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존경하고 한비자가 흠모했던 인물이 있다. 정나라의 재상 자산(子産) 공손교(公孫僑)이다. 자산은 탁월한 리더십과 처세술로 작고 힘없는 정나라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엄격함과 너그러움을 혼용한 공평한 정책으로 한 치의 어긋남과 사심 없이 국가와 백성만을 생각했던 그는 2500여 년 전에 ‘여론의 중요성’, ‘법과 예의 효과’를 알았던 시대의 리더이다.
기원전 770년 천자국 주나라가 낙읍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후 진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 전 220년까지, 약 550년의 기간을 역사는 춘추전국시대라 부른다. 춘추시대는 수많은 제후국의 탄생과 소멸, 합종연횡과 책략이 범람했던 시기이다. 중국사에 기록된 영웅과 사상가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정 鄭나라’가 있었다. 위치는 중국의 한복판으로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정나라 왕실은 주나라 황실과 같은 희 姬 씨 제후국으로 나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정나라는 작고 힘없는 전형적인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정나라는 건국 이후 무려 33차례나 침략을 당했다. 그러나 정나라에도 전성기는 있었다. 정 목공이 그 주인공이다. 목공은 탁월한 리더십과 외교력으로 한때 춘추패자의 위치까지 넘보았다. 하지만 정 목공이 재위 10년 만에 죽자 정나라는 다시 춘추시대의 ‘호구’로 전락했다. 위로는 강대한 진 晉나라가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떠오르는 신흥 강국 초 楚나라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였다.
기원전 585년, 정나라에서 공손교가 태어났다. 그는 자가 ‘자산’이라 역사서에서는 자산이란 호칭한다. 그의 집안은 귀족이었다. 정 목공의 직계로 정나라 ‘6대 귀족’ 즉 공손 첩 자이, 공손 채 자교, 공손 사지 자전, 공자 비 자사, 공자 발 자국, 공자 가 자공 중 한 사람인 자국의 아들이었다. 정 목공 사후 후계를 이은 성공 치세에서는 자사와 자한이 정나라를 이끌었다. 자산의 아버지 자국은 자사의 측근으로 전쟁이 벌어지면 출정을 했고 자산은 이 무렵부터 아버지인 자국을 따라 전쟁터를 경험했다.
자산은 열 살 때 이미 군사회의에 참석해 탁월한 전황 파악으로 책사 같은 계책을 선보여 아버지를 비롯해 정나라 대신 및 장군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자산이 어려서부터 군사, 천문, 주역, 법가의 학문을 익힌 덕분이었다. 성공 사후 다섯 살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간공이다. 인내심 강하고 능력 있던 간공은 무려 36년 간 재위했다.
당시 정나라는 6대 귀족 가문의 내분과 진, 초나라의 압박, 도둑의 창궐 등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라로, 이때 귀족 가문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귀족 공손흑이 대부 양소를 사적인 원한으로 살해하면서 내란이 벌어지자 자산은 귀족 자피의 후원을 얻어 이 내란을 수습했다. 그리고 자산은 중앙정치의 핵으로 부상했다. 귀족 가문들은 자산을 잠정적으로 재상 즉 ‘정경 正卿’으로 내세운다. 이때가 기원전 543년이다. 하지만 자산은 누군가의 허수아비 노릇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를 시작한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정나라가 강대국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업신여기지 않는 강소국으로 만들고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국강병이었다.
자산은 지극힌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의 근본은 법가이다. 법가는 엄격한 법으로 백성을 통치하고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불같은 정치 사상이다. 하지만 당시 자산의 시대에는 인의와 예를 중시하는 ‘인치 人治’의 시대였다. 자산은 정나라의 국력이 과연 어느 정도이고, 백성의 삶은 어떤 수준인지 분석했다. 그리고 국정 목표를 정했다.
‘우선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자산은 비대해진 왕족과 귀족 등 기득권층의 권력과 권한을 축소했다. 그는 기원 전 536년에 중국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했다. ‘형정 刑鼎’을 만들어 법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토대로 모든 법률을 집행했다. 즉 정치를 도덕에서 분리하면서 인치에서 ‘법치 法治’로 국가의 통치 시스템을 정비한 것이다. 또한 토지는 경작하는 실질적인 농부에게 나누어주고, 농지의 계량화와 개간을 통해 생산량 증대를 꾀했다. 또한 신분에 따라 의복과 마차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계급제도도 실시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국가의 틀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귀족들의 과다한 토지 보유로 인한 부의 편중, 신분과 빈부에 관계없이 만연된 사치풍조를 잡기 위한 자산의 ‘히든 카드’였다. 국가 즉 중앙정부의 권한이 확대되고 생산량이 예측 가능해지면서 자산의 통치 이념은 하층민에게까지 골고루 전달되었다.
처음에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대개 관습적으로 넘어가던 것도 법에 따라 처벌 대상이 되는 등 불편이 가중되자 백성들의 원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권력과 부의 독점을 빼앗긴 귀족 계급의 저항이 거셌다. 하지만 자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속적인 정책의 집행과 감시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관리들에게 엄정히 그리고 공평하게 물었다. 오죽하면 ‘자산이 빨리 죽기를 원하다’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당시 자산의 정책은 정나라의 근간을 뒤집는 ‘국가 개조 사업’이었다. 이렇게 3년이 지나자 정나라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차츰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법은 결코 불편한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국력 또한 신장되었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시기의 정나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자산이 재상이 되고 1년 후 못된 장난질을 일삼는 어린아이들이 없어졌다. 2년 후에는 시장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돈이 돌았다. 3년 후에는 밤이 되어도 문단속 하는 집이 없었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다. 4년 후에는 농부가 농기구를 밭에 두고 집으로 오는 밝은 세상이 되었고 5년 후에는 백성들이 군역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다.”
자산은 이처럼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동시에 구사했다. 그는 엄격한 법가의 형식에, 내용은 너그러운 유가로 채우면서 백성을 다스렸다. 이에 공자는 “정치가 관대하면 백성이 태만해진다. 이때는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만 매번 정치가 엄하고 혹독하면 백성이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럴 때는 백성의 상처를 어짊과 관대함으로 어루만져야 한다. 이처럼 정치는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동시에 펼쳐져야 한다. 자산이야말로 이를 몸소 실천한 재상이다”라고 자산의 정치 철학을 칭찬했다.
자산은 “덕이 있는 정치가만이 너그러운 정사인 ‘관정 寬政’으로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다. 엄하게 백성의 복종을 강요하는 ‘맹정 猛政’만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다. 정치는 때로는 불이, 때로는 물이 되어야 한다. 불은 그 기세가 맹렬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그래서 불로 죽거나 다치는 이가 적다. 물은 성격이 부드러워 백성들이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이해 오히려 물로 죽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성격을 잘 이용해야 한다”며 덕치와 법치의 합리적 혼용을 강조했다. 훗날 자산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재상 유길이 맹정은 제쳐놓고 관정만으로 정치를 했다. 이에 도둑이 많아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러자 유길이 도둑을 잡아 모조리 처형을 하는 등 엄격한 맹정을 펼치자 사회가 안정되었다. 유길은 “자산의 덕과 인 그리고 법치의 운용을 따라가는 길이 매우 어렵다”고 술회했다.
물론 자산은 항상 엄격하지만은 않았다. 법가와 대척점에 있는 공자가 “사람들이 자산이 어질지 않다고 말해도 나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산은 네 가지 도를 갖추고 있다. 행실이 공손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백성에게 은혜롭고 또한 의로써 백성을 다스린다”고 말할 정도로 자산의 근본 정치이념은 위민이었다. 공자는 안영이 죽었을 때 울지 않았지만 자산이 죽었을 때는 슬피 울었다고 한다. 기원 전 522년 자산이 죽었을 때 재산이 없어 자손이 그의 시신을 광주리에 넣어 산에 묻었다.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던 백성들이 돈이며 패물을 갖고 왔지만 가족들은 이를 거절했다. 백성들은 그 물건들은 차마 가져가지 못하고 자산의 집 앞에 흐르는 시내에 던졌다고 한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당근과 채찍
한 부서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사실 지난한 일이다. 회사는 다양한 조직원들이 모여 회사라는 명패 아래 ‘하나가 되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묵음으로 틀어놓은 TV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배역들이 각기 자신의 역할에 따라 소리치고, 움직이며 때로는 막장을 연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팀원 모두가 ‘어벤저스급’으로 이루어져 말 한 마디, 지시 하나 없어도 착착 알아서 진행되는 조직은 단 한 곳도 없다. 일사불란 한 군대조직마저 이러저레한 말이 나오고 사건이 벌어지는데 머리 굵은 성인들이 모인 회사는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조직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리더십? 그야말로 꿈에서나 가능한 조직이다. 그렇다면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 리더의 힘은 그가 갖는 권한과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당근과 채찍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인사조치, 고과 평점부터, 야근과 특근 및 출장까지도 누군가에게 호의를, 누군가에게는 편파적인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이 부서장의 힘인 것이다. 예수처럼, 혹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일방적으로 당근만을 사용하며 순하게 행동한다고 부서원들은 결코 고마워하지 않는다. ‘배려는 곧 의무가 되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너는 이번 인사에서 아웃이야’를 외치는 것도 촌스러운 리더십이다.
가장 좋은 것은 채찍이 든 손은 뒤로, 앞에는 당근을 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조직원 아니 인간의 본능은 먼 곳, 이면을 본다. 당근의 뒤에 존재하는 채찍을 조직원들은 잊지 않는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채찍은 보여주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제갈공명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마속을 베고 모두에게 경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지만 결론은 ‘1. 마속은 죽었다, 2. 제갈공명은 가장 아끼는 측근을 죽여야 했다’인 것이다. 직장은 연애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그럴듯한 말이 통용되는 곳이 아니란 뜻이다. 직장에서 인사조치하고, 징계를 하는 것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자산은 공평했다. 하지만 그가 재상이 되었을 때 각각의 세력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자산은 이를 일방적인 협상이나 무력만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다양한 정치공학을 이용해 중재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조정하고, 제거해 나갔다. 특히 자산에게 귀족 가문의 권력 쟁탈전은 예민한 문제였다. 자산은 모두의 반발을 예상해 천천히 그러나 양쪽 모두를 약화시킨 다음 가장 약한 상대부터 제거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했다. 강력한 권력 집단인 사 씨 집안의 자석이 양 씨 백유를 죽인 일이 있었다. 당연히 살인죄로 다스려야 했지만 사 씨의 권력과 군사력이 워낙 강해 그 처벌을 뒤로 미루었다. 백성들과 관리들은 “자산 역시 같은 귀족의 처벌에는 미온적이다”라는 뒷말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자산은 때를 보고 있었다. 서오범이란 자에게 미녀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사 씨 집안의 자남과 정혼한 사이였다. 하지만 자남의 사촌형 자석이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때 서오범의 여동생이 자남과 결혼을 하자 자석은 화가 나 군사를 이끌고 자남을 공격해 여인을 뺏을 생각으로 군사를 이끌고 자남을 공격했다. 하지만 자남은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해 공격해오는 자석을 창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집으로 돌아온 자석은 “나는 결혼을 축하하러 자남에게 갔는데 그가 불문곡직 나를 창으로 찔렀다”고 거짓 소문을 냈다. 고발 사건이 있자 대부들은 그 판결을 고민했다. 자산은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했다. 오히려 자남에게 죄를 물었다.
죄목은 네 가지였다. ‘왕이 있는데 무력을 동원한 점’, ‘자석은 상대부, 자남은 하대부인데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상 입힌 점’,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은 점’, ‘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사촌형을 해한 점’을 들어 자남을 오나라로 쫓아 보냈다. 사람들은 자산의 처리가 불공평하다고 했지만 자산은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자석은 기고만장해 ‘내가 왕이 되겠다’는 반란을 꿈꾸는 지경이 되었다. 자
자산은 전형적인 ‘이이제이’ 수법을 쓴 것이다. 잠재적 제거대상자들의 분쟁에서 약한 세력인 자남을 먼저 제거하고 곧이어 방심하고 있던 자석을 제거한 것이다. 이것으로 정나라를 좌지우지 하던 권력가문인 사 씨도 힘을 잃었다. 자산의 이 같은 정치술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모든 귀족 가문과 공경들은 자산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정세분석과 판단력 그리고 단호한 결단력에 심복해 그를 복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나라의 곳곳에 향교가 있었다. 이는 중간 관리와 사대부 등 하층계급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향교의 성격이 점점 변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불만불평을 늘어놓는 정치 활동 장소가 되었다. 이들은 당파를 형성하면서 세력화했고 급기야 폭동까지 일으켰다. 그 폭동으로 인해 자산의 아버지인 자국이 죽기까지 했다. 대부 연명이 자산의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향교의 폐지를 건의했다. 많은 사람들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대는 향교를 폐지하는데 자산이 적극 찬성할 줄 알았던 것. 하지만 자산의 대답은 “안 된다”였다. 자산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향교를 왜 없애려고만 하는가? 그곳에서 권력자의 정책을 논의하고 우리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없애려 하는가? 나는 그곳의 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점은 유지시키고, 잘못된 점은 고치고, 수정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해도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들을 수는 없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막는 것은 넘치는 홍수를 막겠다고 둑을 쌓고 물길을 다른 데로 유도하기 위해 길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산은 여론, 즉 백성의 언로를 개방함으로써 진정한 위민 정치의 완성을 꾀한 것이다.
기원 전 524년, 정나라, 위나라, 송나라에 큰 불이 났다. 불은 바람을 타고 번졌고 정나라는 이 화재를 진압하느라 많은 인력과 국고를 소모했다. 화재가 진압되자 나라에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하늘이 노한 징조로 큰 불이 난 것이다’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게다가 홍수까지 나면서 백성들은 더욱 불안에 떨었다. ‘용들이 싸우느라 물이 넘친다’는 소문도 퍼졌다.
많은 대부들이 자산에게 “큰 제사를 지내고, 점복을 담당하는 자들에게 보물을 주어 하늘의 노한 기운을 다스리자”고 건의했다. 자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늘의 뜻은 멀리 있고 사람의 행동은 가까운 곳이 있다. 무엇을 근거로 하늘의 뜻이 사람의 일상에 관여한다고 말하는가. 또한 사람이 싸울 때 용들이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우리가 용들이 싸우는데 관여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용에게, 용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럴 시간과 돈을 차라리 농경에 쓰고 각자 열심히 맡은 바 일을 다 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고 진정시켰다. 혹세무민과 천재지변에도 흔들리지 않는 현실적인 정치관이었다. 진정한 재상의 그릇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자산은 정치를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농부의 심정으로 밤낮으로 매진해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관리의 등용과 배치에 인재 우선주의를 적용했다. 다재다능한 인재도 필요로 했지만 또한 한 가지 재주만 갖고 있는 자들도 파격적으로 기용했다. 그리고 능력에 맞는 자리에 사람을 배치하는 안목이 뛰어났다.
그가 발탁한 대표적인 인재는 풍간자, 자대숙(유길), 자우 그리고 비심이었다. 풍간자는 사리판단과 정세 분석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자대숙은 수려한 외모와 신뢰감을 주는 말솜씨가 돋보였으며, 자우는 특히 외국의 실상을 파악하는 정보 분석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비심은 계책을 세우고 전략을 짜는데 월등했다. 자산은 이들의 재주를 한곳으로 모으는 전략적인 능력이 있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 이 네 사람의 능력을 골고루 썼다. 우선 자우를 불러 외국의 정보를 상세히 파악한 후에 비심에게 전체적인 전략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이를 풍간자가 다시 세부적인 항목을 다듬으면 자대숙이 이 외교 문서를 직접 갖고 가 다른 제후국을 설득하는 업무 분담을 한 것이다.
실수가 있을 수 없었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힘을 펴지 못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정나라로서는 외교 문서가 중요했다. 강대국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온갖 경우의 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자산이 이를 맡으면서부터 정나라의 외교 문서는 각 제후국에게 표본이 될 정도로 명분과 실리 어느 쪽도 기울지 않는 명문장으로 가득 찼다.
‘택능사지 擇能使之’ 즉 유능한 인재를 선택해서 그 능력을 잘 활용하는 것이 재상의 역할임을 자산은 몸소 보여준 것이다. 또한 자산은 관리들의 준비성과 공부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관리가 되어 얻는 높은 자리와 풍족한 재산이 자신을 비호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관리는 배운 다음에 비로소 관직에 나온 자들을 말하는 것이지, 관직을 맡고 일과 학문을 배운다는 것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준비된 관리의 자세를 강조했다.
리더십 #4 | 예의를 지키면서 당당하게 실리를 얻다
자산은 국내정치의 안정과 더불어 외교력에도 온 힘을 다했다. 정나라의 목적은 오로지 생존이었다. 자산은 먼저 생존하고, 후에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드는 정책을 시행했다. 비록 나라의 형편이 궁색해 큰 나라를 섬기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비굴하지 않았다. 그는 국내 정치의 전략을 그대로 외교에도 대입했다. 즉 법가와 유가를 혼용하는 것처럼 정나라를 둘러싼 강대국의 모순을 이용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정나라의 북쪽에 위치한 진나라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무려 200여 년 동안 중원의 패자로 군림했다. 남쪽 초나라의 팽창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초나라는 ‘강함’을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중원의 제후국들이 초나라를 ‘오랑캐’ 즉 남만이라 부르며 미개한 집단으로 여긴 것이다.
자산은 진과 초나라의 현실과 원하는 것을 냉철히 분석했다. 진나라는 겉으로는 중원의 패자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리, 즉 작은 이익에 연연한 국가였다. 초나라는 자신들도 중원의 국가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자산은 이를 이용했다. 초나라에게는 ‘당신들은 분명 진나라와 함께 강대국이다’를 인정하는 발언과 행동으로 초나라의 호감을 얻었다. 그리고 진나라에게는 ‘당신이 이곳의 대장이다’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면서 진나라에게는 ‘초나라가 우리의 친구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진나라도 정나라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초나라가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이렇게 외교 전략을 세운 후 자산은 국력 신장에 매진했다. 결국 정나라는 중원의 ‘작지만 강한 나라’ 즉 ‘허브 국가’가 되었다. 정나라는 ‘조진모초 朝晉慕楚’ 즉 아침에는 진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초나라를 섬기는 형편에서 자산 이후 ‘종진화초 從晉和楚’ 진나라는 따르고 초나라와는 친하게 지내는 ‘외교적 자주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기원 전 526년, 진나라 대부 한기가 정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진귀한 옥환 한 쌍 가운데 하나를 갖고 있던 그는 정나라 상인이 갖고 있는 나머지 하나를 갖고 싶다고 청했다. 자산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대부 유길이 “공께서 그깟 옥환 하나가 아까워 저들의 화를 돋우면 더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옥환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청했다. 자산은 간공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진나라 한기에게 말했다.
“나라를 경영하면서 큰 나라를 섬기고 우리를 작게 보는 것이 걱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우리의 힘과 위치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이 더 걱정이다. 저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장차 무엇을 요구할 때마다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소국은 대국을 섬기고, 대국은 소국을 보호하는 것이 이치이다. 진나라 사신께서는 만약 옥환을 얻어 가시면 동맹을 잃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공물을 바치라하면 우리는 망해도 그 명령을 거부할 것이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지만 당당한 자산의 역설에 진나라 사신 한기는 사과를 하고 말았다.
▶‘친구도, 적도 아닌 DMZ가 되라’
직장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상사들을 모시고 있다면 참으로 처신이 곤란하다. 어떤 한 쪽의 편을 들 수도 없고 무색무취하게 ‘나는 일만 하겠다’를 고개를 책상에 붙이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더구나 직장은 기본적으로 ‘줄 세우기’ 즉 라인을 결정하라고 강요하는 성질이 있다. 한쪽으로 줄을 서는 것은 손쉬운 선택이다. 큰 우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비바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인사 사령이 붙으면 특정 임원의 거취에 따라 그야말로 줄초상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방법은 딱 하나다. 두 명의 상사가 모두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과 능력에서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저 사람은 진짜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평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굳이 피곤하게 눈치 보며 줄을 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때 주의 할 것은 그 어떤 쪽에서도 당신에 대해 “아무리 보아도 저쪽 라인 같아”라는 인식을 주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최소한 적은 아니다’라는인정을 받아야 한다. ‘내 편도 아니지만 적도 아니다’가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모임 외에 양쪽의 사적인 모임이나 회식은 되도록 참석하지 말아야 하고, 한쪽에서 들은 정보를 다른 쪽으로 옮기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회사 안에서 일종의 ‘DMZ’ 역할을 해야 한다. 일촉즉발의 전쟁의 기운은 감돌지만 그 어느 쪽도 당신을 놓고 싸우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조직에선 ‘라인의 생성과 쇠퇴’가 반복되며 당신의 처신은 ‘회사를 위한 행동’으로 이해되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매일경제]
[출처:정보- 책 춘추전국이야기. 4: 정나라 자산 진짜 정치를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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