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楚 莊王, ? ~ 기원전 591년)은 중국 초나라의 제22대 군주(재위: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이다. 이름은 려(侶)이다. 성왕의 손자이자 목왕의 아들이며, 공왕의 아버지이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생애
울지도 날지도 않는 새
아버지 목왕이 죽어서 왕위에 오른 직후 아직 젊은 왕이었기 때문에 왕자 섭(燮)이 모반을 일으켰다. 왕자 섭은 일단 수도와 왕실을 완전하게 지배하여 스스로 왕을 자칭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장왕을 가두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왕자 섭은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초나라의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노(盧)라는 마을에서 살해당했다. 장왕은 풀려나 수도로 돌아왔다.
장왕은 즉위한 후 삼 년 동안 밤낮으로 놀기만 하고, 나라 전체에 영을 내렸다.
“ |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거든 죽여버리겠다. | ” |
어느 날 장왕은 왼쪽에 정나라 여자를, 오른쪽에는 월나라 여자를 껴안고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때 오거(伍擧)가 간언했다.
“ | 수수께끼를 올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 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 ” |
장왕이 대답했다.
“ | 삼 년을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삼 년을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물러가라. 나는 수수께끼를 맞혔다. | ” |
여러 달이 지나고 장왕은 더욱 방탕해졌다. 이에 대부 소종(蘇從)이 간언하니, 장왕이 말했다.
“ | 내가 영을 내렸던 것을 듣지 못했는가? | ” |
소종이 대답했다.
“ | 이 한 몸 죽어 임금을 깨우치는 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 ” |
그러자 장왕은 놀이를 그만두고 정사를 살펴 간신 수백 명을 주살하고 또 수백 명을 등용하였다. 또한 오거와 소종에게 정무를 맡기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 사건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문정경중
국정을 정비한 장왕은 용(庸)나라를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를 압박했고, 영토를 넓히며 패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606년에는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동주의 영토 근처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주나라가 사자로 왕손만(王孫滿)을 보내자 장왕은 그에게 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은 천자의 나라에 대대로 전해지는 9개의 솥을 가리키는 왕권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 무게를 묻는 것은 주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은연 중에 암시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장왕의 속내를 알아차린 왕손만은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이 중요하며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대답했고 이에 장왕은 철군하였다.
절영지연
장왕은 야심한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 때, 장웅(蔣雄)이라는 사람이 장왕의 총희를 껴안았는데 총희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고 장왕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장왕은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갓끈을 끊게 하였고 장웅은 속으로 장왕에게 감사를 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장웅은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러자 장왕이 장웅에게 물었다.
“ | 과인은 너를 그렇게 아낀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 | ” |
장웅은 당시 연회에서의 일을 이야기하여 자신이 그때 총희를 껴안은 자임을 말했다. 너그럽고 여자에게 휘돌리지 않는 훌륭한 군주로서의 장왕의 인격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춘추의 패자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에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필 전투).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무(武)'라는 글자는 무기를 멈추어 쓰고,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하며,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지막 싸움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그 수도 상구(商丘)를 포위했다. 이전에 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기원전 594년 5월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상구를 함락하지 못하여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591년에 장왕은 별세한다.
가정
- 아버지 : 초 목왕
- 형제 : 초 장왕, 공자 영제(公子嬰齊) 자 자중(子重), 공자 측(公子側) 자 자반(子反)
- 아들 : 초 공왕, 공자 곡신(公子穀臣), 공자 정(公子貞) 자 자낭(子囊), 공자 오(公子午) 자 자경(子庚), 공자 추서(公子追舒) 자 자남(子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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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오(孫叔敖, ? ~ ?)는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의 관료이다. 성은 미(羋), 씨는 위(蔿)이며 휘는 오(敖) 또는 애렵(艾獵)이고 자는 손숙(孫叔)이다. 위고(蔿賈)의 아들이며, 위오(蔿敖) 또는 위애렵(蔿艾獵)이라고도 한다.
사적
머리가 둘 달린 뱀
어느 날, 어린 손숙오는 놀러 나갔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발견하였다. 손숙오는 뱀을 죽이고 땅에 묻은 다음 집에 돌아가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이렇게 말하였다.
“ |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하던데, 제가 그 뱀을 보고 말았으니 어머니와 헤어질까 두렵습니다. | ” |
어머니가 뱀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손숙오는 다른 사람이 볼까봐 죽이고 땅에 묻었다고 답하였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 | 남몰래 착한 일을 한 사람은 하늘이 복을 내려준다고 하니, 너는 죽지 않을 거란다. | ” |
어진 정치
손숙오는 장왕 때 영윤(令尹; 초나라의 재상) 우구자의 천거로 후임 영윤이 되었다. 백성을 교화시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정치는 느슨하였지만 간신도 도둑도 생기지 않았다. 진(晉)나라의 사회(士會)는 손숙오의 치세를 크게 칭송하였다.
어느 날, 장왕이 화폐가 가볍다고 생각하여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백성은 이를 불편하게 여겨 쓰지를 않았고, 시령(市令;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이 이를 손숙오에게 보고하였다. 손숙오는 장왕에게 간언하였다.
“ | 전날 화폐를 바꾼 것은 이전 화폐가 가볍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령이 보고하기를 시장이 혼란해져 백성은 편안히 있을 곳이 없고 장사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결정할 수가 없다고 하니, 예전으로 돌려주십시오. | ” |
장왕은 이를 허락하였고, 명령을 내린 지 사흘 만에 시장은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초나라 백성은 습속이 비거(庳車; 수레바퀴가 작고 낮은 수레)를 좋아하였는데, 장왕은 비거는 말이 끌기에 불편하다고 여겨 법령을 내려 이것을 높이려 하니, 손숙오가 간언하였다.
“ | 법령을 자주 내리면 백성은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되므로 좋지 않습니다. 왕께서 꼭 수레를 높이고자 하신다면, 그 마을의 문지방을 높이도록 하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은 모두 군자이고, 군자는 자주 수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 ” |
장왕이 이를 허락하니, 반 년이 지나 백성은 모두 자발적으로 수레를 높였다.
사후
손숙오는 죽기 전에 아들 위자빙(蔿子馮)에게 말하였다.
“ | 내가 죽으면 왕께서는 많은 영지를 내려주실 테지만, 너는 침구(寢丘)[1] 땅만 받도록 하거라. | ” |
과연 손숙오가 죽으니, 장왕은 손숙오의 공을 기려 많은 상을 내려주려 하였다. 위자빙은 손숙오의 말대로 침구만 받았고, 이후 영윤이 되었다.
훗날 초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침구는 너무 토지가 척박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탐내지 않아 손숙오의 집안은 항상 정쟁을 피할 수 있었다. 또 초나라가 오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을 때, 침구는 땅의 이름이 불길하였기 때문에 오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손숙오의 자손은 크게 번성하였다.
출전
- 춘추시대 패자였던 초장왕의 명신, 춘추시대 초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명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초장왕을 춘추오패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손숙은 그의 자인데, 춘추시대의 습관 중 하나가 자+휘로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손숙오도 그 예이다.
본래 이름은 위오蔿敖로 위씨(한자 표기는 蔿=薳 두 가지로 하는데, 薳은 '원'으로도 읽히기에 원씨라고 읽기도 한다)는 초왕 분모 이후로 대대로 유력 세경가 중 하나였다.[1]
그러나 초장왕이 왕위에 오르고, 당시 영윤이었던 투월초의 세력이 줄자, 이에 불만은 품은 투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군 총 책임자였던 사마 위가[2]를 가장 먼저 제거하자 위오는 도성을 탈출해 살아남았다.
투월초의 반란이 진압되고 초장왕이 나라를 안정시킬 인재를 뽑았을때 당시 영윤(초나라 재상의 호칭)이었던 우구가 천거하여 영윤자리에 올랐다.[3]
그가 세운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토지 개간과 화폐 개혁이 있다.
토지 개간은 내전으로 황폐화된 도읍 영성(삼국지로 치면 강릉)의 농지를 복구하고 땅을 다듬어 민생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화폐개혁은 그간 무거웠던 화폐를 경량화시켜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형주지역[4]의 교통까지 자연스레 활발하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하였다.[5]
이를 두고 초장왕이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었고, 초성왕에게 자문[6]이 있었듯이 내게는 손숙오가 있도다."라고 할 정도. 게다가 제환공과 초성왕을 본받아 초장왕도 초나라 사람이면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군사적 능력으로는 정치적 능력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는지 진晉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인 필邲의 전투에서는 일개 장수였던 오삼에게 일등공신 자리를 내준다. 어쩐지 제갈량이 생각나는 대목.[7]
후에 죽을 때는 그릇 하나 성한 것이 없고, 또한 가진 재산이 없어 집이 깨끗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생긴 단어가 청빈. 또한 위씨 집안의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인 손안에게 물려주지 않고 철저히 능력 위주로 물려줘 조카 위빙에게 물려주었으며 이 일로 초장왕은 그를 잃은 것을 더욱 애달퍼하였다. 사서마다 민간에 전해지는 내용이 각자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궁중배우 우맹이 손숙오의 아들이 비천한 삶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8]
[1] 당시 세경가는 자국 왕공족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초나라는 그 경향이 아주 심했다. 가장 대표적인 춘추시대 초나라 세경가인 투씨, 성씨, 굴씨, 위씨, 전국시대 세경가인 굴씨(앞의 굴씨 맞다), 소씨, 경씨 모두 그 뿌리를 초나라 왕실에 두고 있다.[2] 손숙오의 아버지[3] 손숙오가 침沈 땅에 은거하고 있을 시절 머리가 2개인 뱀(양두사)를 보고 죽여서 음덕을 세워 영윤에 올랐다는 민간이야기가 여기에서 전해진다.[4] 주나라 기준에서의 천하 9주를 말한다.[5] 사마천의 사기에서 둔리열전에 따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6] 관중과 나란히 비견되는 인물로 초성왕 시절의 명신이다. 이름은 투곡오도며, 뜻은 호랑이 젖을 먹은 사람이란 뜻으로 역사서마다 곡어토, 누오토 등으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7] 좌전에서는 손숙오가 영윤이 되자 영전令典이 바로잡혔다고 기술할 정도[8] 역사가들이 각자 다른 버전의 민간전승을 채택해서 기술하였기 때문에 이야기의 차이가 존재한다.[나무 위키] -
- [출처:정보-책 3권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수집-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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