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대(淸代) 화가 이학령(李學齡)의 <도연명상(陶淵明像)> 단선(團扇) (1893年作)
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
(아기능위오두미절요향향리소아)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 촌뜨기에게 허리를 꺾으리
- 동진(東晉) 말의 전원시인인 도잠(陶潛, 도연명 陶淵明)은 29세에 관직에 입문해 좨주(祭酒)와 참군(參軍) 등의 벼슬을 지냈다.
41세 때 고향인 심양현의 이웃 동쪽 고을인 팽택(彭澤)현의 현령(縣令)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80일쯤 지난 뒤 상급 관청인 군(郡)에서 현(縣)을 시찰하는 감찰관이 파견되어 왔다.
이 때 부하 직원이 현령인 도잠(陶潛)에게 "부디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예를 갖춰 감찰관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도잠이 탄식하면서 한 말이 바로 위의 구절이다.
"다섯 말의 봉록 때문에 이따위 시골구석의 새파란 녀석에게 허리 굽히고 머리 조아리며 굽실거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즉석에서 현령(縣令)의 인수(印綬)를 풀어 던지고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평소 꿈꾸었던 귀거래(歸去來)는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본의아닌 일로 좀더 일찍 이루어진 셈이다.
≪송서(宋書)≫ <은일전(隱逸傳)>에 나오는 얘기다. 비슷한 표현으로 吾安能爲五斗米折腰於鄕里小兒라는 구절도 눈에 띈다.
훗날 시인 이백(李白)도 <몽유천모음유별(夢游天姥吟留別)>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비슷한 감정을 노래한 바 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권세 있고 귀한 자나 섬기며, 내 마음과 얼굴을 활짝 펴게 하지 않겠는가"(安能摧眉折腰事權貴, 使我不得開心顔).
도연명이 귀거래(歸去來)를 외치며 낙향하자 20세 때 속현(續絃)한 아내 책(翟)씨는 그런 남편을 군소리 한마디 없이 공손히 맞이했다.
어쩌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남편이 좋아하는 술을 빚어놓았다가 대접했다. 그에게 아내는 친구이자 동지였고 지음(知音)이었다.
※ 청말(淸末) 화가 황산수(黃山壽)의 <陶淵明像> (1883年作)
※ 청말근대 화가 이방원(李芳園)의 <陶淵明像> (1934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주매촌(朱梅邨)의 <陶淵明像> 성선(成扇) (1941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나탁(羅卓)의 <陶淵明像>
※ 근현대 중국화가 사치류(謝稚柳)의 <陶淵明像>
※ 근현대 중국화가 유능창(劉凌滄)의 <陶淵明像> (1981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서종호(徐宗浩)의 <陶淵明像> (1929年作)
※ 서종호(徐宗浩)의 <陶淵明像> (1948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금개번(金開藩) 수석공(壽石公)의 <화훼 사병(花卉 四屛)> (1941年作). 4폭 모두 귀거래(歸去來) 이후 도연명의 삶과 그의 시(詩)를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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