知始祖로 이해하여 이를 民族的인 정치세력으로 보지 않는다. 高麗史에서 말하는 三韓은 世宗代의 歷史인식의 성격으로 미루어 帝王韻記나 東國世年歌의 三韓개념을 따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따라서 三國?一은 전민족의 통일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韓永愚, 前揭論文. pp.21∼24 참조)


 

高麗史가 古代的傳統文化, 現在의 基層文化를 포용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復古的인 意味를 갖는 것은 아니다. 文化의 中核은 어디까지나 儒敎에 두고 있는 것이지 古代文化·基層文化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古代文化·基層文化는 低級文化로서 이해되고, 儒敎는 高級文化로서 이해되고 있다. 다만, 그 儒敎는 單一王朝내지는 單一學派的思想體系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原始儒敎에서부터 漢·唐·宋·元에 이르기까지의 歷代儒敎를 절충한 것이고, 中國儒敎의 韓國的展開로서의 高麗儒敎까지를 합친 것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이나 綱目類의 儒敎的歷史인식은 高麗史에 반영된 儒敎的역사인식의 一部는 이루고 있으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通鑑·綱目流의 歷史 서술은 한 시대 또는 한 學派의 입장에서 내세운 名分을 극도로 존중하는 까닭에, 그 名分을 다 받아들이는 경우에 君主의 입장에서, 그리고 民族的 傳統의 승계라는 입장에서의 高麗史서술은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高麗史가 王紀를 世家라고 하여 名分을 바르게 한다고 밝힌 것은, 더 많은 名分의 파괴를 캄푸라지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高麗史가 世家라는 표현마저 거부하였다면 현실적으로 事大關係로 맺어지고 있는 國際秩序에의 귀속을 거부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는 東아시아世界의 國際秩序가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中國(宋)이 東아시아世界의 宗主權을 制度的으로 확립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高麗는 天子의 칭호를 사용해도 그것이 事大朝貢關係의 규범에 현실적으로 크게 저촉되지 않았다. 그러나 明이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明은 최초로 東아시아世界에 있어서 事大朝貢관계를 制度로서 확립하
였다. 주변 국가의 國王에 대한 任命狀과 國璽의 수여, 中國年號의 사용, 朝貢무역, 天子의 칭호에 대한 금지 등이 制度化되었다. 그리하여 中學과의 交涉을 원하는 국가는 일단 그러한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조선·베트남·유구·日本·캄보디아·샴 등 동아시아 각국이 모두 이러한 조건을 수락하여 새로운 東아시아世界秩序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조가 새로운 국제질서에 順應·귀속된 이상 事大朝貢의 일반적·보편적 규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制約이 高麗史편찬에 있어서 世家라는 名分의 양보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두 시대의 國際的與件의 변화를 무시하고, 金富軾의 三國史記가 王紀를 本紀로 적었다 해서 高麗史보다 더 主體的이라고 한다든가, 李朝국가가 전반적으로 고려국가보다 더 事大主義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一面的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王朝가 얼마나 主體的이었느냐의 문제는 外形的名分의 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自己民族의 傳統을 이해하면서 民族的自我를 발견하고, 내부적으로 社會各層을 포용·통합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高麗史에 反映된 文化意識은 보다 포용적인 社會意識과 民族意識의 기반 위에 成立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Ⅳ. 高麗史節要의 歷史認識

 

1. 高麗史節要의 本文

 

高麗史節要는 金宗瑞를 위시하여 28名의 修史官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28名중에서 高麗史편찬에 참여했던 人物은 21名이나 된다.48) 李季甸·金孟獻·金漢啓·金?·李翊·李尹仁·尹子榮등 7人만이 高麗史節要편찬에 처음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고려사절요 편찬의 핵심 멤버는 아니다. 고려사
편찬의 監修를 맡았던 金宗瑞·鄭麟趾·許?·李先齊·辛碩祖등이 고려사절요편찬에 있어서도 上位修史官으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修史官의 人的構成만으로 보아서는 兩書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


고려사절요는 또한 高麗史의 體裁上의 단점, 즉 내용이 너무 煩雜하여 觀覽에 불편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간결한 編年證를 쓰게 되었다고 편찬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로써 생각하면 두 史書는 體裁上의 차이 이외에 歷史意識上의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기도 하다. 그러나 두 史書의 내용을 자세히 비교 검토해보면, 修史의 취지와 歷史意識의 성격이 상당히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高麗史節要는 君主의 干?을 받지 않고 쓰여졌다는 점에서 편찬과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高麗史는 修史의 「大義를 모두 聖裁에 ?」하였다고 분명히 箋文에서 밝히고 있어서 修史官의 自意가 크게 제약된 史書
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高麗史節要는 단순히 王命에 의해서 편찬했다고만 말하여, 修史과정에 君主의 干?을 받음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高麗史보다는 高麗史節要가 修史官의 自意가 많이 반영된 史書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49) 高麗史가 世宗의 입장을 크게 반영한 史書라면, 高麗史節要는 修史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投影시킨 史書라 할 것이다.


太祖이후 高麗史편찬과정에 대한 서술도 두 史書의 표현이 약간 다르다. 高麗史의 箋文에서는

 

「我太祖康獻大王 勇智天錫 德業日新 布聖武而亨屯艱 克綏黎庶 握 貞符而 乘軋御 肇造邦家 顧麗社雖已丘墟 其史策不可蕪沒 <첨자>命? 史? 氏? 而? 秉?筆? </첨자>倣通鑑之編年 及太宗之繼承 委輔臣以?校 作者非一 書竟未成」

 

이라 하여 太祖의 ?業功績을 길게 찬양한 다음에 史氏에게 命하여 筆을 잡게 하였으며, 太宗이 이를 輔臣에게 맡겨서 ?校케 하였으나 作者가 순수하지 못하여 완성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한편, 高麗史節要에서는

 

「太祖康?大王 首命輔臣 纂修麗史 太宗恭定大王 又命?正謬誤而 竟未就?」


라 하여 太祖의 功績을 전혀 기술하지 않을 뿐 아니라 輔臣에게 命하여 麗史를 纂修케 하였으며 太宗이 이를 ?正케 하였으나 완성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太祖때의 撰者를 고려사에서는 「史氏」라고 格을 낮추어 쓰고 있으나 고려사절요에서는 「輔臣」이라고 格을 높여서 호칭하고 있다. 즉 鄭道傳에 대한 표현을 두 史書가 달리할 뿐 아니라, 太祖의 功績에 대한 서술도 두 史書가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史書의 서술태도에서도 君主를 높이려는 입장과 臣下(撰史者)를 높이려는 입장이 미묘하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高麗史節要는 그 箋文에서 撰史의 目的이 君主의 資治에 있음을 명백히하고 있다. 즉 이 ?의 主讀者는 君主이며, 君主의 治道를 돕기 위하여 勸善懲惡의 가치평가에 注力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凡例에서도 그와 같은 취지를 설명하여 「治亂·興亡에 관계되는 일로서 可監·可戒할 것은 모두 參錄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正史에 있으므로 생략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사절요는 어디까지나 敎訓을 목적으로 한 史書이며, 그 敎訓은 撰史者자신들이 만들어서 君主에게 요청하는 敎訓이지, 君主가 만들어서 臣民에게 가르치는 敎訓이 아니다.

 

48) 兩書의 修史官의 名單은 다음과 같다.
○ 兩書에 모두 參與한 修史官(21 名)
金宗瑞·鄭麟址·李先齊·辛碩祖·申叔舟·金禮蒙·梁誠之·李芮·金之慶·金閏福·李克堪·尹起堪·朴允貞.洪禹治·李孝長·金孝宇·金勇·韓瑞鳳·許?·朴彭年·柳誠源(밑줄친 人物은 修史官명단에서 누락된 者)
○ 高麗史修撰에만 참여한 修史官(15名)
金?·鄭昌孫·崔恒·盧叔仝·李石亨·崔德之·魚孝擔·金淳·金命中·趙瑾·芮承錫·李仁全·柳子文·吳伯昌·尹子雲
○ 高麗史節要修撰에만 참여한 修史官(7名)
李季甸·金孟獻·金?·李?·李尹仁·尹子榮·金漢啓

49) 高麗史節要는 金宗瑞의 건의를 文宗이 허락하여 편찬이 착수된 것이고, 修史과정에 文宗이 간여했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또 文宗은 修史에 간여할 뜻이 있다 하더라도 金宗瑞를 견제할 만큼 王權이 안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때는 이미 議政府署事制가 부활되어 宰相權이 강화되어 있었고, 王權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렇듯 高麗史節要는 처음부터 臣下의 입장에서 君主를 敎訓하기 위한 史書로서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記事의 取捨선택이나 事實에 대한 評價가 高麗史와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高麗史節要는 高麗史의 내용을 간추리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高麗史에서 누락된 새로운 記事들을 많이 ?集하여 補充하였다. 箋文에 의하면 「事跡之關於世敎者 制度之可爲矜式者」를 ?集했다는 것이며, 凡例에 의하면 「事有關於治亂興亡 可監可戒者」를 悉錄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世敎와 制度에 관련된 사건들로서 監戒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기사들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凡例에서는 編史의 구체적인 原則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宗·陛下·太子와 같은 稱號는 名分에 어그러지지만 그대로 直書한다는 것. 이 原則은 高麗史와 하등 다를 것이 없으며 事大名分에 크게 구애되지 않으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둘째, 朝會와 祭祀를 기록한다는 것. 이것도 高麗史와 다르지 않다.


셋째, 君主의 寺院遊幸과 受菩薩戒·設道場·飯僧과 같은 宗敎行事를 기록한다는 것. 그러나 高麗史와 비교할 때 이 분야에 관한 記錄은 매우 疎略한 것이 注目된다. 君主의 宗敎行事를 되도록 적게 기록하려는 의도가 엿 보인다. 다만, 飯僧으로서 鉅萬을 虛費한 사례는 「必書」하여 君主의 종교행사가 가져온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넷째, 上國과의 使臣往來기사를 「必書」하여 中國을 높인다는 것. 이 原則도 高麗史와 다르지 않으나, 高麗史가 宋·金·遼등 各國과의 使臣往來를 골고루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高麗史節要에서는 記事를 많이 脫落하였다. 또 外交文書(表塞文)도 고려사는 全文을 게재하고 있으나, 고려사절요에서는 全文을 완전히 빼버리거나 또는 그 一部만을 게재하고 있다.


다섯째, 災異는 작은 것이라도 「必書」하여 天譴을 삼가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災異에 관한 記事는 高麗史世家보다 많다. 高麗史에서는 天文志와 五行志에 災異에 관한 기사를 주로 실었기 때문에 世家에는 간략하게 취급되었다. 원래 災異는 君主의 失政에 대한 하늘의 譴責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君主가 가장 꺼려하는 일의 하나이며, 신하는 도리어 그것을 이용하여 君主의 失政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高麗史편찬 과정에서 世宗은 상세한 歷史?述을 주장하면서도 災異에 관한 事件을 지나치게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은 도리어 反對하는 입장을 취하였다.50) 이것이 高麗史世家에서 災異기록이 소략해진 이유이다.


여섯째, 고려사절요는 君主의 遊田(사냥)과 宴樂을「必書」하여 逸豫를 경계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관계 기사는 고려사보다도 자세하다.


일곱째, 大臣의 封拜와 罷免, 賢士의 出處는 처음과 끝을 모두 적고, 章疏로서 중요한 意義를 갖는 것은 모두 기록한다고 하였다. 사실 이 點이 고려사절요의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高麗史에서는 君主의 詔勒은 全文을 게재하였으나 臣下의 章疏는 대부분 列傳에 수록하였기 때문에 世家에는 중요한 章疏의 요지만을 간략하게 기록하였을 뿐이다. 이에 反하여 高麗史節要는 君主의 敎旨는 도리어 간략하게 서술하고 臣下의 章疏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麗末改革派儒臣들의 上疏는 全文을 빠짐없이 수록하여, 高麗史世家에서 그들의 上疏文을 거의 삭제해 버린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上疏文이 게재된 고려사절요의 麗末政治史서술은 고려사보다 훨씬 生動感을 줄 뿐 아니라 改革派儒臣들의 活動狀이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됨에 따라 李成桂의 英雄的인 이미지는 훨씬 퇴락되어 질 수밖에 없다.

 

이 밖에 凡例에서는 言及하지 않았으나 高麗史에 누락된 것으로서 高麗史節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許多하다. 예컨대, ① 築城·把截官·站夫와 같은 國防관계 기사 ② 科擧·學校·書籍등에 관련된 記事③ 身分制度 및 土地制度와 관련된 記事51) ④ 斥佛運動과 관련되는 記事등이 그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儒敎理念과 관련되는 制度와 政策에 관한 記事를 보완하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이다.


高麗史節要가 君主의 治績보다는 官僚중심의 政治制度에 역점을 두고 고려사를 서술하려는 입장은 箋文에서 高麗一代의 歷史를 槪觀한데서도 반영되고 있다. 즉 고려사의 箋文이 君主의 治績을 중심으로 고려 前期의 歷史를 긍정적으로 評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려사절요에서는 君主의 治績은 한마디 도 言及함이 없이 오직 郊社·章程·學校·科擧·中書省·按廉使·府衛制度·田柴科制度등이 원만하게 운영된데서 民物이 殷阜하고 太平의 治가 융성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52) 高麗史節要의 本文에서 注力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과 箋文의 槪觀그리고 凡例에서 제시한 項目이 서로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50) 世宗實錄卷8 世宗2年5月乙未條
「視事經筵 卞季良錄高麗史災異以進 上曰 前後漢書所載災異 朱子於網目 不盡載 今?校 不必加錄也」

51) 예컨대 高麗史에는 光宗代의 奴婢按檢法실시에 관한 記事가 탈락되었으나 高親史節要에는 수록되어 있다.
52) 進高麗史節要箋(金宗瑞등 撰).
「奧惟高麗於唐季 以雄武而?群兇 以寬大而得衆心 遂建大業 以裕後昆 ?夫立郊社定章程·興學校·設科擧·置中書總機務而體?有所繫 遣廉使察州縣而貪汚不敢肆 府衛之制 得窩兵於 農之法 田柴之科 有仕者世祿之意 刑政擧而品式備 中外寧謐 民物殉阜 大平之治 可謂盛矣」


 

2. 高麗史節要의 史論

 

高麗史節要에는 108則의 論?을 싣고 있다. 高麗史의 33則의 論?과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두 史書의 차이점은 論?에서도 뚜렷이 부각된다. 高麗史의 論?은 李齊賢·崔?·金富軾·金莘夫·金良鏡과 無名의 史臣이 쓴 것인데 高麗史節要에는 高麗史의 論?을 모두 싣고 여기에 李齊賢의 論?가운데서 누락된 것과 金富佾·金富儀·林民庇·翁升旦·權敬中·任?·李衍宗·張沆·許應麟·兪思廉·白文寶·元松壽·金仲?·河寬·安仲?·尹紹宗·河崙·陳子誠·鄭井등 도합 24人의 有名史臣과 이름을 알 수 없는 無名史臣의 史論을 실었다. 24名의 有名史臣이 쓴 史論이 51 則이고 無名史臣이 쓴 史論이 57則이다.53)


有名史臣은 모두 高麗時代의 史臣이고 無名史臣은 여말 또는 鮮初의 史臣인 것 같다. 無名史臣은 정말 이름을 몰라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이름을 알아도 밝히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史臣」이라고 쓴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有名史臣의 史論보다도 無名史臣의 史論이 일반적으로 朱子學的價値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朱子學에 세련된 여말 선초 史臣이라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高麗史가 33則의 史論만을 실은데 반하여 高麗史節要가 108則이나 되는 약 3배나 되는 史論을 실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高麗史가 작은 분량의 王?만을 실은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한王에 대하여 한 篇의 史論(王?)만을 싣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54) 그리하여 한 王에 대하여 여러 史論이 있을 경우에는 그중의 代表的인 것 하나를 골라서 실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유는 高麗君主의 治績을 되도록 批判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있었던 것 같다. 高麗史의 史論들은 대개 君主의 업적을 칭송하거나, 비판하더라도 君主자신을 직접 비판하기보다는 臣下의 잘못을 힐책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55)

53) 邊太燮前揭論文참조
54) 高麗史에서는 禑·昌王을 列傳에 넣었기 때문에 世家에는 이에 대한 論?이 없다. 그 대신 仁宗에 대해서는 例外로 2則의 論贊을 싣고 있다.
55) 예컨대 光宗?에서 王의 信讒·濫刑의 책임을 雙冀의 허물로 돌린다든가 成宗贊에서 契丹侵入때 成宗이 關防을 ?嶺으로 옮기고 곡식을 大同江에 投入하려던 과실을 당시의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對하여 高麗史節要에 새로이 첨가된 史論들은 性格이 많이 다르다.


첫째, 君主의 宗敎行事특히 佛敎行事를 정면으로 비난하는 史論이 많다. 그러한 비난은 太祖王建에 대해서도 퍼부어지고 있다. 즉 太祖2年 3月에 都內에 10寺를 창건하고 兩京의 塔廟를 수리한 사실에 대하여 史論에서는 輕重과 緩急을 헤아리지 못하는 無益한 사업으로 지탄하고 新羅의 速亡이 崇佛에 연유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56) 高麗史의 王?에서도 崇佛에 대한 비판이 간혹 보이고 있으나 創業主인 太祖에 대하여는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고 칭송만 하고 있다.
또 高麗史의 崇佛비판이 주로 佛敎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지적한 것과는 달리 高麗史節要의 그것은 사회 경제적 폐단과 아울러 佛敎思想그 자체의 思想的허구성을 지적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 다르다.57)

고려사절요의 강렬한 反佛的자세는 麗末儒臣들의 斥佛上疏를 빠짐없이 수록한 것과도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58)


둘째로, 君主의 取妻와 服喪그리고 昭穆制등 儒敎的규범에 맞지 않은 점을 지적한 史論이 적지 않다. 예컨대 고려 초기의 同族혼인에 대한 비난이나59) 服喪이 끝나기도 전에 宴樂을 벌인 宣宗에 대한 비난 등이 그것이다.


셋째로 宦侍와 君主의 私人宗戚등의 정치간여를 비난하고 宰相이나 臺諫그리고 史官등이 君主의 非行을 적극 規諫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史論이 많다.


넷째로, 文武一致를 강조하는 史論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예컨대 毅宗 24年에 鄭仲夫亂이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高宗代史臣인 兪升旦의 史論을 引用하여 「文武를 左右의 손처럼 생각하고 彼此의 경중을 두지 않았으면
武臣亂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恭愍王15年에 鷹揚軍上護軍金元命이 市北街에 도랑을 파서 武盛文衰를 시도한 사건에 대해서도 尹紹宗의 史論을 빌어서 姜邯?·尹瓘·金富軾·趙?등 名將이 모두 文臣이었음을 例로 들면서 文臣이 武를 겸비하는 것이 정상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文人이 武人을 천시하고 압도하는 것도 반대하고 반대로 武人이 文人을 압도하여 擅政하는 것도 반대하며 文과 武가 左右두 손처럼 평등하거나 文人이 武를 겸비하는 것을 理想으로 보는 것이다. 武를 천시하지 않는 입장은 睿宗에 대한 史論에서 「偃武修文」을 격찬하는 데서도 발견되고 고려사절요의 箋文에서 고려의 건국을 「以雄武而?群兇」이라고 칭송한데서도 보인다.


이러한 文武一致論은 鄭道傳이 그의 經濟文鑑에서 「自古爲國者文以致治武以戡亂兩職如人兩臂不可偏廢」60)라 하여 文과 武를 두 팔에 비유한 것과도 일치되고 있으며, 고려사절요의 主撰者인 金宗瑞자신이 文武를
겸비한 人物이라는 것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56) 高麗史節要卷1 太祖2年3月條의 史論(無名史臣)
57) 예컨대 위의 太祖의 崇佛에 대한 비판에서 「禍福因果之說」에 대한 신앙을 비판한 구절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58) 예를 들면, 鄭道傳·金子粹·金貂·朴紹(成均生員) 등의 斥佛上疏를 빠짐없이 수록하였다. 특히 일개 生員에 지나지 않는 朴紹의 斥佛上疏까지 수록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59) 高麗史節要卷2 惠宗2年條의 史論

60) 鄭道傳 經濟文鑑(下) 衛兵條


 

따라서 史論에 보이는 文武一致論은 단순한 史臣의 의견이라기보다는 高麗國史나 고려사절요 撰史者들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 같다.


고려사에서도 예종의 偃武修文을 칭송한 史論이 있어서 武를 강조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君主의 국방 강화정책을 칭송한 것이지 文臣이 武를 겸비해야 된다는 뜻과는 다르다. 고려사절요의 文武一致論은 군주의 입
장에서의 文武균형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文臣이 武將을 겸비한다는 뜻으로 그것은 곧 文臣이 兵權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실제로 文武一致論을 주장한 鄭道傳이나 金宗瑞가 兵權을 장악했었고 그 때문에 非命으로 죽게 된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려사절요의 史論이 가진 의의는 결코 단순하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 다음 고려사절요의 史論에서는 愛民과 仁政그리고 衆心을 강조한 대목이 적지 않다. 太祖에 대한 史論에서 太祖의 「好生之仁」「恤民之心」「深仁厚澤」을 칭송한 것이나 毅宗에 대한 史論에서 의종의 사치와 勞民
을 비난하고 愛民과 節用을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民을 중요시하는 입장은 箋文에서도 나타나 고려의 건국을 「寬大而得衆心」이라고 표현한데서도 엿보인다.

 

高麗史에서는 太祖의 功業을 주로 三韓統一과 東明舊疆의 수복정책 등 外治에 두고 있는데 反하여 고려사절요에서는 外治와 더불어 內政즉 仁政에서 찾는 점이 대조를 보인다.


요컨대 高麗史節要의 史論의 근본적인 특색은 君主보다도 官僚에게 政治的주도권을 부여하면서 文化的으로는 異端사상을 배척하고 仁政의 統治規範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史論의 취지는 고려사절요의 本文에서 記事를 取捨選擇한 기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史論이 비록 撰史者자신이 직접 쓴 것은 아닐지라도 撰史者들의 主觀的의도에 따라 여러 史臣의 史論을 취사선택하여 실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곧 撰史者들의 歷史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高麗史節要의 本文과 史論그리고 箋文과 凡例에 반영되어 있는 歷史의식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鄭道傳의 政治思想및 그가 편찬한 高麗國史와 일치되는 점이 많다.

 

鄭道傳의 政治思想은 ① 君主의 專制權반대와 宰相權강화 ② 能力本位의 관리선거와 考試制度의 강화 ③ 言論政治의 강화 ④ 文武一致⑤ 富國强兵과 事大外交⑥ 斥佛과 性理學존중 등으로 요약된다.61)

高麗國史도 또한 그 序文에 의하면 ① 正名(尊稱改書) ② 謹禮(朝會와 祭祀) ③ 重其任(宰相의 任命) ④ 重求賢(科學制度) ⑤ 著忠臣(臺諫의 伏閤上疏) ⑥ 尊天王(中國과의 使臣往來) ⑦ 謹天譴(災異) ⑧ 戒逸豫(君主의 遊?과 宴樂)에 치중하여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高麗史節要의 凡例와 거의 비슷하다.62)

다른 점이 있다면 ① 뿐이다. 즉 고려사절요에서는 尊稱을 改書하지 않은 것이 다르다. ?의 분량은 37권과 35권으로 거의 비슷하다.


한편 鄭道傳이 高麗國史에 실은 것으로 보이는 史論이 그의 經濟文鑑別集君道篇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史論이 모두 高麗史節要의 史論과 王代評에 반영되어 있어서 더욱 두 史書의 긴밀성을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高麗史가 鄭道傳의 高麗國史에 대한 對蹠的性格을 많이 가진 것이라면 高麗史節要는 반대 로 高麗國史와 親和性을 크게 가진 史書라는 점이 注目된다.

 

61)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1973) 참조

62) 韓永愚前揭論文p.34 참조


 

Ⅴ. 餘論―두 史書의 共通點

 

지금까지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體裁上의 차이와 歷史意識의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주력하여 왔다. 그리하여 두 史書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君主의 입장과 臣下의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 해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修史의 주도권을 하나는 君主가 장악하고 하나는 臣下가 장악했다는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體裁가 하나는 正史體(紀傳體)요, 하나는 編年體(節要)라는 데서 오는 編制의 차이나 記事의 多寡의 차
이를 의미하는 것만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高麗時代를 이해하는 視角의 차이인 것을 알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君主를 높이려는 입장과 臣下를 높이려는 입장의 차이인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君主中心體制와 宰相中心體制의 갈등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體制의 갈등으로 인하여 두 史書는 頒布과정에서도 심각한 대립을 보이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高麗史節要主撰者인 金宗瑞가 叛逆으로 終身하는 비국까지 몰고 왔던 것이다. 高麗史節要의 母體가 된 高麗國史의 撰者인 鄭道傳이 金宗瑞와 비슷한 終末을 맞이한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史書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史書가 서로 만날 수 있는 共通點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두 史書는 비록 自意와 他意에 의해서 각각 씌어졌다고는 하지만 거의 同一한 撰史者들에 의해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로 共通點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두 史書의 공통점은 成宗代에 편찬된 東國通鑑의 高麗史부분 특히 그 史論과 비교할 때 선명하게 이 해된다. 東國通鑑의 史論은 高麗史節要의 史論이외에 士林派儒臣이 직접 쓴 史論이 많이 첨가되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찬자는 이른바 官學派儒臣들이다.

 

따라서 高麗史·高麗史節要의 史論과 東國通鑑에 실린 士林派의 史論을 비교해 보면 이른바 官學派儒學과 士林派儒學의 차이점 그리고 나아가서 官學派의 歷史인식과 士林派의 歷史인식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官學派儒學의 특색은 程朱學的性理哲學을 수용하면서도 漢唐儒學의 政治사상을 넓게 수용하여 功利와 義埋, 王道와 覇道를 적절히 조화시킨 점에서 찾아진다. 그리하여 仁政을 추구하면서도 富强政策과 領土확장을 지지하고 이와 관련하여 武學과 技術學을 그렇게 賤視하지 않는다. 政治의 理想도 三代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漢唐政治도 중요시하고 唐太宗의 貞觀政要가 정치의 귀감으로 존중되었다. 鄕村自治보다는 강력한 中央集權體
制를 지향하고 國家의 制度와 法律을 중요시한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撰者들은 15세기 官學派儒學의 공통된 기반위에서 高麗文化를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高麗前期文化가 다같이 肯定的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東明舊疆을 수복하려는 太祖의 北進政策이나 尹瓘의 九城役같은 領土擴張정책이 모두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만주大陸에서 영위되었던 古代國家를 중심으로 하여 高麗國家의 歷史的正統性을 정립한 사실
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高麗가 渤海유민을 받아들이고 渤海를 멸망시킨 契丹과 斷交한 사실이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조선초기에 北進政策이 다시 추진되어 太祖代의 攻遼운동이나 世宗代의 六鎭開拓이 이루어진 것도 高麗初期의 北進政策과 마찬가지로 滿洲大陸에서 영위된 古代國家에 대한 歷史的承繼意識을 전제로 하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점은 東國通鑑의 史論이 高麗의 親微海反契丹정책을 비판하고63) 崔瑩의 攻遼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 것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64)

 

63) 太祖의 親渤海反契丹政策에 대하여 東國通鑑卷13 太祖25年條의 史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契丹이 渤海에 대하여 信義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渤海를 위해서 報復한다고 하여 거란의 使臣을 심하게 거절하고 또 海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낙타를 굶어 죽게까지 하였는가. 이는 和親을 끊는 것만이 아니고 원수처럼 된 것이니 그들이 우리를 원수처럼 보복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이 史論에서는 渤海에 대한 同族意識을 찾아 볼 수 없다.
64)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서는 崔瑩의 攻遼를 비판하는 史論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東國通鑑에서는 이를 「逆天去順」의 행위로 규탄하고 또 그의 林堅味·廉興邦의 가족에 대한 投殺을 「不學無術」의 행위로 공격하고 있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는 高麗의 歷代君主들이 唐太宗의 貞觀政要를 정치의 귀감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批判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貞觀政要를 常讀한 光宗이나, 成宗에게 貞觀政要를 진헌한 崔承老가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貞觀政要는 世宗代에도 중요시되어 그 註釋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龍飛御天歌에서도 太祖李成桂의 업적이 자주 唐太宗과 비유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서 注目이 되었던 貞觀政要는 뒤에 東國通鑑에 의해서 비판되고 이에 따라 光宗과 崔承老등이 貝觀政要를 존중한 사실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貞觀政要가 「仁義를 빌어서 功利를 추구하고 德이 不足한 점이 많다」65)는 것이었다. 士林들은 漢唐文化그리고 고려초기 文化가 가진 功利主義的요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義理中心道學中心으로 歷史를 해석하였다.


佛敎에 대해서는 高麗史보다도 高麗史節要가 더 강경한 비판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風水圖讖신앙이 나 八關·燃燈과 같은 民族的宗敎行事에 대해서는 兩書가 모두 비교적 寬容的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高麗와 朝鮮王朝의 건국과 관련된 도참사상은 天運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른바 應天順人의 天命사상으로까지 설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太祖의 訓要十條에 보이는 圖讖신앙에 대해서도 아무런 비판이 가해지지 않고 있다.


이 점도 또한 訓要十條를 비판하고 있는 東國通鑑의 史論과 다른 점이다. 八關·燃燈行事에 대해서도 東國通鑑은 「新羅胡僧의 誕妄之說」이라고 혹평하고 있다.66)


高麗와 元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도 대체로 兩書가 모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元과 舅甥관계를 맺은 元宗의 처사를 兩書는 다같이 「東方의 백성으로 하여금 百年昇平의 樂을 누리게 한 것」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물론 元의 徵求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元의 文化를 夷狄視하고 있지 않으며 對元事大와 對明事大관계를 같은 次元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東國通鑑의 史論에서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즉 元을 자주 「胡元」이라고 불러 夷狄視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민왕 19年에 明이 王과 王妃및 群臣의 衣冠服飾을 바꾸게 한 데 대하여 「우리 東方으로 하여금 胡元의 左?의 풍속을 면하게 하고 禮樂文物을 다시금 彬彬하게 하였다」67)고 칭송하여 元文化보다도 明의 文化를 한층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본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가 對元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中華와 夷狄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華夷思想에 깊이 젖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몽고에 대해서 뿐 아니라 女眞(金)에 대해서도 胡狄이라는 멸칭을 쓰는 것을 반대하는 史論을 싣고 있다.68) 契丹에 대해서도 渤海를 멸망시킨 侵暴性은 비난하고 契丹과 斷交한 太祖의 정책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契丹과의 영구적인 斷交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契丹과의 和好를 성립시킨 靖宗의 정책이 도리어 칭송되고 있음을 본다.69)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對外觀은 中國과 北方民族의 어느 한쪽에 偏重되는 것을 지양하여 어떤 民族이든지 침략성을 드러낼 때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平和的국가관계를 요구해 오는 민족과 事大友好관계를 맺는 것은 保國의 長策으로서 칭송되고 있다. 中華國家라고 해서 더 우리가 事大해야 하고 이른바 夷狄國家라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敵對的이어야 한다는 論理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高麗時代의 對宋·對契丹·對女眞·對元·對明과의 事大관계는 모두가 힘의 强弱에서 오는 불가피한 保國政策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지, 어느나라에 더 屈服的이고 더 自主的인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 진다.
이러한 功利的現實的對外觀은 高麗史臣들의 일관된 태도인 동시에 高麗史와 高麗史節要撰者들 자신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65) 東國通鑑卷13 光宗大成王元年條

66) 同上書卷13 太祖神聖王26年夏4月條
67) 東國通鑑卷49 恭愍王19年5月條
68)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 실려 있는 金富軾의 仁宗?
69)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 실려 있는 李齊賢외 靖宗贊


 

高麗史가 그 體裁에서 일부 元史의 體制를 모방하게 된 것도 元文化를 夷狄視하지 않은 한 가지 증거이며 高麗史와 高麗史節要가 다같이 極端的인 華夷論을 가진 朱子의 綱目體를 따르지 않은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世宗전후시기에 있어서는 遼·金·西夏·蒙古와 같은 소위 夷狄國家의 文化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論議가 있었으니 高麗史및 高麗史節要의 撰者의 一人이기도 했던 梁誠之는 그 대표적인 論者라고 하겠다.70)
中國中心中華民族중심의 華夷的事*사상이 심화된 것은 朱子學에 보다 더 세련된 士林들이 등장한 이후부터이 다. 따라서 事元期의 文化에 대한 비판은 東國通鑑의 史論이 보다 더 강렬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反射的으로 明에 대한 文化的尊崇의 念이 한층 강화된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中國에 대 하여 民族的自覺을 가지려는 노력은 東國通鑑보다 도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쪽이 더 강렬하다고 말할 수 있다.

70) 梁誠之는 遼·金·西夏·몽고 등 소위 夷狄들을 멸시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中國에 同化되지 않고 自己의 固有文化를 保存한 것을 칭찬하였다.(韓永愚「訥齋梁誠之의 社會·政治思想」歷史?育17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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