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오스트리아]Franz Schreker [프란츠 슈레커]

Bawoo 2017. 10. 2. 21:45

Franz Schreker

(originally Schrecker; 23 March 1878 – 21 March 1934)

 Austrian composer, conductor, teacher and administrator.[Primarily a composer of operas, Schreker developed a style characterized by aesthetic plurality (a mixture of Romanticism, Naturalism, Symbolism, Impressionism, expressionism and Neue Sachlichkeit), timbral experimentation, strategies

of extended tonality and conception of total music theatre into the narrative of 20th-century music.


[작품 연주 모음]






Franz Schreker

(프란츠 슈레커, フランツ・シュレーカー)

 

Franz Schreker(프란츠 슈레커)

후기 낭만주의 오페라 주도

 

 프란츠 슈레커(1911년경)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1878-1934)는 작곡가 겸 지휘자였다. 비엔나 후기 낭만주의 오페라를 주도했다. 오페라가 중심인 그의 작품세계는 심미적 복수성(Aesthetic plurality)이라는 어려운 용어로 설명된다. 즉,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그리고 근대 독일 예술운동의 하나인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의 혼합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음색적 실험, 광범위한 조성(調性)의 전략, 종합적인 음악극장 개념의 도입 등도 그의 작품의 특색이라고 할수 있다.


프란츠 슈레커는 린츠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궁정 사진가였으며 어머니는 슈티리아(Styria)가톨릭귀족회의 멤버였다. 부모는 유럽의 여러 지역을 여행 다녔기 때문에  슈레커 역시 여행을 다니면서 자라났다. 188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가족은 린츠를 떠나 비엔나로 왔다.


슈레커는 1892년 비엔나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슈레커의 고향인 린츠

 

비엔나음악원에서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전공하여 유명한 아놀트 로제(Arnold Rosé)로부터 배웠으나 나중에는 작곡으로 옮겨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로부터 배웠다. 1900년 작곡가로 비엔나음악원을 졸업했다. 비엔나음악원에 다니고 있을 때인 1895년 되블링음악동호회(Verein der Musikfreunde Döbling)를 설립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비엔나 음악원을 졸업한 두에 당장 마땅한 직업이 없어서 생활을 위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1907년 필하모닉합창단을 구성하여 지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필하모닉합창단은 많은 연주를 했다. 그중에는 쳄린스키의 ‘시편 23장’과 쇤베르크의 ‘세상의 기쁨’(Friede auf Erden)을 초연한 것도 포함된다.

 

슈레커의 바이올린 스승인 아르놀트 로제

 

작곡가로서 슈레커의 첫 성공작은 오스카 와일드의 스토리를 기본으로 한 판토마임(발레곡) Der Geburtstag der Infantin(공주의 생일)이었다. 1908년 비엔나 쿤스트샤우(Kunstschau)에서 초연되었다. 궁정 발레단의 인기 발레리나 그레테 뷔젠탈(Grete Wiesenthal)이 초연의 주역을 맡은 것이었다. 이 작품으로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다지게 되었다. 19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오페라 Der ferne Klang(먼 곳으로부터의 소리)는 슈레커의 명성을 단번에 드높여 주었다. 이 작품은 예술가가 먼 곳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신비하게 추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오페라는 알반 베르크에 영향을 주어 베르크는 후에 이 작품의 성악 스코어를 만들었다. 그후 그는 비엔나음악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내놓은 두 편의 오페라 Das Spielwerk und die Prinzessin(장난감과 공주)은 1913년 3월 15일 프랑크푸르트와 비엔나에서 동시 초연되었다.

먼 곳으로부터의 소리’보다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비엔나에서의 초연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켜 결과적으로 슈레커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슈레커의 발레곡 '공주의 생일'을 초연한 비엔나 궁정발레단의 그레테 뷔젠탈(1908년)

 

제1차 대전이 일어나 작곡가들은 몇 년동안 제대로 활동을 할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오페라 Die Gezeichneten(서명)의 초연(1918 프랑크푸르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명실공히 그를 현대오페라 작곡가의 선두로 올려놓았다. 1920년에 발표한 오페라 Der Schaztgräber(보물 사냥꾼)는 슈레커의 경력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었다. 이 오페라의 초연(프랑크푸르트) 이후 슈레커는 비엔나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슈레커의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톤컬러(음색)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거장이었다. 그의 오페라에는 간혹 성적갈등을 표현하는 순수 파토스적 주제를 담고 있다. 한편 그는 오페라 공연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배경장면을 나란히 배치한다든지 또는 겹쳐서 2중으로 보이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에는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충분히 표현토록 하는 배려가 담겨있다. 즉, 음악의 각기 다른 층을 배경에 따라 표현토록 한 것이다.

 

'보물사냥꾼'(샤츠그래버)의 무대.

 

슈레커의 명성은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노래하는 악마’(Der singende Teufel) 이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고 더구나 나치의 등장과 함께 반유태인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유태계인 슈레커도 반유태인 조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1932년 베를린에서 슈레커의 오페라 Der Schmied von Gent(겐트에서 온 대장장이)가 초연될 예정이었으나 우익 데모자들의 방해로 공연되지 못하였다. 이어 나치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예정된 오페라 Christophorus(크리스토포러스)의 공연을 강제로 금지하였다. 1932년 6월에, 슈레커는 비엔나음악아카데미 학장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이듬해인 1933년 3월, 슈레커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56세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베를린의 휘텐베그에 있는 프란츠 슈레커의 묘지


[우리말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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